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철학자 탁석산의 발언은 거침 없다. 잘은 모르지만 그는 철학 학계에서는 다소 왕따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어디 얽매이지 않은 - 엄밀히 그는 한국외대 무슨 대학원 소속으로 얽매여있긴 하다 - 자유롭고 명쾌한 철학자 탁석산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내가 대학 학부생이었던 때 대학 강단에 선 그의 모습도 그랬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하고픈 말을 다 쏟아내 웃음을 주곤 했다. 그가 쏟아낸 말들 중에는 꽤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나는 그를 통해 조동일을 접했고, 이키유바라 최를 접했다. 서울대학 학부 신입생 시절 조동일과 잠시 맞짱 토론을 했다던 그는, 자신이 언젠가 낸 책을 통해 조동일을 한번 더 공격했음에도 그가 답하지 않은건 자기와 같은 하찮은 존재와 상대해봐야 아무런 이득 볼 게 없다는 조동일의 계산이 아닐까 라고 혼자 추측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굳이 또 가르치는 학생을 향해 말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가 깬다. 학부시절의 잠깐의 토론이 과장됐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건 아니건 나는 이런 털털한 면을 보여주는 솔직한 그가 좋다.

  <철학 읽어주는 남자>는 당연히 철학서다. 하지만 일반적인 철학서에서 볼 수 없는 주제가 함께 버무려있는 해물잡탕과 같은 책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파트 1은 철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파트 2는 철학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다소 실용적인 면을 보여준다. 마지막 파트 3에서는 그의 철학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난다. 파트 3은 논란이 많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땅에서 철학하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탁석산은 신랄하게 한국 철학계와 대학 풍토를 질타하고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강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여진 댓가로 그가 학계에서 더 왕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철학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철학을 접하고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철학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과, 뒤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진 못하지만 생각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탁석산은 과감히 삶의 지혜로서의 교양주의 시각으로 철학을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교양'이기보다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간 선보인 여러 책들은 철학의 실용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곳에 철학을 써먹어라.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하라는 의미다. 회사 기획서 작성법이나 보고서 작성법, 토론법에 대해 서술한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시리즈는 이런 맥락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교양으로서 철학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로서 써먹으라는 그의 주장은, 파트 3에서 이어진다. 한국 철학계의 학문 풍토와 대학 교수들을 비판하면서 이대로는 철학이 아무런 발전도,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의 비판은 꽤나 날카롭고 직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신랄하게 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주장에 담긴 내용이 진부적일지언정 그가 주장을 이끌어내는 사고과정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철학은 번성기를 가져본 적도 없으므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발언, 인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정부에서 연구비를 타내 대학 교수들끼리 쓸데없는 프로젝트를 하며 꿍짝꿍짝 타먹고 있다는 발언, - 서울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젝트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다. 나는 이걸 왜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했느냐 하는 논쟁 또한 훈고학적인 태도일 뿐, 중요한건 자기철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발언, 심지어는 한국 철학계에는 합의된 시대정신이니 과제가 없다는 발언 등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나아가 토론에서, 정책 결정에서, 철학자들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불러주지 않는 그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티비 토론 프로그램이나 정부가 진행하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철학자가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주 티비에 비춰주는 진중권씨야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철학자라기보다는 그냥 문화 비평가 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고, 그를 제외하고는 탁석산씨가 몇번,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가 몇번 티비에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 티비 토론프로그램에 나오는 횟수를 가지고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소외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자 이런 예를 들었다. 탁석산의  지적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적 내용에만 관심있을 뿐 사회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지 않는 철학 교수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하는가, 이다. 단순히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학문적 계승자를 위해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분명 지극히 협소한 부분만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좀 더 치열해지고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비판받을까 무서워 몸사리지 말고, 괜히 쓸데없이 더러운 물에 발 담글까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 사회와 부대끼고 싸워야 한다. 옳은 것에는 옳다고, 틀린 것에는 틀리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즐기기 위한 입문서인지라 가볍게 손에 들 수 있지만, 책을 내려놓을 땐 손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p.s.

  대학교 학부과정에서 철학과를 없애고 교양으로 대치하고, 대학원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반대한다. "전문 기술로서 철학을 활발하고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른 과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 알려진 이들 중에 이정우씨 정도가 해당되고, 철학하는 이진경씨, 고병권씨 정도는 전공을 바꿔 활동하지만 엄밀히 전공은 철학이 아닌 사회학 분과다. - 나이 먹을수록 먹고사는 문제에 눈 뜨기 때문이다. 다소 악랄한 발상이긴 하지만 눈뜨기 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관심있는 이들은 애초에 20살부터 철학에 퐁당 빠뜨려서 공부시켜야 한다. -_- 하다보면 더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공부하는 놈이 나타난다.

  그러나 철학과는 계속 존속시키되 실용적인 교양과목으로서 철학은 변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교양과목이라고 개설된 게 동양철학의 이해, 서양고전연구 이런 식이니 살짝 궁금해서 찾아온 애들도 관심없어 떠날 판이다. 철학과의 수업은 빡세게, 교양으로서의 수업은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들과 강사들이 스스로 변신을 해야한다. 이런 점에서는 탁석산의 지적에 동의한다.

  기업에 의한 철학 연구소의 설립도 말하는데, 기업에 기본 정신이 종속되지 않은 채 사회기여 차원에서 물질적인 지원만을 해준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경제연구소라면 모를까, 철학연구소를 차려줄 기업은 과연 있을까 의문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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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백백 2007-11-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문단에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을 무렵 대학 강단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이란 구절 있잖아요. 탁석산 씨가 학부생이었을 때 벌써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탁석산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네요.

마늘빵 2007-11-13 09:32   좋아요 0 | URL
앗, 그게 아니고, 제가 대학 학부생이었을 때. -_- 문장을 좀 손봐야겠군요.

2007-11-1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탁석산님이 오늘(2008.08.22) ebs에서 '건국 60주년, 역사, 미래를 말하다'의 강사로 강연을 하시더군요. 잘 몰랐던 분인데 흥미로운 발언들을 하시고 명료하고 통쾌한 면도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슬아슬한 재담꾼이기도 하시구요. 해서 알라딘 검색창에서 '탁석산'을 치고 책검색을 하였는데 아프라삭스님의 정성어린 리뷰가 달려있더군요. 독서량이 참 대단하시군요. 즐겨찾는 서재에 처음으로 아프락삭스님을 등록해봤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마늘빵 2008-08-23 10:17   좋아요 0 | URL
헉! 아니 탁석산이 건국 60년 어쩌구 하는 강연을 했다고요? 이거 뉴라이트 계열과 같이 행동하시는건가요? 탁석산을 순수한 우파 정도로 생각했던 제가 착각한건가요. 아니면 건국 60년 주제이지만 뉴라이트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강연인가. 아 궁금하군요. 찾아서 보고 판단해야겠습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20분동안만 강의를 들어 온전히 판단할 순 없지만 '순수한 우파'라는 표현이 (그러고 보니) 어울릴듯 하군요. 인문학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계속 강조하시던데...참고로 그동안의 이 기획강연에 참석했던 강사님들로는 (제가 본 바로는) 최재천 교수님, 정재승 교수님 등이 있습니다.

마늘빵 2008-08-23 17:06   좋아요 0 | URL
네 꼭 찾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탁석산의 행보는 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그래도 뉴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