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오스카가 그런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역사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 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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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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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냥한 사람’인 게 슬프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작가의 말이 슬프다. 박형민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다. 착한 아이를 연기한 어린 시절을 지나, 진구가 아닌 형민을 찾아헤맨 학창 시절을 지나,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직장 부하직원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누군가가 계속 죽어가고,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봐야하고, 누군가에게 계속 미안해해야 하는가. 인생이 원래 그런거지 라고 말한다면 너무 슬프다. 이게 뭐가 상냥해. 이럴꺼면 상냥해서 뭐해. 진짜 그래서 뭐해.
장편은 확실히 힘든 이야기이다. 윤성희는 나에게 캐릭터나 서사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장면들의 나열 혹은 작은 일화들의 나열로 기억되는 작가이다. 그런 글쓰기의 방식으로 긴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비슷한 인물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화들의 반복이랄까. 계속 제자리를 공회전하는 자동차에 탄 기분이랄까. 주변 풍경은 바뀌지 않는. 뭐. 그렇다고, 나쁜 소설은 아니었다. 단지 단편이었다면 더 밀도가 있게 읽었을 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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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주변으로 튕겨나간 사람들, 그것은 절박하고도 다급한 디아스포라였으며 슬프고도 고난에 찬 글로벌 라이프였다.
그들 대부분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들 부류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실수로 취급되었고 뒷날의 사람들은 그 얼룩을 지우고 싶어 했다.
1848년의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 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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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꽃의 산책 2020-04-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글을 읽는 내내 먹막했던 마음이 애쉬님의 글을 읽고 좀 정리가 되네요!
 
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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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소설이었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세 여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답고 고달파서,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서 빨리 편안해지길 바라기도 했다. 3.1운동부터 시작되는 그들의 삶은 쉴새없이 상하이로 모스크바로 서울과 평양 곳곳으로 내달렸다. 그안에서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난한 백성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사는 세상, 누구도 억압받지 않으며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었다. 너무나 힘겹던 식민지 조선에서 새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르크스의 사상이었고, 레닌의 소련은 그 증거였다. 그 세상에서 사회주의라는 바다는 얼마나 근사하고 얼마나 고귀한 꿈이었을까.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해사한 얼굴을 가만히 들려다 보노라면, 사회주의라는 바다를 떠다니던 그들의 꿈과 열망, 사랑과 우애가 해일처럼 나를 덮쳐온다.
지금은 결국 스탈린으로 귀결되고만 소련 사회주의의 비루함도 모두 드러났고, 이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던 사회주의 추종 국가들의 끔찍한 말로도 이미 고약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해괴한 나라를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의 입장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꿈꾸며 조국 독립을 위해 순결한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사라지거나 자신의 이상을 변질시키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섞여버린 무언가였다. 누구를 탓하랴. 얄타 회담의 성급한 결론? 남북을 분할 점령한 멍청한 냉전 체제? 무엇이 최선의 결과인지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극단적인 운동방식만을 쫒았던 민족 지도자들은 용서하기 어렵다. 끝까지 테러를 손에서 버리지 않고 공포와 증오를 양산해낸 김구나, 전쟁의 책임을 종파 투쟁으로 몰아간 김일성이 무엇이 다른가. 순진하도록 낭만적으로 사회주의 조선을 꿈꾸던 청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항일 전장을 누비던 독립군들을 잡아 삼킨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해방 후 공간이었다.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어간 권오설이나, 태항산에서 산화한 윤세주의 죽음을 어찌 갚으라고. 혁명과 독립의 전선에 맨몸으로 맞서던 여전사 김명시가 결국 해방 후 좌익 숙청으로 감옥에서 목을 맸다는데, 그런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냔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 시절을 몸으로 받아낸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은 어떻게 견뎠건 걸까. 나는 정말이지, 아까워 죽겠다. 그 아름답던 주세죽이 유형수로 카자흐스탄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보드카를 유일한 벗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고명자가 아버지같던 여운형마저 잃고 돌아오지 않을 남자를 기다리며 전쟁통에 푸석하게 굶어 죽어가는 것이. 오늘은 하루종일 그 안타까운 죽음들을 기억해야겠다. 안병찬, 이동휘, 여운형(아, 여운형!), 김단야(아, 김단야!!), 김원봉, 박차정, 김명시, 김형선, 윤세주, 허헌, 최창익, 윤공흠, 무정, 정종명, 정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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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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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읽고 넘기면서, 아, 김연수다 하고 안도하고 기뻐했고, 또 새삼스레(아니, 새삼스럽지도 않게) 감동했다. 그래, 감동했다. 김연수의 유머도 무척 좋아하고 그의 문장들도 끝없이 사랑하지만,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신념이다. 소설 쓰기에 대한 글이지만 세상살이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글이기도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 그는 평생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그 대답을 알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그 대답을 알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고, 그 대답을 전하기 위해 역사를 가르친다. 그래서 종래에는 우리가 간절히 소망했던 일들이 모두 이루어져 가는 것을, 나 또한 그런 우주의 작은 티끌임을 기억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좀 다른 것이었는데, 마치는 글을 읽고 나니 더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글을 쓰는 남편이 매우 소중하게 품고 있는 책이어서, 언제고 읽긴 해야지 하면서도 한 번 읽고 나면 글들이 휘발되어 버릴 것 같아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었다. 책장에서 이 책을 뽑아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준비가 적잖이 필요하다. 김연수의 글들은 늘 그렇다. 너무너무 좋아서 절대 뜯어보고 싶지 않은 선물 상자 같다.
소설을 쓸 생각은 없으니 알맹이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어 책장을 펼쳤는데, 역시 엄청난 잿밥들이었다. 물론 소설쓰기에 대해서도 이보다 더 나은 작법서를 없으리라 판단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고 인생을 만들어내는 일이므로, 소설쓰기란 세상살기 혹은 인생살기와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세상살기에 대한 엄청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절로 탄식이 나온다. 이런 글을 쓰는 소설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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