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

여염집 여인은 베갯모, 향낭, 노리개 따위에 수를 놓으면서 모란, 국화, 나비, 꾀꼬리를 그려 넣고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새긴다. 어느 것 하나 이쁘고 곱지 않은 게 없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집안의 단란과 복을 기원한 결과였다. 가슴속에서 안개처럼 뿌옇게 어리는 바램이나 샘물처럼 용솟음치는 격정을 바늘뜸에 용해시켜 저렇듯 아기자기한 무늬로 형상화한 그 마음씨가 참으로 갸륵하다.

병풍이나 족자 따위 큰 작품을 만들 양이면 으레 십장생이 수놓아졌다. 피안세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신앙을 갖지 못했던 우리 겨레는 현세적인 데 연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최고 기대치와 간망(懇望)은 장생불사여서 그를 상징하는 열 가지 물상, 즉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가까이 두고자 했다. 이밖에 목숨수(壽)자를 즐겨 새겼던 소이도 여기에 근거한다.

우리 민족에게서 자수는 서화와 각종 공예와 더불어 훌륭한 예술의 한 장르였음이 분명하다. 회화와 수공예의 속성이 어우러져 이룩한 종합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 담긴 마음과 뜻으로 볼라치면 수신(修身)이요 신앙이었다.

화조와 산수를 재현함으로써 아름답고 명랑한 이상향을, 용과 호랑이와 가상적 동물을 통해 재앙을 물리치며, 뜻이 맛깔스런 문자를 새겨 복을 구했다. 더구나 십장생도까지 추구했으니 이야말로 기복신앙이라 함직하지 않은가?

바늘집과 바늘방석(왼쪽) / 침선상자(오른쪽)

우리의 자수는 길쌈과 염색의 발달과 더불어 불교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조에는 부처님 공양에 쓰이던 불교자수가 주류를 이루다가 근세조선에 넘어와 궁중문화가 개화함으로써 크게 발전되었다. 특히 왕의 예복이나 궁중 혼례복에 화려하게 화조와 산수, 동물 등을 실물형상대로 수놓아 치장했던 것이 차츰 관복에도 상용되어 서민의 일상용품에까지 파급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부처의 공양물과 궁중의 복식 치장으로 성행했던 자수는 서민에게 일반화된 조선왕조 중기에 접어들어서 오늘날 말하는 한국적 전통자수로 정착되었다.

시집가는 처녀는 자수액자를 두어 점 마련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관되었던 이 나라 풍습이었다. 하얀 명주천에 소나무 가지를 넣고 흰 학을 멋스럽게 올려 앉혔는가 하면 빨간 비단에 연록색으로 솔잎을 매달고 미색으로 학을 수놓은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밥상보, 손수건, 방석, 주머니 등 자잘한 소용품 하나에도 정성과 애교를 담아 바닥 통째, 또는 한귀퉁이에 꽃수를 놓았다. 이럴진대 <생활 있는 곳에 수예가 있다>라는 말이 어찌 함축성있는 말이라 하지 않겠는가

수틀을 들면 누구나 유정(有情)한 법이어서 남녀 모두 W.B.예이츠의 '하늘의 옷감'같은 시를 마음속으로 지어냈을 성싶다.

금빛 은빛 빛을 넣어 짜 늘인/ 수놓인 하늘옷감 내게 있다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검고/ 새까만 옷감들이 내게 있다면/ 그대 발길 아래 깔아주련만./ 나는 가난한지라 꿈이 있을 뿐/ 그대 발길 아래 꿈을 폈노라/ 사뿐히 밟고 오라, 꿈에 오는 이.

자수 호표흉배 (조선시대 무관 1,2품의 흉배)

자수는 용포(用布)와 수실이 주재료이다. 수를 놓기 위한 용구로는 바늘과 수틀, 가위가 기본이고 그밖에 골무나 오늘날 쓰는 초크 페이퍼와 초크 페일이 이용된다. 자수를 하는 천으로는 바늘이 잘 통하고 실이 끊기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목면, 실크, 모직물이 두루 통용되는데 옛것을 보면 귀한 것은 대개 명주와 공단이 바탕이 되었다.

수실은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것이 적당하고, 한국자수(朝鮮繡)는 대개 색실자수에 속한다.

조선수에 쓰는 바늘은 일반적으로 짧고 가는 바늘이다. 조선조 순조 연간에 유씨 부인이 지은 수필 '조침문(弔針文)에 의하면, 자기가 쓰던 바늘을 부러뜨리고난 후 애통해하는 심정을 읊고 있어 당시에 바늘을 귀애해했던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가위, 골무 같은 것이 필요하나 중요한 용구는 아니고, 도안과 옮기는 법도 유의해야 하지만, 문제는 자수에 담긴 미감과 그걸 표현한 사람의 마음이다. 여인의 얼굴에는 분기가 있고 귀밑머리카락이 있어서 매혹을 더한다. 의상 어느 모서리에는 수가 놓여져서 어여쁨과 감미로움이 보태어짐도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거기에 색실로 수를 놓아 장식한 그 마음이 더 꽃답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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