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에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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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는 동기가 죽어 포항 성모병원에 갔었다.
이 놈의 새끼, 술이나 한 잔 사고 죽을꺼 아이가. 운영하던 섬유회사 부도나고 하는 일 없이 빌빌거리는 옛 친구의 푸념이 늘어졌다. 사는게 정말 사는게 아니네. 새벽 세 시에 들어와 아이들 자는거 다 돌아 보고 쇼파에서 잠들었다는데 아침에 보니 입술이 파랗다고 하데. 그나저나 이 친구 지가 내년 동기회 체육대회때 돈 좀 낼라켔는데..그라고 사람도 좀 모을라카고..먹고 살만하이 인자 가뿌고..어허 참.

모처럼 포항 동기들 오랫만에 그리운 얼굴들 만나도 건강을 챙기느라 몇 잔 술이 남아 돌고 열 두시 넘어 내일 일이 걱정되어 바쁘게 돌아오는 길 . U는 서른 다섯에 현금 6억원 벌고 잘나가다 현재는 거지된 이야기를 하고, J는 과대 광고로 고발당해 벌금낼 궁리에 잔뜩 골머리를 앓고, L은 떨어지는 매출 때문에 매장을 정리하냐 마냐 잔뜩 숨죽이고, K는 돌아올 어음날짜에 신경이 쓰이고....

어제는 모처럼 두 달만에 능산회 선,후배 모임 자리 마치고 동기들 몇이서 만났다. 건축 감리회사 사장은 대학에 입학한 딸 걱정이 늘어졌고 건축과 교수는 설계공모전 출품을 위해 시간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법원 직원은 내일의 재판을 걱정하며 2차 가는데 난색을 표하고 부도난 통신회사 사장은 관급 공사 얘기에 열을 올리고 민물장어집 주인은 가게처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두 달만에 만나 우리는 맥주 열 댓병 마시고 1시 넘어 집에 갔다.
사년 정도 터울이 지는 후배들이 1.5KM 정도 접어주고 등반시합을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말어....그래도 우리가 선밴데 술사고 밥사야지..하긴 시합인데 일단 이기고 봐야지..자존심들은 살아서..어쩌구저쩌구... 다음 기약도 없이 모두 열심히 살기 위해 서둘러 술자리를 털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 이런 풍경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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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1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우리집 아빠도 새벽 한두 시에 들어와 딸들 자는 얼굴 한번 둘러보고 소파에서 텔레비전 켜놓고 쭈그러져 자기 일쑨데... 문득 겁이 나네요. 요즘 부쩍 피곤하다고 하던데... 사는 게 다 그리 변변치 못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