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구판절판


"우리들은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 즉 절대로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 스튜어트 밀)-51쪽

똘레랑스는 부정의 논리인 동시에 긍정의 논리다. 완전함을 부정하는 한편 자발성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완전함이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발성과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진리가 무너졌다고 해서 개인의 자발성이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완전함을 부정하면서도 자발성을 최대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야 침묵하고 복종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52-53쪽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필리프 사시에)-54쪽

밀은 진리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셋째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는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거나 실제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편견처럼 비쳐져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상실되리라는 것,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르침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그 의견은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기발랄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55-56쪽

'똘레랑스'에 부정하는 의미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인 '앵똘레랑스'는 표면적으로는 똘레랑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이때의 앵똘레랑스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면 안될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음을 의미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일반적인 앵똘레랑스와 의미가 다르다. -56-57쪽

똘레랑스는 때로 공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강압을 사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강제나 차별을 동원하면 강제하는 자나 차별하는 자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로 비칠 수 있다. -62쪽

"똘레랑스는 비대칭 불균형의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해지는 악을 악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작용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필리프 사시에)-67쪽

똘레랑들은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예로 들며 비폭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똘레랑들에게는 폭력이 앵똘레랑스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는 반면 힘없는 약자에게는 일상이 폭력이다. 약자의 비폭력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무기력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속시키려는 폭력이 아니라 그 모순을 없애려는 폭력은 야만스러운 폭력과 다르다. 폭력과 대항 폭력은 몸통이 붙어 있지만 머리가 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해야 한다.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93쪽

"참된 철학 운동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 집단 사이에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결코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그람시)-115쪽

똘레랑스는 공적인 토론에서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원칙은 상대방의 의견을 냉정하게 듣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반대자에게 불리한 일을 과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유리한 일을 감추지 말 것이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극단주의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설사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무식하다', '교양없다', '부도덕하다' 같은 딱지를 붙인다. 밀은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리와 정의를 위하려면 우세한 편에서 욕설의 남용을 억제하는 것이 반대 의견을 가진 편의 욕설 남용을 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16쪽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허위 의식을 만들기 시작할 때, 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즉 허위 의식을 기르는 말과 이미지를 쓰려 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그들의 선전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들은 압도적인 돈과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조절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120쪽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모두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는 것은 허위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오히려 동등함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르다.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21-122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하지. 죽음을 주고, 비참한 고통을 주고, 착취하고,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잘난 체했던 이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불행과 고통을 주어 그들이 새로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생의 활력을 주고, 일을 주고, 저항하게 도와주고, 형제가 되었던 사람은 그에 마즌 대가로 얼굴과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가 걸어갈 길을 밝혀줄 빛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135-136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에서,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있는 선물이 아니라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다.-138쪽

각주98) 조정환은 똘레랑스가 중도를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똘레랑스는 두 개의 앵똘레랑스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중간의 지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양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중용의 태도를 지향한다. 이 태도에서 양쪽 극단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똘레랑스는 오직 앵똘레랑스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일화를 향한 강한 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을 견디는 태도이지 다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조정환, <'똘레랑스'의 윤리 정치학 비판>,[모색] 3호, 122쪽)-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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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볼 만한 구절 : 35절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0-22 21:14 
      "지금부터는 과연 정의가 불관용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러한지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몇 가지 문제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불관용하는 종파가 자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어떤 조건 아래에서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 그들이 관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