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긴 소설이었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세 여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답고 고달파서,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서 빨리 편안해지길 바라기도 했다. 3.1운동부터 시작되는 그들의 삶은 쉴새없이 상하이로 모스크바로 서울과 평양 곳곳으로 내달렸다. 그안에서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난한 백성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사는 세상, 누구도 억압받지 않으며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었다. 너무나 힘겹던 식민지 조선에서 새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르크스의 사상이었고, 레닌의 소련은 그 증거였다. 그 세상에서 사회주의라는 바다는 얼마나 근사하고 얼마나 고귀한 꿈이었을까.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해사한 얼굴을 가만히 들려다 보노라면, 사회주의라는 바다를 떠다니던 그들의 꿈과 열망, 사랑과 우애가 해일처럼 나를 덮쳐온다.
지금은 결국 스탈린으로 귀결되고만 소련 사회주의의 비루함도 모두 드러났고, 이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던 사회주의 추종 국가들의 끔찍한 말로도 이미 고약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해괴한 나라를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의 입장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꿈꾸며 조국 독립을 위해 순결한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사라지거나 자신의 이상을 변질시키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섞여버린 무언가였다. 누구를 탓하랴. 얄타 회담의 성급한 결론? 남북을 분할 점령한 멍청한 냉전 체제? 무엇이 최선의 결과인지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극단적인 운동방식만을 쫒았던 민족 지도자들은 용서하기 어렵다. 끝까지 테러를 손에서 버리지 않고 공포와 증오를 양산해낸 김구나, 전쟁의 책임을 종파 투쟁으로 몰아간 김일성이 무엇이 다른가. 순진하도록 낭만적으로 사회주의 조선을 꿈꾸던 청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항일 전장을 누비던 독립군들을 잡아 삼킨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해방 후 공간이었다.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어간 권오설이나, 태항산에서 산화한 윤세주의 죽음을 어찌 갚으라고. 혁명과 독립의 전선에 맨몸으로 맞서던 여전사 김명시가 결국 해방 후 좌익 숙청으로 감옥에서 목을 맸다는데, 그런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냔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 시절을 몸으로 받아낸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은 어떻게 견뎠건 걸까. 나는 정말이지, 아까워 죽겠다. 그 아름답던 주세죽이 유형수로 카자흐스탄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보드카를 유일한 벗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고명자가 아버지같던 여운형마저 잃고 돌아오지 않을 남자를 기다리며 전쟁통에 푸석하게 굶어 죽어가는 것이. 오늘은 하루종일 그 안타까운 죽음들을 기억해야겠다. 안병찬, 이동휘, 여운형(아, 여운형!), 김단야(아, 김단야!!), 김원봉, 박차정, 김명시, 김형선, 윤세주, 허헌, 최창익, 윤공흠, 무정, 정종명, 정칠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