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철학자 탁석산의 발언은 거침 없다. 잘은 모르지만 그는 철학 학계에서는 다소 왕따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어디 얽매이지 않은 - 엄밀히 그는 한국외대 무슨 대학원 소속으로 얽매여있긴 하다 - 자유롭고 명쾌한 철학자 탁석산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내가 대학 학부생이었던 때 대학 강단에 선 그의 모습도 그랬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하고픈 말을 다 쏟아내 웃음을 주곤 했다. 그가 쏟아낸 말들 중에는 꽤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나는 그를 통해 조동일을 접했고, 이키유바라 최를 접했다. 서울대학 학부 신입생 시절 조동일과 잠시 맞짱 토론을 했다던 그는, 자신이 언젠가 낸 책을 통해 조동일을 한번 더 공격했음에도 그가 답하지 않은건 자기와 같은 하찮은 존재와 상대해봐야 아무런 이득 볼 게 없다는 조동일의 계산이 아닐까 라고 혼자 추측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굳이 또 가르치는 학생을 향해 말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가 깬다. 학부시절의 잠깐의 토론이 과장됐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건 아니건 나는 이런 털털한 면을 보여주는 솔직한 그가 좋다.

  <철학 읽어주는 남자>는 당연히 철학서다. 하지만 일반적인 철학서에서 볼 수 없는 주제가 함께 버무려있는 해물잡탕과 같은 책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파트 1은 철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파트 2는 철학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다소 실용적인 면을 보여준다. 마지막 파트 3에서는 그의 철학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난다. 파트 3은 논란이 많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땅에서 철학하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탁석산은 신랄하게 한국 철학계와 대학 풍토를 질타하고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강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여진 댓가로 그가 학계에서 더 왕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철학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철학을 접하고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철학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과, 뒤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진 못하지만 생각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탁석산은 과감히 삶의 지혜로서의 교양주의 시각으로 철학을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교양'이기보다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간 선보인 여러 책들은 철학의 실용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곳에 철학을 써먹어라.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하라는 의미다. 회사 기획서 작성법이나 보고서 작성법, 토론법에 대해 서술한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시리즈는 이런 맥락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교양으로서 철학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로서 써먹으라는 그의 주장은, 파트 3에서 이어진다. 한국 철학계의 학문 풍토와 대학 교수들을 비판하면서 이대로는 철학이 아무런 발전도,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의 비판은 꽤나 날카롭고 직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신랄하게 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주장에 담긴 내용이 진부적일지언정 그가 주장을 이끌어내는 사고과정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철학은 번성기를 가져본 적도 없으므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발언, 인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정부에서 연구비를 타내 대학 교수들끼리 쓸데없는 프로젝트를 하며 꿍짝꿍짝 타먹고 있다는 발언, - 서울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젝트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다. 나는 이걸 왜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했느냐 하는 논쟁 또한 훈고학적인 태도일 뿐, 중요한건 자기철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발언, 심지어는 한국 철학계에는 합의된 시대정신이니 과제가 없다는 발언 등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나아가 토론에서, 정책 결정에서, 철학자들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불러주지 않는 그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티비 토론 프로그램이나 정부가 진행하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철학자가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주 티비에 비춰주는 진중권씨야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철학자라기보다는 그냥 문화 비평가 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고, 그를 제외하고는 탁석산씨가 몇번,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가 몇번 티비에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 티비 토론프로그램에 나오는 횟수를 가지고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소외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자 이런 예를 들었다. 탁석산의  지적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적 내용에만 관심있을 뿐 사회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지 않는 철학 교수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하는가, 이다. 단순히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학문적 계승자를 위해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분명 지극히 협소한 부분만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좀 더 치열해지고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비판받을까 무서워 몸사리지 말고, 괜히 쓸데없이 더러운 물에 발 담글까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 사회와 부대끼고 싸워야 한다. 옳은 것에는 옳다고, 틀린 것에는 틀리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즐기기 위한 입문서인지라 가볍게 손에 들 수 있지만, 책을 내려놓을 땐 손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p.s.

  대학교 학부과정에서 철학과를 없애고 교양으로 대치하고, 대학원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반대한다. "전문 기술로서 철학을 활발하고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른 과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 알려진 이들 중에 이정우씨 정도가 해당되고, 철학하는 이진경씨, 고병권씨 정도는 전공을 바꿔 활동하지만 엄밀히 전공은 철학이 아닌 사회학 분과다. - 나이 먹을수록 먹고사는 문제에 눈 뜨기 때문이다. 다소 악랄한 발상이긴 하지만 눈뜨기 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관심있는 이들은 애초에 20살부터 철학에 퐁당 빠뜨려서 공부시켜야 한다. -_- 하다보면 더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공부하는 놈이 나타난다.

  그러나 철학과는 계속 존속시키되 실용적인 교양과목으로서 철학은 변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교양과목이라고 개설된 게 동양철학의 이해, 서양고전연구 이런 식이니 살짝 궁금해서 찾아온 애들도 관심없어 떠날 판이다. 철학과의 수업은 빡세게, 교양으로서의 수업은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들과 강사들이 스스로 변신을 해야한다. 이런 점에서는 탁석산의 지적에 동의한다.

  기업에 의한 철학 연구소의 설립도 말하는데, 기업에 기본 정신이 종속되지 않은 채 사회기여 차원에서 물질적인 지원만을 해준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경제연구소라면 모를까, 철학연구소를 차려줄 기업은 과연 있을까 의문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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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백백 2007-11-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문단에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을 무렵 대학 강단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이란 구절 있잖아요. 탁석산 씨가 학부생이었을 때 벌써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탁석산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네요.

마늘빵 2007-11-13 09:32   좋아요 0 | URL
앗, 그게 아니고, 제가 대학 학부생이었을 때. -_- 문장을 좀 손봐야겠군요.

2007-11-1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탁석산님이 오늘(2008.08.22) ebs에서 '건국 60주년, 역사, 미래를 말하다'의 강사로 강연을 하시더군요. 잘 몰랐던 분인데 흥미로운 발언들을 하시고 명료하고 통쾌한 면도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슬아슬한 재담꾼이기도 하시구요. 해서 알라딘 검색창에서 '탁석산'을 치고 책검색을 하였는데 아프라삭스님의 정성어린 리뷰가 달려있더군요. 독서량이 참 대단하시군요. 즐겨찾는 서재에 처음으로 아프락삭스님을 등록해봤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마늘빵 2008-08-23 10:17   좋아요 0 | URL
헉! 아니 탁석산이 건국 60년 어쩌구 하는 강연을 했다고요? 이거 뉴라이트 계열과 같이 행동하시는건가요? 탁석산을 순수한 우파 정도로 생각했던 제가 착각한건가요. 아니면 건국 60년 주제이지만 뉴라이트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강연인가. 아 궁금하군요. 찾아서 보고 판단해야겠습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20분동안만 강의를 들어 온전히 판단할 순 없지만 '순수한 우파'라는 표현이 (그러고 보니) 어울릴듯 하군요. 인문학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계속 강조하시던데...참고로 그동안의 이 기획강연에 참석했던 강사님들로는 (제가 본 바로는) 최재천 교수님, 정재승 교수님 등이 있습니다.

마늘빵 2008-08-23 17:06   좋아요 0 | URL
네 꼭 찾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탁석산의 행보는 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그래도 뉴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
 
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품절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전문 지식이며 전문 기술이다. 교양이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으며, 있으면 조금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 교양이 있어야봐야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며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교양과 결부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문화주의, 즉 교양주의 영향이 주원인이었다.-16쪽

한국 철학계에는 기본적으로 합의된 시대정신이나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나 주제로 철학자들을 분류하지 않고, 어디서 유혹했느냐 아니면 전공하는 철학의 국적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한국 철학계가 외래 철학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철학과 교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나 문제의식이 아니라 세력 균형이다. 대리전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자기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240쪽

한국 철학에서 원전 해석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외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구축하고 전개하는 능력과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철학은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할 뿐이지,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하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전형적인 훈고학적 태도이다. 물론 더 정확한 원전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원전을 이해하여 자기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 철학자의 기본 임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다. 한국 철학은 여전히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원전 해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자존심을 걸고 논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은 예뻐한다. 대신 자기 철학을 전개하려는 사람은 학문적이지 않다고 한마디로 폄하한다.-242쪽

철학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철학이 위기에 처하려면 잘나가던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은 별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도 없었다. 그저 학과가 존재하고, 학생이 존재하고, 교수가 월급을 받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특별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적도 없고, 한국 지성사에서 토대가 되는 작업을 한 적도 없으므로 새삼스레 위기라고 말할 것도 없다. 있다면 앞서 말한대로 교수의 밥그릇 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외부 환경이 바뀌고 있다. 즉 시대가 격변하며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졌으므로 철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늘고 있다. 문제는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밥그릇을 지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는 교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한 철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이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구실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지금 눈먼 연구 기금이 쓸모없는 프로젝트에 대량으로 투여되고 있다. 이런 것이 진짜 위기다.-251쪽

문제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학생들이 요구하는 지적 호기심과 지적 경외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철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철학 과목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용 영어나 법 관련 과목이나 컴퓨터 관련 과목, 다시 말해서 돈이 되는 과목에 몰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 중략 ...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지,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등. 진정 알고 싶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대학은 이런 욕구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학생들은 취직에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영어는 학원에서도 할 수 있고 취업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학원도 많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더욱더 인문학적 지식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253-254쪽

사회적 역할이란 철학이 사회 문제에 얼마만큼 발언권이 있느냐를 말한다. ... 중략 ... 이에 반해 철학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앞서 기술한 철학계 현황에 따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침묵해왔고 따라서 별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사회적 발언권도 약화돼 이제는 사회 문제가 있어도 철학자를 별로 찾지 않는다. ... 나는 이런 역할 부재의 원인이 전적으로 철학과 교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철학 지식을 현실 문제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이보다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사회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두루 알아야 하고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과 상식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미비하다. 한마디로 문학 평론가와 토론하면 말발이 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58쪽

철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 철학 저술가 양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철학책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김용옥 외에는 없을 것이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철학 저술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철학 대중화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읽으려면 전문기술이자 전문 지식인 철학을 다시 가공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대중적인 철학책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자의 관심은 현실과는 무관한 학문적 세계다. 현대 논리 철학의 창시자인 프레게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그 지식을 일반화할 틈도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물론 쓸 수도 있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다. 학자는 쉽게 쓰낟고 쓰지만 대중에게 아주 어렵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술 성과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저술가가 필요하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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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적으로,
철학은 교묘한 말재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 특히 유용하지요.

 


예전에 멜기세덱님 서재에서 화이팅에 대해서 댓글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는데, 멜기세덱님은 투쟁의 의미가 담겨있으므로 '화이팅'을 사용하지 말자고 하셨고, 나는 사용해도 괜찮다의 입장이었다. 조금 전 전에 가르쳤던 한 학생이 미니홈피에 와서 '화이팅!' 하고 남기고 갔는데, 대개 화이팅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투쟁과 싸움, 다툼의 의미가 아닌 '힘내자'의 의미로 사용하므로, 이걸 굳이 본래의 영어 'Fighting'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냥 '힘내자'의 다른 한국어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러니깐 'Fighting' 에서 시작하여, 한글로 옮겨 '화이팅'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이팅'은 'Fighting'의 의미를 담아내지 않고 있으므로, 아예 한글로 '화이팅'이라 적고 의미도 '힘내자'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바꿀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만. 언어는 감염되는 것이고, 굳이 자연스러운 이런 흐름을 막을 필요는 없다는 고종석의 입장을 수용하는 나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봤다.

예전 같으면 더 길게 주저리주저리 쓰고 싶다만, 지금 나는 매일같이 아침/밤으로 여러 책과 논문과 함께 씨름하며 컴퓨터 전자파를 하루 종일 받아가며 하얀 백지 워드에 한 문장 한 문장 추가하고 있어 이미 지칠대로 지쳤다. 고로 -_- 그냥 간결하게 이렇게 뚝 써놓고 마련다. 쓰다보니 또 길어졌다. 원래 한 두 문장으로 쓰고 말려고 했는데. 모두들 잘자요. 벌써 자진 않으려나. 그럼 열심히 노세요. 나는 조금 더 하다가 조금 이따 사랑과 전쟁 봐야지. 이제 이러고 있는 것도 다음 주면 끝난다. 어휴. 끝나면 좀 놀아야겠다. 뭐 하면서도 밴드하고 영화도 보고 티비도 다 챙겨보고 그러지만. 그래도 마음의 짐을 덜고 노는거랑 짐을 등에 이고 노는거랑 다르니깐. 그래도 불안감은 통과! 하는 날까지 계속 될 터.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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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리 (부사) :

[Ⅰ]
아리아리하다 어근.
[Ⅱ][부사][북한어] 정신희미하거나 흐리어 명백하지 않은 모양.

아리아리하다

[형용사]『…여럿이 다 모두 뒤섞여 또렷하게 분간하기 어렵다.


남영신의 한 국어사전에는 아리아리는 안나오고, '아리아리-하^'는 나와있는데, 위와 다르지 않군요. 그렇담 화이팅의 우리말로 쓰는 '아리아리'는 무슨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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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11-0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원 국어 수험서에는
파이팅을 아자, 힘내라, 아리아리, 지화자 뭐 이런 걸로 바꿔써야한다고 나오더군요.
어여 하던거 끝내고 다음 주 사랑과 전쟁은 가벼운 마음으로 보세요 ㅎㅎㅎ

마늘빵 2007-11-02 22:40   좋아요 0 | URL
움 국어사전에 '화이팅'이라고 넣고서 이렇게 풀이하는거에요.
1. 힘내라 혹은 힘내자
2. 아자
3. 아리아리 (얘는 뭐에요?)
4. 지화자

웽스북스 2007-11-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우리 중 '파이팅'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었을 때 싸워라, 이겨라, 등의 전투적인 의미를 떠올려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그 말은 힘을 내라, 열심히 해라, 라는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말을 읽게 됐을 때, 어떤 결연한 의지, 혹은 공격적인 그 무엇보다는 나를 향해 힘을 주고 싶은 상대방의 따뜻한 마음을 보게 된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다. 그 대중에 의해 한 단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그 단어의 원 의미를 들추어가며 그 단어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지나친 언어순수주의의 결과이다.
고종석놀이, 고종석 발끝에도 못미치지만요 ㅎㅎ 어제 감염된 언어 다 읽고 지금 밑줄 옮기러 알라딘 들어왔는데 너무 졸려 헤매이던 중, 이런 글을 만나니 반갑네요 ㅋㅋ 아프락사스님 남은 한 주도 화이링이요~

마늘빵 2007-11-02 23:39   좋아요 0 | URL
엇,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에 저런 문구가 있었나요. 왜 기억이 안나지. 아니면 문체를 달리해서 웬디양님이 쓴건가요? 그랬다면 길게 쓰려고 했던 제가 하고픈 말 다 해주셨어요. :)

저는 지금 케이비에스 제이티비 창 띄워놓고 놀고 있는 중. 오늘은 (논문) 그만 써야지. 웬디양님도 주말 화이팅.

웽스북스 2007-11-02 23:27   좋아요 0 | URL
당근 없었죠- 고종석놀이라니까요 ㅎㅎ 헷갈려해주시니 황송합니다 ㅋㅋ

마늘빵 2007-11-02 23:39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럴듯한데요? :)

멜기세덱 2007-11-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론:)ㅋㅋ ① 댓글을 주고받은 기록이 없음. 내 페이퍼를 다시 찾아봤는데, 없던데요.ㅋㅋ ② 나의 주장은 '사용하지 말자'쪽이라기보단 '사용을 자제하자'에 가까우면서 이를테면 '사용하기에 알맞은 상황에서 다소 제한적으로 사용하자'였음. 다시 읽어보니 그렇더라구요.ㅋㅋ ③ 고종석의 언어학적 입장에 대체로 동의하며 인위적 언어순화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혐오하는 바임 ④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팅'에는 (다분히는 아니라할지라도) 호전적 성격을 담고 있지 않은가 생각됨. 그래서 이 말을 다양한 맥락에서 좀더 유효적절한 감탄사로 대체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임. '아리아리' 괜찮네요....ㅋㅋㅋ* 추천은 내꺼임....ㅎㅎㅎ

마늘빵 2007-11-03 07:56   좋아요 0 | URL
1. 어 있어요. -_- 제가 어느 페이퍼에 댓글 달았었는데 거기에 멜기님이 댓글 달았었어요.
2. 어 그럼 찾으신건가요? :)
3. 저도 인위적인 언어 순화는 혐오하는 편이에요. 그냥 냅두자, 가 기본이고, 외계어나 이런 것들은 다르게 취급해야죠.
4. ㅋㅋㅋ 아리아리 이건 뭐에요. 사전 찾아봐야겠다 정말 아리아리 란 말이 있나. 전 이런 말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한데.
5. 추천은 땡큐 ^^

turnleft 2007-11-03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파이팅' 이라고 하면 미국 사람들은 "sorry?" 라고 한답니다.
저거 사실 한국말이었어요...;;

마늘빵 2007-11-03 07:57   좋아요 0 | URL
음, 원래 그렇게 사용되고 있죠 사실. :)

프레이야 2007-11-03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한달간 아리아리~~ 하세요!!!

이매지 2007-11-0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아리는 순한국말로 알고 있는데 확실한지 모르겠네요;

Jade 2007-11-0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프님 지금도 많이 노시면서, 끝나면 얼마나 노실려고....

다락방 2007-11-03 12:10   좋아요 0 | URL
댓글 추천! ㅎㅎ

마늘빵 2007-11-0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저도 뭔지 모르지만 아리아리. ^^
매지님 / 음. 찾아봤는데 입안이 얼얼하다 이런거 밖에는... -_-
제이드님 / -_- 흥! 나만 미워해.
다락방님 / 추천은 또 머에요. 페이퍼에 추천해야지! 버럭!

Jade 2007-11-04 09:44   좋아요 0 | URL
ㅋㅋ 저한테 이쁨 받아서 뭐하시려구요 ㅋㅋㅋ

마늘빵 2007-11-04 09:46   좋아요 0 | URL
-_-a ......

Jade 2007-11-05 01:33   좋아요 0 | URL
ㅎㅎ 거봐요. 그러니까 계속 미움 받으셈 ㅋㅋ :P

마늘빵 2007-11-05 08:36   좋아요 0 | URL
-_-a 그래두... 뭔가 이상해.

여울 2007-11-0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림이들 사이에선, 화이팅!! 홧팅!!? 보다 압도하는 것이 힘!!!, 히 ㅁㅁㅁㅁ!!! 서로 마주치며 건네는 말이 느낌이 괜찮답니다. 화이팅은 열에 하나정도로 적은 듯 싶어요. 저도 힘!!!을 건네는데, 마음도 포스?도 전달되는 것 같아 자주 씁니다. 아자도 좋구요...힘내라는 좀 늘어지는 듯...ㅎㅎ

마늘빵 2007-11-05 10:54   좋아요 0 | URL
음헛, 달림이는 누구에요? -_-a
힘내라 보다는 힘! 이 더 메세지가 강력하건 사실이에요.
'화이팅'이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죠.
아자! 도 좋고, 으쌰! 도 좋고. 크크. :)

이매지 2007-11-0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urimal.org/scrpt/board/alrim_show.asp?board_no=53&serial_no=1
여기가니까 뜻이 있네요 :)

여울 2007-11-05 17:48   좋아요 0 | URL
음~ 그래도 살리자는 취지는 좋은데, 어감이 겹쳐, 살아날 확율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마늘빵 2007-11-05 19:41   좋아요 0 | URL
음 저도 봤어요. 좀 힘들거 같아요. 취지와 의미는 좋은데. 일단 '아리아리'는 A가 B에게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B가 못알아들으면 -_- 거시기하고 그러다보니.

가넷 2007-11-05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써보기는 했는데 어색 하더군요.(아리아리.. 요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구판절판


"우리들은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 즉 절대로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 스튜어트 밀)-51쪽

똘레랑스는 부정의 논리인 동시에 긍정의 논리다. 완전함을 부정하는 한편 자발성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완전함이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발성과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진리가 무너졌다고 해서 개인의 자발성이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완전함을 부정하면서도 자발성을 최대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야 침묵하고 복종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52-53쪽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필리프 사시에)-54쪽

밀은 진리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셋째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는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거나 실제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편견처럼 비쳐져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상실되리라는 것,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르침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그 의견은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기발랄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55-56쪽

'똘레랑스'에 부정하는 의미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인 '앵똘레랑스'는 표면적으로는 똘레랑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이때의 앵똘레랑스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면 안될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음을 의미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일반적인 앵똘레랑스와 의미가 다르다. -56-57쪽

똘레랑스는 때로 공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강압을 사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강제나 차별을 동원하면 강제하는 자나 차별하는 자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로 비칠 수 있다. -62쪽

"똘레랑스는 비대칭 불균형의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해지는 악을 악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작용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필리프 사시에)-67쪽

똘레랑들은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예로 들며 비폭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똘레랑들에게는 폭력이 앵똘레랑스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는 반면 힘없는 약자에게는 일상이 폭력이다. 약자의 비폭력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무기력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속시키려는 폭력이 아니라 그 모순을 없애려는 폭력은 야만스러운 폭력과 다르다. 폭력과 대항 폭력은 몸통이 붙어 있지만 머리가 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해야 한다.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93쪽

"참된 철학 운동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 집단 사이에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결코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그람시)-115쪽

똘레랑스는 공적인 토론에서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원칙은 상대방의 의견을 냉정하게 듣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반대자에게 불리한 일을 과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유리한 일을 감추지 말 것이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극단주의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설사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무식하다', '교양없다', '부도덕하다' 같은 딱지를 붙인다. 밀은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리와 정의를 위하려면 우세한 편에서 욕설의 남용을 억제하는 것이 반대 의견을 가진 편의 욕설 남용을 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16쪽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허위 의식을 만들기 시작할 때, 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즉 허위 의식을 기르는 말과 이미지를 쓰려 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그들의 선전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들은 압도적인 돈과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조절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120쪽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모두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는 것은 허위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오히려 동등함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르다.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21-122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하지. 죽음을 주고, 비참한 고통을 주고, 착취하고,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잘난 체했던 이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불행과 고통을 주어 그들이 새로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생의 활력을 주고, 일을 주고, 저항하게 도와주고, 형제가 되었던 사람은 그에 마즌 대가로 얼굴과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가 걸어갈 길을 밝혀줄 빛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135-136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에서,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있는 선물이 아니라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다.-138쪽

각주98) 조정환은 똘레랑스가 중도를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똘레랑스는 두 개의 앵똘레랑스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중간의 지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양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중용의 태도를 지향한다. 이 태도에서 양쪽 극단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똘레랑스는 오직 앵똘레랑스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일화를 향한 강한 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을 견디는 태도이지 다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조정환, <'똘레랑스'의 윤리 정치학 비판>,[모색] 3호, 122쪽)-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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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볼 만한 구절 : 35절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0-22 21:14 
      "지금부터는 과연 정의가 불관용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러한지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몇 가지 문제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불관용하는 종파가 자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어떤 조건 아래에서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 그들이 관용을
 
 
 


 혹시나 어떤 변동 사항 있나 해서 수시로 대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는데, 지금은 한창 학기중인데도 어떤 과목의 강사분이 바뀌었단 공지가 떠있었다. 물론 나는 이제 대학원에 가지 않고, 수업도 다 들은, 수료생 입장이지만 궁금하여 내용을 읽어봤더니, 내용인즉슨, "OOOO 수업이 OOO 교수님의 사망관계로 이 수업은 OO학과 OOO 교수님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라는.

  대개 수업 관련 공지는 강의실 변경이 대부분이고, 강사 변경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사유가 또 사망이라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고, 듣지 않는 과목이지만, 그 짧은 문구가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분명 같은 날 같은 수업 시간엔 모르고 들어온 학생들도 많을텐데 바뀐 강사분이 돌아가신 그 분이 섰던 자리에 가서 여차저차해서 이제부터 제가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말하는 강사분이나 듣는 학생이나 어떨까. 

  9월부터 함께 했던 정들은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앞으로 그 수업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 분도, 사망소식을 전해들어야 하고, 같은 자리에서 다른 분의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들도, 침울하겠지. 글쎄,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아니고, 경험해 본 적도 없어서, 어떤 마음일지는 모르겠지만, 당황스럽고 우울할 것이다. 사인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면 굳이 누군가 묻지도 않을 것이고, 물을 생각도 못할테지. 당장 몸으로 느껴야 하는건 원인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결과이니.

  모르는 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은, 비록 모르지만 같은 시공간 내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차지했던 1/n 만큼 뻥뚫린 것 같은 기분이다. 영원히 메꿔지지 않는. 사진은 '존재의 부재 증명'이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그 분의 사진에서 느끼는 것은 '부재 증명'이 아니라, '상실감'일 것이다. 그와 언어를 섞고, 얼굴을 섞고, 살을 섞었던 사람들은 더더욱, ...  문득 한 때 내 곁에 있었던, 지금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후배 녀석과 대학 동기 녀석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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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10-1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거고,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 한발짝씩 다가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늘 그렇지 않은듯이 행동하죠....^^ 1/n이 뻥 뚫린만큼, 또다른 1/n이 채워짐으로 위로받으셔요. 어디선가 언어와 얼굴과 살을 섞은 사람이 이곳을 떠나는 동시에 누군가는 생활을 섞을 그이를 만날테니까...^^

다락방 2007-10-15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울컥,하잖아요.

마늘빵 2007-10-1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 모두 언젠가 죽을건 확실하지만, 주변에 알게 모르게 있던 사람의 갑작스런 부재는 뭔가 한구석을 휑하게 만듭니다. 비록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뉴스에서 누군가의 사고소식을 접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다락방님 / 밤엔 그래도 괜찮아요. 가끔 일부러 그럴 때도.

아무개님 /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더 휑하고 오래 가는 듯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금방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오죠. 가끔씩 주인 없는 홈피에 들러보며 잊지 않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