책 소개 하나 하겠습니다.

한국서양근대철학회에서 펴낸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창작과비평사)이 엊그제 출간되었습니다. [서양근대철학](창작과비평사, 2001)에 이은 두번째 공동저작인데, [서양근대철학]을 재미있게 읽은 분들은 이 책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서양근대철학]이 인물 중심의 철학사인 데 비해, 이 책은 열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근대철학을 다루고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서양근대철학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는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읽으시고 서평들도 많이 써주시기를 ...^^(자기는 안쓰면서-_-;;;)

 

[목차]

 

첫번째 쟁점: 물질과 운동
자연현상을 물질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두번째 쟁점: 방법
지식 획득의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세번째 쟁점: 지식
지식은 어디까지 정당화되는가

네번째 쟁점: 지각
수동적인 감각인가, 마음의 능동적 행위인가

다섯번째 쟁점: 실체
세계는 하나의 실체로 설명되는가, 다수의 실체로 설명되는가

여섯번째 쟁점: 자아
무엇으로 자아존재의 확실성을 증명할 것인가

일곱번째 쟁점: 정념
원초적인 것인가, 파생적인 것인가

여덟번째 쟁점: 도덕과 자유의지
도덕의 기초는 감정인가 이성인가, 그리고 자유의지는 도덕의 필수조건인가

아홉번째 쟁점: 개인과 사회
인간은 원자적 존재인가, 공동체적 존재인가

열번째 쟁점: 신과 종교
선한 신과 악은 양립 가능한가

 

[내용 소개]

 

왜 쟁점 중심의 근대철학인가
2500년 서양철학사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근대철학은 그 문제의식에서 현대와 맞닿아 있다. 근대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철학의 주제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관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400년전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이 쟁점으로 삼았던 문제들은 여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2001년 창비에서 발간된 ?서양근대철학?이 서양근대철학을 인물 중심으로 집대성한 것이라면 이 책 ?서양근대철학의 열가지 쟁점?은 근대철학을 꿰뚫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쟁점 중심 접근을 채택했다. 인물별, 연대기별 서술방식에 집중되었던 기존의 철학서 체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참신한 기획이자 새로운 시도인 것이다. 근대 철학자들이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열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주제별로 깊이있는 탐구의 깊이를 더하면서 진지하고 치열한 근대철학의 세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한 '서양근대철학회'는 르네쌍스부터 칸트 이전의 유럽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학회이다. 단순히 서양의 근대철학을 소개하거나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것으로 소화 흡수하여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02년 가을에 기획된 이 책은 26명의 국내 중견 소장학자들이 쟁점별로 팀을 구성하여 2년 동안 매달 쎄미나를 통해 공동집필하고 독회를 거듭하면서 완성해낸 역작이다.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연구성과를 우리의 학자들이 우리의 언어로 정리한 것으로서 학계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근대철학 속의 쟁점들
첫번째 쟁점: 물질과 운동 근대는 과학이 세상을 보는 눈을 크게 바꾸어놓고 합리적인 사고와 삶의 기준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베이컨, 데까르뜨, 홉스, 라이프니츠 등 과학자이기도 한 근대 철학자들은 2천년 동안 서양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의 핵심이 되는 두 축인 물질론과 운동론을 극복하는 새 자연철학의 원리, 즉 물질의 운동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계론의 전통을 세워 근현대 학문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

두번째 쟁점: 방법 근대 과학과 철학에서 말하는 방법이란 새로운 철학적 원리 혹은 자연학적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따라야 할 절차를 말한다. 근대 철학자들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적 학문관과 그 방법론을 극복하고 회의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과학의 의미분석 작업의 일환으로 방법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험론자들이 자연주의적이며 귀납론적 방법을 택하였다면, 합리론자들은 선험적 원리를 인정하고 지식을 존재적 원리나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적용하였다.

세번째 쟁점: 지식 가톨릭교회의 전적인 권위에 문제를 제기한 교회개혁운동과 고대 회의주의의 일파인 퓌론주의의 부활을 계기로 인식론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생겨났다. 근대 철학자들은 지식과 신앙을 구별하고 확실한 지식을 찾는 일이 철학자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앎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앎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앎의 한계는 어디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번째 쟁점: 지각 고대철학에서도 지각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적 기능이 우월하다는 확신 때문에 지각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부차적이었다. 합리론자들은 대체로 외부 사물을 지각할 때 생기는 오류 때문에 지각을 신뢰하지 않고 지적 직관에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반해 지각에 대한 체계적이고 충실한 관찰과 분석은 경험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각표상설(데까르뜨)과 주관적 관념론(로크, 버클리), 현상론(흄), 상식적 실재론(리드)과 프랑스 감각주의 철학(꽁디약, 멘 드 비랑)이 근대철학의 대표적인 지각이론이다.

다섯번째 쟁점: 실체 근대철학에서는 목적론적 자연관이 폐기되고 기계론적 자연관이 확립됨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실체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합리론자들은 실체를 존재론적 탐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실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무엇이며 다른 존재론적 요소들(우연성, 힘, 속성)과 어떤 원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규명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하였다. 이에 반해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실체문제를 전혀 다른 인식론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대체로 실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거나 정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했다.

여섯번째 쟁점: 자아 근대철학이 서양의 지성사에 기여한 공로는 바로 '자아의 발견'이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삶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신 중심 사회인 중세라는 역사적 배경과 '자아의 발견'이 대두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 인격, 자율성, 자발성 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특히 뉴턴과학과 명예혁명을 성취한 근대 영국에서 강하게 일어났으며 경험론이 그 중심부 역할을 했다.

일곱번째 쟁점: 정념 근대 철학자들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다양한 감정론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대이다. 합리론자들 중 데까르뜨와 말브랑슈는 심신이원론에 기초하여 정념론을 전개시켰으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이론을 통해 정신과 일체를 일원적으로 통합했다. 반면 경험론자들에게 정념의 문제는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념이란 행위를 위한 의도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작용할 수 있는 의지와 작용당할 수 있는 정념을 구분한다.
여덟번째 쟁점: 도덕과 자유의지 근대의 철학자들은 신적 의지나 자연적 본성이나 목적에 근거하여 선과 도덕을 이해했던 과거의 사고방식과 규범들이 더이상 실천적 지침으로서 적절치 못함을 지적했다. 근대 도덕철학의 핵심적 관심은 도덕적 사고의 규범과 기준을 새로이 정초하는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도덕적 덕목을 탐구한 고대와 달리 도덕적 사고의 가능성과 근거 그리고 규범의 당위성을 탐구하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근대 도덕철학은 덕윤리가 아니라 규범윤리의 특징을 지닌다.

아홉번째 쟁점: 개인과 사회 종교적 권위와 이에 근거를 둔 권력과 제도, 질서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한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더이상 신의 권위나 종교적 교리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마끼아벨리, 홉스, 로크, 루쏘, 칸트, 헤겔 등은 도덕이나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기적인 개인이 군집상태인 이른바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이로부터 어떻게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였다.

열번째 쟁점: 신과 종교 전능하고 지선한 사랑의 존재인 신이 어떻게 세상을 이토록 시련이 많은 곳으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는 물음은 신비와 신앙으로 모든 의문을 묻어버리던 고대인이나 중세인들보다는 이성의 눈을 뜨고 좀더 확대된 세계를 목격했던 근대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신의 존재를 계시가 아닌 이성의 힘만으로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악의 존재와 선한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도록 변론하는 문제 역시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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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9-2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개하신 책에서 발마스님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전에 나온 서양근대철학과 함께 구입해서 보면 근대철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당장은 아니지만 찜해두었으니 언젠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산 2004-09-2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도 공동저작에 참여하셨다면 당장 주문이구요, 아니면 년말에 주문입니다.
.... 아니구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balmas 2004-09-2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근대철학]과 함께 보시면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저도 글을 하나 쓰긴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궃은 일에는 쏙 빠져서 공동필자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더욱이 제가 제일 막내뻘되는 데 말이죠 ... -_-;;;
 

오늘(금요일) 낮에 일이 있어서 문학과지성사에 들렀는데, 마침 [테러 시대의 철학]을 한 권 줘서(공짜밝히기는 ... -_-;;;) 조금 읽어봤다. 생각대로 번역이 괜찮더군. 아직 책을 못본 분들을 위해 한 대목을 맛보기로 인용해 보면(저작권 시비에 말려들지는 않겠지???) ...

 

보라도리: 9.11은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목도하게 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말이죠.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죠?

데리다: Le 11 septembre[이하 9.11]라고, 혹은 우리가 두 언어로 말하는 데 동의한 이상, "september 11"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나중에 우리는 이 같은 언어의 문제로 되돌아와야 할 겁니다.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딱 날짜만을 말하는 이러한 명명 행위의 문제로도 되돌아와야 할 거구요--당신은 '9.11'이라 말하면서 이미 인용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에 대해 제가 뭔가를 말하도록 권유하려고 당신은 지금까지 5주 동안 우리의 공적 공간과 사생활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날짜 혹은 날짜 기입을 마치 따옴표 안에서인 듯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숙어로 말하자면, 뭔가가 날짜를 만듭니다fait date. "날짜를 만들다, 획기적 사건이 되다", 이는 늘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 여기 식으로 말해, "전례 없는" 사건으로 느껴지는--외견상 직접적으로는 그런 사건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최소한 느껴지는--무언가에 의해 가해진porte 일격이며, 이것이 남긴 효력portee 자체입니다.

물론 저는 "외견상 직접적"이라 말했습니다. 이 '느낌'이란 게 보기보다 덜 자생적이거든요. '느낌'이란 대부분 조종된 것이며, 짜맞춰진 건 아닐지라도 구성된 것, 어쨌든 경이적인 기술-사회-정치적 기계로 매개된 것, 매체화된 것입니다. 하여간 "획기적 사건이 된다는 것"은 '뭔가'가, 아직 어떻게 정체를 부여하고 규정하고 인지하고 분석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망각할 수 없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보편력calandrier universel의 공용 문서고에 남게 될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입니다. 물론 이는 가정상의 보편력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겐 가정과 전제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시작에서부터 강조하고 싶군요. 이러한 가정과 전제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전략이거나, 아니면 심사숙고되고 조직되고 계산된 전략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날짜를 가리키는 색인, 날짜만을 부르는 수식 없는 벌거벗은 행위, 극소적 지시사, 이것이 겨냥하는 극소주의적 표적, 이는 또한 뭔가 다른 것을 표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뭘까요? 그건 바로, 방금 일어난 이 '것', 이 가정상의 '사건'을 어떻게든 달리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의미가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겁니다. 가령, '국제 테러리즘'이라는 행위--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는 우리가 말해보려는 어떤 것의 독특함을 파악케 하기에는 결코 엄밀하고 만족스러운 개념이 아닙니다.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느끼지만, 이 '것'은 특정한 귀결들을 부인할 수 없도록 펼쳐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 이 '사건'의 장소와 의미는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개념 없는 직관처럼, 지평에 아무런 일반성을 지니지 않는, 심지어는 어떠한 지평도 수반하지 않는 유일무이함처럼, 이것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언어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게 되고, 결국 어떤 날짜를 기계적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이 날짜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해버립니다. 일종의 제의적 주문처럼, 이와 동시에 축귀의 시처럼, 저널리스트적 연도(連禱)나 자신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있음을 자백하는 수사적 상투어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9.11, 9.11, 9.11이라고 말하거나 명명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명명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호명이 간결한 건(9.11, 9.11) 단지 경제적 필요나 수사적 필요 때문만은 아닙니다. 환유--어떤 이름, 어떤 숫자--의 전보문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나 재인하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는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 아직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재인지함으로써 규정 불가능한 어떤 것을 털어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계산되었든 아니든, 잘 계산되었든 아니든) 9.11,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가져온 최초의 효과, 논란의 여지 없는 최초의 효과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하기에 오히려 더더욱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단번에 두 번의 푸닥거리를 하기나 하려는 듯, 곧 한편으로는 '사물' 자체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주술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반복은 늘 정신적 외상traumatisme을 중화시키고 무감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주는 효과를 낳으니까요. 텔레비전 이미지의 반복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하기로 하죠),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그 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명명하고 규정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단순히 날짜를 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9.11, 뭔가 끔찍한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을 가능한 한 이 같은 언어 행위 및 진술 행위 가까이서 부인하기 위해. 실상 우리가 폭력에 대해 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다른 모든 분과 더불어 저 역시 그렇듯, 숱한 사망자에 대해 진심으로 비탄해 마지않는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이 결국 이런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나중에 이 문제로 되돌아올 겁니다. 당분간 우리는 다만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주 동안 뉴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은 제가 9월 11일 날 머물렀던 중국에서, 그 다음 9월 22일 가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미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약간은 맹목적으로 이 날짜에 준거하지 않고서,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 아무 것으로나 말을 시작한다는 건 단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 있다고,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고, 이미 사람들은 느끼고 있으며 또한 당신에게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말이죠. 저는 어김없이 이 명령에 따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선 당신과의 이 우애로운 인터뷰에 참여함으로써 저는 또다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충격과 가장 충심 어린 연민을 넘어, 9.11, 여기 맨해튼의 코앞에 있고 워싱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난 듯 보이는 일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기를, 그리고 "사유하기"를 호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름을 붙이고 날짜를 기입하는 이 같은 언어 현상을, (수사적이면서도 주술적이고 또한 시적인) 이 반복 강박을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늘 믿고 있습니다. 이 강박이 무엇을 의미하고 나타내고traduit 혹은 누설하는지trahir[이건 "기만하는지"나 "왜곡하는지"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인용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성급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하고 싶어하듯 언어 속에 빠져들어 감금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바로 언어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그리고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9.11, 9.11, 9.11, 9.11"이라 반복하도록 부추기는지를, 언어와 개념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사건이 가져온 이와 같은 일차적 효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좀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여유를 가지고서 자유롭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결국 아직 알지 못하는데도, 그리고 당신이 부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9.11' '9.11'이라 명명하라는, 반복하라는, 또다시 명명하라는, 그 자체 위협적인 이러한 명령. 도대체 어디서 이러한 명령이 우리에게 도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명령에 강제될까요?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이 위협적 지시를 내렸을까요?(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는 테러리스트가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테러를 가하는[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이 '것', '9.11'은 "우리에게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 인상이란 뭘까요? 사건이란 또 무엇입니까? 특히 '대사건'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저는 하나 이상의 주의 사항을 강조하려 합니다. 물론 경험주의를 넘어서기를 겨냥하면서도 저는 이를 외견상 '경험주의적' 스타일로 수행할 겁니다.  분명 18세기 경험주의자라면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하겠죠. 거기 어떤 '인상'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이는 당신이 영어로--이는 우연이 아닙니다--'대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준 인상이라고. 저는 영어를 강조했는데, 물론 이는 영어가 당신의 언어도 저의 언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뉴욕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반복하라는] 명령이 무엇보다도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거의 두 세기를 거치는 동안--정확히 말해 1812년 이래로--처음으로 제 국토에서 표적이 되고 습격당하고 침범당했다 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이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고 느끼는 세계 질서가 대부분 앵글로-아메리카 고유어idiome[이런 경우에는 "방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인용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 질서에서 이 고유어는,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정치적 담론과, 국제법, 외교 관례, 미디어, 그리고 가장 거대한 기술과학적, 자본주의적, 군사적 권력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헤게모니가 지닌 여전히 수수께끼같으면서도 결정적인critical 본질입니다. 결정적인''이라는 말을 저는 '결정하는' '잠재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을 내리는'의 의미로 사용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 '인상'이 정당하든 아니든, 이 '인상' 자체가 하나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히 분화된 방식으로 고유하게 세계적인 효과일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인상'은, 그것을 숙고하고 소통시키고 '세계화'한,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것을 우선적으로 형성하고 산출하고 가능케 한 일체의 정서와 해석 및 수사법들과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상'은 그것을 산출한 "바로 그 사물 혹은 사태"와 닮게 되죠. 이른바  '사태'가 '인상'으로, 따라서 사건 자체가 '인상'으로 환원될 순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건은 (일어난 혹은 도래한) '사태' 자체와, 이른바 '사태' 자체가 부여하고 남겨두고 만들어낸 (그 자체 '자생적'이면서도 '조종된') 인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상이 'informee[형식을 부여받는다/정보화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더 인용했으면 좋겠지만, 타자치기 싫어서(;;;), 사실은 저작권법에 저촉될까 두려워서(;;;) 이만 줄인다. 하지만 데리다의 전형적인 논변(또는 이 경우에는 즉흥적인 대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훨씬 더 다양한 수사법적 장치가 동원되고 논변의 가닥이 좀더 복합적이겠지만, 인용한 이 구절만으로도 데리다 특유의 논변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논변과정에서 중요한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만큼 데리다의 논변의 의미, 그것이 낳는 의미효과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데, [시선의 권리]를 포함한 많은 국역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 문단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리다의 난해함의 8할은 바로 이런 오역 때문에 생겨나는 난해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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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데리다 저서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올해 이미 출간된 책만 해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와 [시선의 권리](아트북스)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 지성사)가 있고, 조만간 출간될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까지 하면 다섯 권이 출간되는 셈이죠.

지난 번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 상태에 관해 간단한 글을 올린 적이 있고(그런데 후속 글은 계속 감감무소식 ... -_-;;;), [시선의 권리]가 출간되었을 때에도, 번역상태에 대해 불안감이 든다는 지적을 했습니다(7월 10일 마이페이퍼).

오늘은 간단하게, 최근 번역된(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세 권의 책, [테러 시대의 철학], [목소리와 현상](출간예정)과 [시선의 권리]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먼저 좋은 소식(아마도)에 관해 말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주 초에 [테러 시대의 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오반나 보라도리라는 철학자가 데리다와 하버마스를 각각 초빙해서 인터뷰를 하고, 이 사람들에 관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라는 동시대의 두 거장, 더욱이 그동안 상이한 철학적 입장을 보여온 두 사람이 9, 11 테러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해 견해를 밝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되기 전부터 영미권과 유럽 철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모은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데리다가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현재의 국제정세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고, 또 하버마스의 견해와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섣불리 단정적으로 좋은 번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또 번역자들 중 두 사람(한 분은 지방국립대의 전임교수로 재직중인 선배고, 다른 한 사람은 제 후배입니다)이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오해를 살 염려도 있지만, 번역자들이 꼼꼼한 사람들이고 이미 다른 책들을 잘 번역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 책의 번역도 잘 되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에 유학 중인 제 후배 한 명이 [목소리와 현상]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번역은 다 끝나고 이제 교열을 보고 있는데, 저에게도 원고를 보내줘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친구는 원래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고 석사논문으로 데리다의 후설비판을 다루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다 잘 하는 데다가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책을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으니, 국내에서는 이 책의 번역자로 더 이상의 적격자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보니, 실제로 번역도 매우 공을 들인 좋은 번역이더군요.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데리다 한글본을 한 권 더 얻을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이상이 좋은 소식(아마도)이고, 다음은 나쁜 소식입니다.-_-;;; 지난 8월 20일경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내는 [북 앤 이슈]라는 서평전문지에서 서평을 하나 부탁받았습니다. 바로 [시선의 권리]에 관한 서평인데요, 알고 보니까 이 단체는 한달에 한번씩 인문,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대중문화와 예술, 실용, 청소년, 어린이 등의 분야에서 이 달의 책을 선정해서, 선정된 책에 관한 서평을 싣더군요. 인문 분야에서는 매달 6-7권 정도의 책을 선정하고 대중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는 2종 정도를 선정하던데, [시선의 권리]는 마침 9월의 책으로 선정되어, 저에게 서평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밀려 있는 일들 때문에 서평을 거절했는데, 담당자가 계속 권유하고, 또 지난 번에 마이페이퍼에서 이 책의 번역상태를 한번 점검해보겠노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번역을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에 서평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쁜 일들 먼저 해결하고 지난 주부터, 강의 준비하는 틈틈이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참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지난 번에도 "역자 소개를 보니 번역한 분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공부한 분이더군요. 번역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정황상 번역의 상태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때의 예상, 그 때의 불안감은 그대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시선의 권리]라는 책은, 혹시 벌써 구입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벨기에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대해 데리다가 상당히 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다의 이 '해설'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점이지요. 데리다가 수사법과 논증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활용한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지적한 적이 있지만, 이 '해설'은 이런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해설'은 문자로 된 텍스트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문자와는 상이한 이미지들의 연속적인 배치에 관한 '해설'이기 때문에, '해설'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에 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불어에 관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데리다의 언어유희에 관한 섬세한 주의력이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까,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불어의 기본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제대로 번역될리가 있겠습니까? 데리다의 '해설'은 가상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짧은 문단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번역은 정말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는 게 아니라, 오역이 없는 문단을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한 가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역자가 달아놓은 70여개의 역주인데, 이 주들 대부분은 데리다의 논의맥락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내용이더군요. 겉보기에는 무언가 데리다의 심오한 논의를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학적인 주이지만, 실제로는 데리다의 논의와 무관하고 오히려 내용을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역주들이었습니다.

역자도 문제이긴 하지만 출판사 역시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광고(사실은 터무니없는 광고이긴 하지만.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를 낼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그리고 역자에게 거의 불어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이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적어도 불어전공자 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이나 교정을 맡겨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이런 번역을 버젓이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허위과장광고 아래 팔아먹으려는 그 저의가 정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한국출판인회의라는 단체의 공신력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한다는 발상 자체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책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누가 보상할 건가요?

이래저래 1년만에 또다시 엉터리 데리다 번역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어쨌든 서평을 모레까지 써서 보내고, 조만간 알라딘을 비롯한 몇 군데 인터넷 서점에 또 한번 험악한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제 데리다 번역본은 읽을 만한 게 못된다는 생각을 아주 굳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섣불리 서평을 실으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도서선정기관에서도 데리다는 아예 처음부터 선정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니 차라리 점잖게 한 마디 하는 걸로 그칠까요?

---그러길래, 뾰족한 도움도 못되고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철학자에 뭐하러 그렇게 관심을 두고 혼자 분통을 터뜨리고 하냐? 모른 척하고,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소개하고 읽으면 될 것을, 쯧쯧 ...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누구? 네그리? 지젝??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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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0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 험한 평을 하시든, 점잖은 평을 하시든, 발마스님 응원합니다! ^^

참, 그리고 지난번에 지나는 말로 하신 주제의 강의록, 정말 궁금합니다.

balmas 2004-09-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응원해주시면 든든하죠.^^

그리고 [현대의 철학적 문명론]이라는 강의에 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_-;), 다음에 한번 말씀드릴게요.

hoyami 2004-09-09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s name is Boradori? Really? Is he one of the Teletubbies? Haha. I've sent you an email, so please chek it!

balmas 2004-09-09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사실은 Borradori야. r자가 하나 더 붙지. 텔레토비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메일은 잘 받았어. 그런데 부탁할 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었으니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aporia 2004-09-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일도 많으신데 분통 터질 일이 생기셔서 걱정이군요.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불어를 못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리다를 번역하겠다고 나섰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의 불길한 예감은 그냥 예감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이 나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거든요.
결국 선생님과 동료분들이 힘내시는 수 밖에 없겠군요. 저는 허접한 독자리뷰나마 올려서 이 책은 훌륭하다고 열심히 추천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법의 힘" 독자리뷰를 써야 하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계속 미뤄지네요. 어쨌든 힘내세요!

릴케 현상 2004-09-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나 문제가 많다니...

balmas 2004-09-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 문제가 많죠.
전 데리다 번역에서 이런 게 전형화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예요.

릴케 현상 2004-09-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번역서만 읽는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얘기 들으면 좀 불안해져요.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도 다 문제가 있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있나보다 하는...

balmas 2004-09-1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내용이 잘 이해가 되고 잘 넘어가면, 대개 그 책은 좋은 번역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거나, 이해가 되다가 어느 대목에서부터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가 없다거나 하면 그건 대부분 오역 때문이죠.
그나저나 이런저런 번역본들 비판하면서 저도 늘 사람들에게 공연히 불안감만 주는 게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쉽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비판이 오히려 사람들의 독서의욕을 꺾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생산 및 소개와 유통이 겪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저런 번역본들(특히 고전이거나 좋은 책들)의 문제점과 좋은 점들은 전문가들이나 관련된 단체들에서 공정하게 평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신문 서평은 실용서나 취미교양서 위주로 흐른지 오래되었고, 전문가들은 업적에 들지도 않는 이런저런 서평들을 외면하고 있고, 책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저작권을 전매하고서 형편없는 오역본들을 양산하고 있고 ... 그러니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통받는 건,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책들을 읽어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품은 교양독자층이죠.
전문적인 서평지가 하나 시작되어서 모범적으로 자리잡는다면, 이런 상황이 좀 타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누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

릴케 현상 2004-09-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긴 읽다가 모르겠는 부분이 나오면 그냥 내가 이해 못하나 보다 하고 피동적으로 읽는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능동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체크해서 번역에 이상이 있는 건지 나한테 이상이 있는 건지 한번 이상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앗! 추천했습니다.

balmas 2004-09-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긍정적인 자세 ... ^^
 

안녕하세요?

프랑스 책을 싸게 구하는 노하우를 질문하셨는데, ㅎㅎ
이렇게 좋은 정보를 공짜로 얻으려고 하시다니요???^^

제가 프랑스 책을 구입할 때 자주 이용하던 서점은
"Furet du Nord"라는 프랑스 릴(Lille)시의 서점에서 개설한 인터넷 서점으로,
주소는 www.furet.lalibrairie.com입니다.
이 서점은 다른 프랑스 인터넷 서점들과 달리 배송료가 10유로(원화로 하면 14,000원 가량)로 정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권을 주문하든 백권을 주문하든 똑같이 10유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같이 책을 매달 여러권씩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리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이제는 이 서점을 이용하기가 좀 어려울 듯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존 같은 데 책을 주문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다른 인터넷 서점들은 주문과정 및 결제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서점의 주문시스템, 특히 결제 시스템은 문제가 많아서 에러가 자주 발생합니다. 특히 문제는 국가를 입력할 때 아무리 "남한Coree du Sud"라고 입력해도, 서점측에서 받아볼 때는 "France"라고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국가주소가 잘못 나오게 되면, 주문한 책이 무사히 모두 입고되어 결제를 마치고 발송을 해도, 당연히 결국 서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주문은 취소가 됩니다.

그러면 원래 주문했던 금액은 이미 카드결제가 다 끝난 상태여서, 최상의 경우 다음달에 카드로 다시 상환되거나, 아니면 나쁜 경우에는 프랑스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가 집으로 날아옵니다. 이렇게 수표가 오면 현금으로 바꾸는 절차도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은행 수수료를 별도로 물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손해지요. 제가 이 서점과 거래한지가 벌써 5년 정도 되는데, 이전에 몇번 이런 문제가 있어서 석달만에 주문한 책이 도착하는 경우들도 있었고, 수표를 받은 적도 몇번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점에 대해 벌써 이메일로 여러번 지적을 했고, 전화도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전혀 시정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얼마전에는 그 서점에서 저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이 서점과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서점에서 몇 번 주문해보려고 했던 다른 후배들은 위에서 말한 국가입력의 문제점 때문에 계속 주문취소가 돼서, 결국 책을 주문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책을 구입하는 최선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영우무역(http://www.book24.co.kr)이라는 회사를 통해 구입하는 방법입니다. 이 회사는 프랑스와 독일 서적을 전문 수입해서 판매하는 회사인데, 개인 주문도 수시로 받고 있습니다. 한 권이든 열권이든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는데, 다만 1유로당 환율을 정상적인 경우보다 10-20% 정도 더 받는 것으로 알고 있고, 배송료는 3천원 정도 되는 것 같더군요. 기간은 4-6주 정도 걸리고, 구하기 힘든 책은 2달 정도 지나야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고판 책 같은 경우는 이 회사를 통해 구입하는 게 아마존 프랑스 등을 통해 구입하는 것보다 더 싼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아마존 프랑스를 통해 구입하는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마존 프랑스는 기본 배송료 외에 권당 배송료를 받지만, 대신 모든 책을 10% 할인해주지요. 그래서 좀 가격이 비싼 책들은 아마존 프랑스를 통해 구입하면, 상대적으로 배송료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몇 군데 서점들이 더 있는데, 다 비슷비슷한 배송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프랑스인들의 불친절 때문에 불쾌감을 덜 가질 수 있는 아마존 프랑스를 선택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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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TK지역주의 주민들 의식속 내면화

“TK지역주의 주민들 의식속 내면화”
[한겨레 2004-08-26 17:58]
[한겨레] ‘황해문화’ 가을호
영남지역주의 해부

“권위주의, 성장 제일주의, 안보 지상주의, 대북 적대주의를 원형 그대로 간직”한 곳, “박정희 패러다임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살아서 작동”(홍덕률 대구대 교수)하는 곳. 그런 곳이 대구·경북이다.

대구·경북 연고있는 교수들이 분석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주도하는 국가 정체성 논란의 이면에는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영남 지역주의’의 오묘한 결합이 있다.

“박근혜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과거를 표상하는 기표”이며, “한나라당의 반공주의와 대구·경북의 지역주의가 서로 볼모로 잡고 변화와 개혁에 저항”(김동춘 성공회대 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문화〉 가을호가 영남 지역주의를 본격 해부하며 그 핵심을 파고들었다.

김명인 편집장은 “이러다가 영남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왕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이번 특집을 마련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 일은 “지역정서로부터 자유로운 인천에서 내는 전국 규모의 종합계간지 〈황해문화〉가 가장 적임”이며 “(정치권의 선거전략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적기”라고 덧붙였다.

대구·경북에서 태어난 김동춘 교수, 이 지역 대학에 재직중인 이윤갑(계명대)·홍덕률(대구대) 교수, 오랫동안 대구 지역 대학에서 봉직했던 최원식 인하대 교수 등이 여기에 기꺼이 참가했다.

이들이 보기에 현단계 영남 지역주의의 본질은 “권력엘리트와 보수언론이 유착해 20여년 이상을 형성한 결과, 지역주민의 의식 속에 내면화”(이윤갑)됐다는 데 있다.

이런 영남지역주의는 ‘대구·경북 지역주의’로 다시 집약된다.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이 좌담을 통해 “지난 총선 때 부산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40%에 육박한 결과는 참 놀라운 변화”라고 평가할 정도로 부산·경남의 변모 양상이 뚜렷한 반면, 대구·경북은 “박근혜 대표가 방문하면 갓쓴 노인들이 길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권기홍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후보)을 정도로 요지부동에 가깝다.

홍덕률 교수는 ‘내면화’된 대구·경북 지역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추출했다. 그것은 대구·경북이 나라의 중심이라는 ‘대구·경북 우월주의’ 또는 ‘소중앙의식’,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선호와 향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주의’, 그리고 남북화해 정책에 배타적인 ‘반공주의’ 등이다. 이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우월주의·국가중심주의·반공주의
지역주의는 특정 정당이 국회의원은 물론 지자체장과 지방의회까지 독식하는 일원적 정치구조, 지역의 언론·대학·종교는 물론 유난히 발달한 계(契) 형태의 자발적 소집단과 관변단체를 통한 보수 이념 확산 등을 통해 재생산된다. “오늘날 이 지역이 겪고 있는 정치·행정적 무능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낙후”는 “기존 질서에 대한 맹목적 집착, 변화에 대한 저항, 현실 안주”의 결과다.

김동춘 교수는 대구·경북 지역주의가 “중앙권력을 싹쓸이하자는 패권적 지역주의로부터 힘을 결속해 장차 권력을 되찾자는 방어적·자기보호적 지역주의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 남부주민들과 닮았다
“경상도 정권의 혜택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지역민들은 이제 “지역 기업이 망한 것도 경상도 죽이기라고 이해”하면서 “한국경제 침체 등 일반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지역 경제의 위기와 개인의 고통을 지역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읽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정서는 미국 남부 주민들의 그것과 닮았다. “열악한 경제적 처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정당인 공화당을 지지하고, (진보하는) 북부의 산업문명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노예를 부리며 백인의 자존심을 지켰던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구·경북 지역주의의 더 큰 문제는 그런 기억을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주’하며 ‘확장’시키려 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영남은 원래 ‘저항’의 중심지
박정희정권뒤 대세 바뀌었다

영남지역주의 극복의 실마리는 ‘역사’에 담겨 있다. 이윤갑 교수는 근대 이후 이 지역의 ‘저항역사’를 살핀다. 영남은 동학이 창도되고 의병전쟁과 국채보상운동, 실력양성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등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1930·4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비롯한 좌익의 영향력이 다른 지역을 능가했다.

그 결과 해방정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및 좌익정당의 세력이 가장 강하게 뿌리 내려, 1946년 10월1일 대구의 ‘인민항쟁’으로 이어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구에서는 진보당의 조봉암이 10만여표를 얻어 3만8천여표를 얻은 이승만을 압도했다. 1960년 4월 혁명을 이끈 2·28학생시위와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난 곳도 대구였다. 박정희 독재시절 인혁당 관련자 대부분은 대구·경북 출신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대세’가 바뀐다. “이북 출신 중심의 이승만 정권의 유산을 걷어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신라를 상징조작의 대상으로 삼으며 영남 중심의 정체성을 확립”(최원식)했고,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권 때 탄생한 영남 출신의 권력 엘리트를 지역 연고주의에 이용”(이윤갑)한 결과다.

김동춘 교수는 이 지역의 문화전통에서 수구와 저항의 가닥을 동시에 길어올렸다. “지역맹주를 중앙권력에 진출시켜 집단의 이익을 도모했던 영남학파의 세도·붕당정치”가 그 시원이다.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조선 후기 사화를 거치며 중앙정치로부터 소외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유교문화는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흐름과 씨족중심주의를 지키려는 흐름으로 이어져오다, 박정희 정부를 고비로 “대의명분 지향성은 사라지고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만 창궐”하게 된다.

이윤갑 교수는 “동학·사회주의·진보당 등이 당대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사상체계를 제시했듯이 보수적 지역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문화운동이 필요하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시대적 모순에 맞서 보편적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영남의) 진보적 전통과 건강한 잠재력”을 일깨울 이념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덕률 교수는 당면한 과제로 “정치·행정적 독점구조를 위에서부터 해소하고, 시민사회 내부의 지역주의·보수주의의 순환고리를 해체하는 ‘이중적 민주화’”를 제시했다. 특히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정치적 독점구조를 깨고 ‘다원적 정치경쟁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봤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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