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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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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기대없이 집어든 책이 너무 좋아서, 무엇이 이렇게 좋은 건가 하며 한참을 들여다보고 다시 또 들춰보곤 했다.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인문학도로서, 천문학은 문학과 비슷한 거라고 혼자 생각하곤 했다. 어디까지가 과학이고 어디부터가 문학인지 경계를 도통 지을 수 없는 학문. 다양한 심도를 가진 까만 밤하늘에 점점히 흩뿌려진 별을 보는 일. 그 별들을 이어 별자리 이름을 붙이고, 계속 모양이 바뀌는 달의 궤적을 쫒으며 그 뒷면을 생각하는 일은 문학의 영역이라고, 암 그렇고말고, 했다. 전형적인 수도권 위성도시, 공업단지도 껴안고 있는 이 공해도시에서도 초저녁 금성이 반짝이고, 맨눈으로도 여름이면 베가의 대삼각형이 찾아졌다. 서쪽으로 뻗은 큰 대로의 횡단보도를 걷다가 보라색으로 물드는 숨막히는 노을을 보면 나는 이 우주의 작은 먼지라는 게 매번 실감되곤 했다. 천체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처음 봤을 때의 경이로움, 깜깜한 하늘에 선명하게 박힌 눈썹달의  감동. 천문학이란 나에겐 이런 것이었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들은 나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존중할만한 어떤 멋진 세계였다. 이런 나의 환상과 망상과 기대와 요구에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좋았나 보다. 

  비정규직 연구원 일상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애엄마 과학자의 삶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도 눈물나게 좋았다. 학문의 즐거움, 지루한 연구의 나날들을 쌓아 자기의 주장을 만들어가는 학문의 과정도 무척 반가웠다. 많이 읽고 많이 썼으며 또 무수히 고쳐썼을 그녀의 단정한 문장도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예뼜다. 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필사를 해둔 대목도 꽤 되는데, 특히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도 앎의 즐거움을 주어 각별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지구를 떠난 보이저 1,2호가 씩씩하게 여행을 계속하듯이, 그녀도 그녀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나도 나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각자의 궤도를 돌아 행복한 랑데부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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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3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에요. 여러분들의 리뷰 보면서 봐? 말아? 하면서 망설이고만 있었는데 읽겠습니다. ^^

애쉬 2021-04-30 10:42   좋아요 0 | URL
저는 자연과학자들이 지루하고 똑같아 보이는 연구를 매일매일 관찰하고 기록해서 작은 탑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인문학 연구도 그렇긴 하지만, 자연과학은 더 미지의 세계라 더 로망이 있는 걸까요... 하여튼 좋아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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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어후. 한숨과 탄식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페이지쯤인가 넘기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렇게 탄식하며 이렇게 조용히 감동의 파도에 잠식될 나를 예감했다. 너무 아름답다. 사려깊고 다정하며, 끊임없이 사색을 종용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나 <관내분실>은 압도적이었다. 부드러운 음악같던 문장을 읽으며 함께 한껏 고양되었다가 살포시 구름 위를 밟고 온 느낌이었다. 게다가 인간, 여성, 장애, 인생, 꿈, 의미 같은 낱말을 계속 곱씹게 되는 멋진 경험이었다. 물론 다른 이야기들도 좋았다. <스펙트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련한 색채 또는 냄새 같은 것으로.
올해 새롭게 만난 최고의 작가이다. 그녀의 글을 계속 응원하련다. 어후, 어후 하며 감동에 겨워하는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은 사실 가장 멋진 김초엽은 밀리의 서재에서 나온 <시티 픽션>에 있다며 으시댄다. 먼저 읽은 자의 여유넘치는 표정으로. 아, 빨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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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오스카가 그런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역사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 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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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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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냥한 사람’인 게 슬프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작가의 말이 슬프다. 박형민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다. 착한 아이를 연기한 어린 시절을 지나, 진구가 아닌 형민을 찾아헤맨 학창 시절을 지나,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직장 부하직원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누군가가 계속 죽어가고,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봐야하고, 누군가에게 계속 미안해해야 하는가. 인생이 원래 그런거지 라고 말한다면 너무 슬프다. 이게 뭐가 상냥해. 이럴꺼면 상냥해서 뭐해. 진짜 그래서 뭐해.
장편은 확실히 힘든 이야기이다. 윤성희는 나에게 캐릭터나 서사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장면들의 나열 혹은 작은 일화들의 나열로 기억되는 작가이다. 그런 글쓰기의 방식으로 긴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비슷한 인물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화들의 반복이랄까. 계속 제자리를 공회전하는 자동차에 탄 기분이랄까. 주변 풍경은 바뀌지 않는. 뭐. 그렇다고, 나쁜 소설은 아니었다. 단지 단편이었다면 더 밀도가 있게 읽었을 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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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주변으로 튕겨나간 사람들, 그것은 절박하고도 다급한 디아스포라였으며 슬프고도 고난에 찬 글로벌 라이프였다.
그들 대부분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들 부류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실수로 취급되었고 뒷날의 사람들은 그 얼룩을 지우고 싶어 했다.
1848년의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 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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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꽃의 산책 2020-04-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글을 읽는 내내 먹막했던 마음이 애쉬님의 글을 읽고 좀 정리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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