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 죽다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 시절 정찬의 소설이 좋았다. 엄숙주의 탓이라 해도, 그리고 우울하고 그늘진 걸 편안해하는 취향 때문이라 해도 좋다. 삶에 대한 작가의 진지하고 잦아드는, 그러면서도 지적이고 이상적인 탐구에 마냥 끌렸다. 게다가 모두가 광주에서 눈을 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금남로 거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가 처량맞은 양심같아 보였다.

그의 작품을 드문 드문 읽기는 했지만 소설집은 참 오랜만이다. 들뜬 마음으로 한 편 한 편을 읽어나가는데 처음에는 답답했고 갈수록 슬퍼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너무나 오랜 기간 그 자리에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옷은 요즘 유행하는 패션을 쫓았는데, 아련한 기억으로 되새겨지는, 오랜만에 조우한 지인은 예전 그대로 남루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것이 답답했고 그것이 슬펐다.

지인과의 재회는 초라했지만 남겨진 내 자리는 텅 비어버렸다. 그가 정말 마냥 예전과 똑같을 뿐이었을까, 나의 사랑과 이상을 알아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내가 변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남겨진 자리가 허전할수록 의문은 더욱 회의적으로 깊어 간다.

그러나 결국,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허전한 바람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기는 해도 오직 강물 위를 흐르는 건 기억 외에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