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꿈

무엇인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놓인 자리 그대로 깊은 산 속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꼭 무엇이 되리라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덩치만 커다란 돌이 있었습니다.
때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우쭐우쭐 키 큰 소나무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궁궐나무로 뽑혀 가 대들보가 되거나 서까래라도 되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느라 점차 나이테를 더해 갔습니다. 분말이 곱고 찰기있는 황토 흙은 이 나라 으뜸가는 도자기가 되어야겠다며 온갖 눈, 비 맞으며 묵묵히 자신을 다스려 나갔습니다.
해 뜨고 지고 달 뜨고 지는 참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천둥 치고 벼락도 때리는 그런 한 시절이 가고 결국 올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궁궐은 아니지만 큰 사찰의 배흘림 기둥이 되거나 목어가 되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이 되어 한 몫을 단단히 하곤 했습니다. 도자기를 꿈꾸던 황토 흙도 하다 못해 둥근 물항아리가 되거나 간장독이 되어 그토록 바라고 소원하던 소망을 어느 만큼은 이룬 것 같아 스스로 흡족한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찾는 이 없는 울퉁불퉁 못생긴 돌은 마냥 선하품이나 해대며 점차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주눅이 들곤 하였습니다.
"아니야 분명 어딘가엔 쓰일거야. 아무렴 이 세상에 쓸모없이 생겨난 것이 어딨겠어. 언젠가 쓰일 그날을 위해 내 꿈을 어떤 식으로든지 키워 갈테야..."
날이면 날마다 하릴없이 무언가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힘겨운 돌은 이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동네 어귀에 퉁방울 눈 부릅뜬 돌장승이 되면 너무 좋겠어. 나쁜 잡 귀신이 들어오는 것도 막아 주고 먼 길 가는 나그네한테는 이정표 구실도 하면 좋을거야. 아니 아니 성황당 돌무더기라도 되어 나처럼 무언가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웃이라도 될 수 있으면 참 기쁠거야...."
누구는 쓰잘데 없는 소망이라 하건 말건 묵묵히 스스로의 좋은 쓰임을 기도한 덕인지, 어느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못생기고 덩치만 커다란 돌도 여엉차 끼엉차 여러사람이 목도를 하여 어께에 지고 산 아래로 옮겨갔습니다.
옛날부터 있던 자리를 벗어난 돌은 주변의 다른 돌들과 함께 이제 커다란 용광로에 들어가 뜨거운 불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 온 몸이 깨어질 듯 아파. 지끈거리는 두통과 노곤한 통증과 패대기치듯 흔들어대는 울렁임을 견딜 수 없어. 가슴이 뻐개지듯 아파."
몇 번인가 까무룩 잠이 들듯 이승과 천당 사이를 오고간 돌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쇳물 형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허, 이번엔 쇠질이 좋구먼. 구리가 좋아 정말 좋은 놈을 만들 수 있겠어."
구레나루가 성성한 노인의 근육질 몸매와 만족한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나이답잖게 무척 건강해 보였습니다.
노인은 잠시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진작에 만들어 놓은 듯 곱돌로 된 거푸집을 가져 왔습니다. 그 거푸집은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다루기 쉽고 표면을 곱게 처리할 수 있고 열에 강하여 좀처럼 터지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따라 그 곱돌 거푸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잠시 골똘한 표정이던 노인은 주물을 부어낼 다른 틀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무슨 생각인지 벌집을 뜨거운 물에 녹여 굳힌 밀랍으로 거푸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정성을 들여 오랜 시간 밀랍으로 주조할 암,수 기물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암,수 두 개의 판을 입구의 구멍만 남기고 고운 진흙으로 완전히 씌워 잘 말렸습니다. 진흙이 마르고 난 뒤에는 그 틀을 불에 구워 속의 밀랍은 녹아 빠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밀랍이 다 빠져 나온 빈 거푸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밀랍으로 하길 잘했어. 섬세하고 복잡한 무늬를 나타내기엔 이게 제격이지. 곡선형으로 만들땐 이게 좋아...."
오랜 세월 무엇이곤 기필코 되리라, 야무진 꿈만 키우던 얼마전 까지의 돌은 아직까지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과 함께 산에서 이 곳까지 실려왔던 많은 돌들이 이제는 예전의 형체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변해야 될 것이 참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주석과 아연도 맘에 드는군. 이번엔 보나마나 꽤 괜찮은 놈으로 될 것 같군."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밑 형형한 노인의 눈빛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습니다. 척 보기만 해도 오랜 이력과 연륜의 때가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노인은 천덕꾸러기 울퉁불퉁 못생겨 선하품이나 하던 돌에서 뽑아낸 구리에다 주석을 섞어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잠시 폭풍이 불어오는 듯 하고 천둥 번개도 내리 칩니다. 잠시 세상이 캄캄하다가 우지끈 신열처럼 뜨거운 불기운을 이기지 못해 살려 주세요, 무조건 잘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누구에겐지 마냥 기도하며 빌고만 싶은 시간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흘러갔습니다.
무거운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잠시 가쁜 호흡을 고르던 순간도 사라지고 이제 꼬끼오! 세상의 새벽이 열리는 듯한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거푸집을 벗겨 냈습니다.
세상에나, 어쩜 지금껏 그리도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에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겨져 있었던지요.
휘늘어진 계수나무 줄기 한가운데 둔 꼭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전설처럼 하늘나라 선녀의 옷을 펄럭이며 춤추듯 달로 올라가는 항아 아씨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편에는 먹으면 죽지 않는 약을 방아에 찧고 있는 토끼가 있고 토끼를 쳐다보는, 달의 정령이 되었다는 전설의 두꺼비도 있습니다. 꼭지를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을 가르는 바깥 원 둘레에는 온갖 덩쿨풀을 일컫는 당초문양이 빼곡 들어 찼습니다.
노인은 몇 날 며칠 거푸집에서 주조되어 나온 동판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어린 손질 과정을 거쳐 가며 무늬 동판의 뒷면에 빛을 반사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연마해 나갔습니다.
이제는 노인의 얼굴이 달 떠오르듯 뚜렸이 동판면에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사람들은 바깥면에 각종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이 동판을 고려시대에 만든 청동거울이라 하여 고려동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날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돌은 드디어 뿌듯한 만족감으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결국 기다리며 스스로의 꿈을 키우는 사이에 자신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참으로 귀한 그 무엇이 되어, 세상에 쓸모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보이던 돌의 꿈은 결국 저 아득한 팔백년 전 고려시대에 빛처럼 훤히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왜 이렇게 방해되는 일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이름없는 돌의 꿈과 한 노인의 정성과 혼이 배인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정작 그 거울의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거울을 주문한 아가씨의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지체 높은 가문의 그 아가씨는 시난고난 오랜 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 구리 거울을 끝내 무덤에 껴묻이로 함께 갖고 가 내세에서라도 마음의 위로를 삼고자 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까무룩 잊혀진 세월이 흘러 갔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땅 어느 농부 하나가 반나마 무너져 형체도 없어진 옛 무덤을 밭으로 만들다가 조그맣고 동그란 구리 거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구리 거울의 표면에는 옻칠한 것 같이 검고 빛나면서도 비밀스런 사연을 간직한 듯 녹이 시퍼렇게 슨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보따리 장사의 손을 거쳐 조마조마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고 압록강을 마주한 중국 단동의 한 골동품 가게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각기 그 주인이 있다는 옛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다시 대구에서 중국 땅 단동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골동품 취급 상인을 거쳐, 마침내 일없이 쓸쓸하여 세상 사는 재미가 별로 없어 하던 한 아저씨 손에 까지 이 구리거울이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아들, 딸 낳고 키우며 곁을 돌아볼 겨를없이 열심히 살아온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자라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이를 잔뜩 먹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해놓은 것도 없이 요즘 들어 사는게 팍팍하고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아저씨였습니다. 새삼스레 유년시절의 기억이 문득문득 그리운 아저씨의 눈에는 결코 쉬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그리도 그 동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는지요.
혹시 모르지요.
그 사연 깊은 구리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는 어디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소리 따라 희미한 눈물자국 같은, 안타깝고 따뜻했던 날의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금 불러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청태빛 녹이 슨 구리 거울 문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돌의 꿈 같은, 무엇인가 기필코 되고 싶었던 날의 맥박이 뛸지도 모르겠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장인의 땀냄새거나 젊은 나이에 죽은 한 처녀의 못다 핀 간절한 소망이 혹시 엿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고 어른답지 뫃한 생각이라는 마음에 지지 눌러 못내 접어 두고만 싶었습니다. 그럴 수록 가족 다 잠든 잠 안오는 밤 자신도 몰래 구리 거울을 만지작 거리노라면 온가슴 가려두르며 아슴아슴 떠오르는 추억들이 아저씨를 마구 설레게 하곤 하였습니다.
깊은 밤.
아저씨는 그동안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참으로 오랫만에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타다닥 툭 투다다닥....
군대시절 배운 어설픈 닭발타자 솜씨로 모처럼의 상상력에 힘입어 옛 구리 거울이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이루지 못해 쓸쓸한 젊은날의 꿈처럼 아득한 기대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 문득 높으게 일어서서 놓쳐버린 풍선처럼 아슴푸레 옛 사랑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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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동화네요.. 처음에 돌의 이야기보다 아저씨손에 들어온 거울 얘기가 더 재밌게 느껴지네요..잘읽었습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읽고 갑니다. 아껴아껴 읽을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