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두시간 오십분의 러닝타임. 콜린파렐, 안젤리나 졸리, 안소니 홉킨스 의 빵빵한 출연진. 하지만 영화는 개봉 당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입소문따라 그다지 화려하지도, 많은 것을 보여주지도, 감동을 주지도 못했다. 두 시간 오 십분이 너무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외국 영화 배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알고 있는 콜린 파렐와 안젤리나 졸리, 안소니 홉킨스를 등장시키고도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싶은 영화다. 콜린 파렐은 사실 많이 알려진 배우는 아니지만 영화 <폰부스>와 <데어데블>로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 배우다. 젊은 탐크루즈라고 여길만큼 외모에서 느껴지는 인간다움과 부드러움, 그렇게 튀는 배우는 아니지만 서서히 다가와 스크린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풍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알렉산더>의 주연을 고르고 있을 때, 그를 지목하고 그의 금발과 연기에 필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전작에서 느껴지는 그만의 매력이 발산되지 못했다는 느낌만 받았다. 안젤리나 졸리 역시도 마찬가지. 아직 젊디 젊은 그녀를 콜린 파렐의 어머니 역할에 맡긴 그 설정 자체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는데 졸리만의 매력은 알렉산더의 어머니 역할로는 부적합하지 않았나 싶다.



* 알렉산더 역의 콜린 파렐. 그의 금발과 수려한 외모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알렉산더의 카리스마를 확인하기에는 역부족.



* 아니 이게 누구? 섹시의 대명사 안젤리나 졸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녀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로는 부적합했다는 생각. 그녀는 머니머니해도 섹시로 승부를 봐야해. 여기선 그녀의 섹시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효리하테 장희빈 역할 시켜봐 어울려? 알렉산더 엄마를 장희빈에 비유하는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 알렉산더 대왕의 마지막 전쟁. 여긴 인도? 코끼리를 탄 부족과 알렉산더의 무적의 군대가 맞붙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여기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이 전쟁을 치루기 이전까지의 장장 7년에 걸린 대 장정. 병사들은 죽어나고 지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알렉산더를 원망하고 증오하지만 그의 부상으로, 그리고 그의 회복으로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리고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실제 역사속의 인물 알렉산더가 걸어왔던 길을 영화로 만든 것일 뿐.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 한다는 의미 외에 이 영화를 통해 다른 무엇을 느끼기는 힘들 듯 하다. 엄청난 엑스트라와 물자를 동원해서 치룬 스케일 큰 전투 장면에서 전쟁의 잔인함과 참혹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영웅이야기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사랑 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별다른 감동을 선사해주지 못한다. 이래저래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역사속 인물 알렉산더의 다큐멘터리 역할을 해주는 것  밖에. 다큐멘터리 치고는 참 재밌고 실감나는 영화지만 스케일 큰 전쟁 영화로는 그다지 아니올시다 이다.   이와 비슷한 류의 영화들, <트로이>, <킹덤 오브 헤븐>, <킹 아더> 에 비해서 좀 떨어진다.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알렉산더의 대장정과 업적들. 그것을 영상으로 확인하는 작업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없다.

하나. 알렉산더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토록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채 타국을 정벌했던 것일까.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묻는다. 이 전쟁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더냐? 부와 명예다. 그렇다면 그 부와 명예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당신을 위한 것이냐? 한 왕국의 야망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누구는 자식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누구는 인생의 노년기를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뭘 위한 전쟁인가. 아무리 좋게 봐도 알렉산더의 야망 그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정벌을 설명하지는 못할 듯 싶다.

둘. 알렉산더는 정벌하는 곳 마다 그곳의 지배자를 존중해주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주었다. 즉 이전에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 타민족은 야만족이다 라는 생각을 뒤집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고도 야만족을 대우해주는 바람에 아군 진영으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그것을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말했다. 그들은 분명 알렉산더가 지배하기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았고, 그리스 식의 교육을 받았다. 이것을 해방이라 볼 수 있는가. 지금 미국이 타국을 침략하고 그네들의 문화를 그곳에 뿌리내리게 하는 문화적 식민 작업과 알렉산더의 그것이 다를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늘의 미국도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그들을 독재자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을 터. 알렉산더는 그리고 미국의 부시는, 타국의 이민족들을 '해방시킨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그네들도 과연 그럴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지오웰의 '1984년'과 매트릭스의 만남, 이퀼리브리엄

"매트릭스는 잊어라" 라는 문구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인 영화 포스터.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그 뜻을 알지 못하고는 쉽게 기억하기 힘든 저 제목 '이퀼리브리엄'은 홍보용으로는 부적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우리말로 번역해서 '평온'이라고 하면 그건 그냥 원래 제목을 놔두느니만 못하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듯 하다. 지난주 주말에 티비에서 밤12시에 해줬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그 전에 비디오를 빌려다 봤다. 예전에 군대에서 휴가 나와 극장에서 본 영화이기도 하지만 본지 꽤 지났기에 다시 봤지만 내용은 생소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지오웰의 <1984년>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1984년>을 영화로도 봤고, 책으로 본지라 그 줄거리와 충격이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뭐 레포트나 논문을 쓰면 으레 나오는 현재 사회는 과거 사회에 비해 어떻게 변했고 어떤 병폐가 있다 라는 식의 서문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소설화, 영화화 한 작품은 그 표현력이 매우 빼어났다. 원작이 <1984년>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흡사했다는 면에서. 



* 이 화려한 존 프레스턴의 총술. 이걸 영화 속에선 '건카타'라고 한다. 최단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총술. <매트릭스>이후 액션은 끝났다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 속 액션은 또다른 놀라움을 선사해준다.



* 존 프레스턴의 건카타에 순식간에 쓰러지는 클레릭들.

  <이퀼리브리엄>은 '감정'이 없는 사회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갖고 있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는 '감정' 이 없다.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 또한 이 사회에서는 없어진다. 피카소의 추상화를 비롯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 거울, 음악, 미술, 예술적 가치가 있는 모든 작품들과 물건들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감정을 없애기 위해 하루 세번씩 꼬박꼬박 프레지움이란 약을 주사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로보트와도 같이 딱딱한 메마른 사람들로 변한다. 감정이 없으니 당연지사. 하얗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감정 없는 딱딱한 말투는 가족 사이라고 해서 달라질건 없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칭해 '반군'이라 하고 이들은 주어진 약을 먹지 않고 몰래 버리거나 숨겨놓으며 '감정의 제거됨'을 거부한다. 또 이들을 잡는 이들이 있었으니 '클레릭'이었다. 이들은 군인, 경찰과 같은 존재들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이 두 그룹들간의 싸움이다. 총사령관 하에 클레릭은 반군들을 색출하고 반군들은 이들에 대항하고... 극중 한 클레릭 존 프레스턴은 그의 파트너가 범죄현장에서 책을 하나 들고 증거물수집과에 넘기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그가 투약을 거부하고 책을 읽고 있는 현장을 목격 그를 사살한다. 그러나 그를 사살한 존 프레스턴이 결국 나중에는 자신이 죽인 동료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여자를 대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동정, 안타까움, 분노 등등의 감정을 지니게 되면서 그는 반군에 협력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 존재하지도 않는 총사령관의 얼굴을 한 부총령관을 사살함으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람들에게 '감정'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년>은 이와 비슷하다. 감정을 느껴서는 안된다. 사랑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러나 소설속의 주인공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현장을 목격당해 끌려간다.

  '감정'이 없는 삶이란 과연 가능할까. 영화에서 존 프레스턴이 사랑한 반군 여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이란 당신에게 어떤 것인가?" 존 프레스턴은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그 조차도 자신이 사는 목적과 의미에 대해 의심을 한다.
 
  우리는 신문기사와 저녁뉴스에서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의 현실상을 볼 때마다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으로써 해결해라 라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또 그것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정이 없이 이성만으로 된 사회는 너무나 메마르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슬픔, 기쁨, 분노, 동정, 연인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좋아함과 사랑 등의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증오함과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존재한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 갈래로 나누었지만 엄격히 어느 하나가 긍정이고 부정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때에 따라서는 분노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감정을 통해 살아가고 삶이란 곧 감정의 표출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감정이 제거된 사회의 단면을 지켜봄으로써 새삼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으로써 행동해라' 라고 한 절대진리의 명제처럼 보이는 문장이 왜 이렇게 거짓으로만 느껴지는건지.

다음은 에롤 파트리지(숀 빈)가 존 프레스턴에게 죽으면서 낭송한 시이다.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 William Yeats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하늘의 융단을 소망하며 - 윌리엄 예이츠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파란, 침침한,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오로지 꿈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 드렸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p.s 중학생 아이들에게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말해주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영화를 보여주면 전반부의 지루한 장면들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후반부의 화려한 존 프레스턴의 총술에 주목하며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그저 영화의 의미를 배제한 채 재밌는 영화로서 보여줌이 좋을듯.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12-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이츠의 시가 죽입니다.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캬~
영화줄거리를 보니 '트래블러'란 최근에 나온 책도 생각나네요.

플라시보 2005-12-2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이 영화 비디오로 빌려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어제 가 보니까 동네 비디오 가게가 말도 없이 이사를 갔더라구요. 이제 어느 비디오 가게를 뚫어야 할지..쩝

마늘빵 2005-12-20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 ^^ 비됴에선 저렇게 해석하진 않았는데 어떻게 해석하건 캬~ 소리 하오죠. '트래블러'는 뭔가요. 그거 검색해봐야겠네요.

플라시보님 / 주변에 비됴가게 없어진데 많아요. 저희 집 근처에도 한군데 밖에 없다는. 훔. 세군덴가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재밌습니다.

바람구두 2005-12-2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아프락사스님!
그런데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을 단순히 "평온"이라고 보기엔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철학 용어로는 의지(意志)의 자유를 주장하는 비결정론(非決定論)으로서의 "균형설"을 의미하거든요. 백과사전에 나오는 말을 옮겨 보면 이 영화의 제목으로서 단순히 "평온"이 아니라 좀 더 철학적인 제목이란 걸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상반(相反)하는 두 동기(動機)가 같은 힘과 가치에 의해 균형상태에 있을 때, 의지는 어떠한 외적 원인에 의해서도 제약·규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며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어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이퀄리브리엄"은 서로 대조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일종의 결정론이니까요. 그리고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이란 이름은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청교도 신학자의 이름이자,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란 동방의 전설 기독교 왕의 이름하고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좀 더 생각해볼 일이긴 하지만...

마늘빵 2005-12-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바람구두님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진 못했는데요.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서요. ^^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놀이터 옆 작업실 - 홍대 앞 예술벼룩시장의 즐거운 작가들
조윤석.김중혁 지음, 박우진 사진 / 월간미술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 도덕시간에 '진로적성' 단원에서 그렇게 배웠다. 직업을 선택할 때는 돈, 명예, 사회적 지위를 떠나 자아실현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배우기는 그렇게 배웠으되, 사회로 내던져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또, 지금 나에게 배우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제자들도 책에선 그렇게 말하지만 그들에게 "너의 직업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그 직업을 택하는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그들은 여지 없이, 절대 다수가, '돈'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것이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상이다. 돈은 곧 신이다. 얼마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기도 했다. 아무리 밤을 새고 일이 고되도 좋으니깐 연봉이 높았으면 좋겠다고. 자기는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연봉을 최고로 고려 할 것이라고. 현재의 자신의 직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현 직장인들이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중학생이 생각하는 직업의 최고 가치나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나 최고 가치는 돈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놀이터 옆 작업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삶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마치 인생을 달관한 듯 하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요, 계속 없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등 그들은 위에 언급한 저들과 달리 너무나도 지나치게 돈을 천시하는 듯하기까지 보인다. 돈 니가 뭔데?! 난 그런거 필요 엄떠!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정말 교과서에서 말하고 있는 자아실현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이고, 이 일을 함으로써 나는 나의 존재감을 맛보므로 내가 해야할 일은 이것이다. 벽에 그림을 그리고, 점토를 가지고 이쁘장한 장식품을 만들고, 남들이 필요 없다고 버린 천조가리로 쌔끈한 가방을 만들어내질 않나, 이들이 하는 짓(?)을 보자면 마술사가 따로 없다. 그들이 즐기는 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그 일은 대부분 이렇게 손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같은 돌맹이를 봐도, 같은 나무를 봐도, 같은 벽을 봐도, 같은 흙을 봐도 남들과 다르게 본다.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것들을 통해 생각을 하고, 머릿속으로 이미 작업을 시작한다. 아 저것은 무엇이 되겠구나, 저걸 가지고 이렇게 하면 이런 이쁜 예술작품이 탄생하겠구나. 처음부터 예술작품을 만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저절로 끝에가선 예술작품이 되었다.

  "원석이 매력적인 이유는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가공하지 않은 거니까 모양이 전부 제각각이죠. 전 원석을 하트 모양이나 이상한 모양으로 다듬는 건 싫어요. 그냥 원석 그대로의 모습을 어떻게 잘 보여줄 수 있을까만 생각해요."

 '책은 무언의 물체가 아니다. 책 속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어렸을 땐 커다랗게 높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상상했다. 나무 속에는 어떤 생명들이 자라고 있을까. 나란히 꽂힌 저 책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나는 책을 숨쉬는 하나의 생명이라 생각하고 책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관해 상상했다. 나무 등걸의 형상으로 향이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수제 종이 작업 후 책 속에도 나이테가 자라고 있지 않을까. 나이테가 마치 태아가 자라는 것처럼 크고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이들이 삶을 달관해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돈을 벗어나 자아실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 대부분 손으로 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 넓은 생각의 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생각을 하고 사유를 하고 있다. 그들은 철학자다. 플라톤이나 칸트, 데카르트, 라깡 아마 이름도 못들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이론을 한톨도 모르더라도 그들 각각은 이미 철학자다. 철학자는 철학의 역사를 알고 있고,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가진 사람만이 철학자가 아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사유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그들 자신이 이미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누구로부터 그런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법정스님에게 '무소유'라고 배웠던 것일까. 도에 이른 스님처럼 삶을 달관한 그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현실적인 걱정도 든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 자체는 그 자체로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작업이며, 나중에 그들이 무엇을 하든, 무엇이 되든 간에 그들의 삶의 토양을 가꾸는데 일조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마음껏 즐겨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들이여. 그리고 이곳 놀이터로 모여라. 함께 즐기자.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5-12-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귀차니즘 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다가 이제서야 올렸어요. 읽은지는 오래됐는데

BRINY 2005-12-2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여러분들께서 계속 리뷰를 올려대시면 사고 싶어지잖아요~

마늘빵 2005-12-2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부추기는건지도 몰라요. 짜고서.

히피드림~ 2005-12-2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기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 일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랐을때 돈도 함께 따라오는 건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몇 안되는 거 같죠? 그래두 전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왠지 부럽네요.^^

마늘빵 2005-12-22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러게요. 좋아하는 일 하다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돈 버는 거(박지성, 이영표) 그게 제일 좋은거 같아요. 너무 젊었을 때부터 돈돈 하다가는 평생 돈의 노예로 살기 딱.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장바구니담기


"한참 후에야 나는 알았다. 그가 얼마나 소심하고 부끄러워 했는지를.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남자들은 모두 충동적이고 저돌적이며 막무가내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그와 같은 남자들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는 내가 아는 어떤 남자들보다도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를..."-147쪽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다. 행복했다고 느껴지는 기억의 빈 공간이 있긴 했지만. 정작 그 공간을 채우려 들면 어느 하나 거기에 맞는 게 없었다. 그것이 정말로 내가 체험한 사실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 빈 공간은 여전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259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달 2005-12-20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어도 한참 늦었삼. 1월이 다 되어가는 이 마당에 끙 -_ -

마늘빵 2005-12-20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왜 아침부터 시비삼. 내 마음은 11월이라오. ㅋㅋㅋ 머해? 심심하지? 나랑 놀자.

진/우맘 2006-08-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59p 밑줄긋기를 하고 내려와보니, 역시나, 미리 밑줄이 그어져 있네요.
 

  일본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은 <이웃집 토토로>가 극장에 걸리던 2001년 여름, 아무도 극장에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나 2001년에 개봉된 것이지 일본에선 그보다 한참 전에 개봉됐었기 때문에 해적판으로 나돌아 다니는 씨디를 구워다가 아니면 재주껏 인터넷에서 다운받아다가 봤을 터. 나 같이 인터넷 어디서 영화를 다운받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모르는 작자들이나 <토토로>를 극장에서 봤을 것이다.

  내가 엠피쓰리를 안듣고, 영화를 다운받아 보지 않는 것은, 음악과 영화 저작권에 대한 존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차니즘과 무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난 그 흔한 엠피쓰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 사실 지하철 홍대역 화장실에서 엠피쓰리 하나를 올해 여름에 줍긴 했으나 아직까지 써먹지 않고 있다 -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그 노래가 들어있는 음반 전체가 흡족한 경우에 한해서 음반을 구입해서 듣는다. 내 컴퓨터에는 엠피쓰리 파일이 몇개 있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일요일에 나가는 밴드에서 하는 합주곡인 경우로 한정된다. 엠피쓰리가 없는 대신 엠디를 소장하고 있기에 그걸 실시간 녹음해서 가지고 다닌다. 흠. 그럼 뭐야. 저작권 침해는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잖은가. 귀차니즘과 무지에서 비롯된 이유도 있다고.

  사설이 길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하나인 <토토로>. 자연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노래하고 있다고 흔히 말해진다.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버지는 대학 연구원인데 어머니의 퇴원이 가까워지자 자연의 숲을 배경으로 한 시골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온다. 도토리 나무가 우거진 숲. 다 쓰러질 듯한 집을 구경하는 사츠키와 메이. 동그리! 동그리! 이건 우리말로 도토리다. 집안 저 위 계단에서 뭔가 떨어졌는데 보아하니 도토리다.

 언니 사츠키가 학교에 가고, 아빠는 서재에서 일하고, 메이는 혼자 소풍 나왔다. 어 근데 자그마하고 귀엽게 생긴 넘이 뭔가를 흘리고 간다. 뒤따라갔더니 웬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동굴이?! 그 안엔 커다란 곰탱이가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이힛. 툭툭. 건드린다. 아~~~~움. 하품한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바라보는 곰탱이. 넌 이름이 뭐니? 토~~~토~~~로. 아 니가 토토로구나?! 이렇게 메이와 토토로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 토토로와 메이의 첫 만남. 자고 있는 토토로의 콧등을 어루만지어라. 에취~!

  비가 엄청나게 오던 날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드리러 가는데 메이의 말을 믿지 않던 사츠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엄청 큰 곰탱이. 토토로. 비 맞는 토토로에게 우산을 건네 주니 토토로는 도토리 씨앗을 준다. 그리고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휑하니 사라졌다.



* 엄청 빠른 고양이 버스. 근데 고양이 다리가 몇 개냐? 너 고양이 맞냐? 사람들 눈엔 절대 안보인다. 그저 거센 바람만 느낄 수 있을 뿐.



* 버스정거장에서 비 맞는 사츠키와 메이, 토토로. 우산을 줬지만 토토로의 몸뚱이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지?

 영화 <이웃집 토토로>는 자연의 아름다움 풍경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의 눈 앞에 선사한다. 마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해질 것만 같다. 하이얀 백지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달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단한 것은 이렇게 아름답고 깔끔한 영상미와 함께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내용까지 어우러지기 때문일 터이다. 보통 에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돈 주고 보기는 왠지 아깝다. 하지만 그의 에니메이션은 결코 돈이 아깝지 않다. 그만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 만큼이나, 오히려 더 큰 만족감과 감동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화 속 토토로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메이처럼 토토로의 뱃살을 콕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커다란 토토로 인형을 사다가 잘 때 껴안고 자면 참 푸근하고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므흣.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12-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이 영화가 얼마나 오래전 영화이던지요.

마늘빵 2005-12-1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자요. 일본에선 엄청 오래됐고, 우리나라에서도 정식 개봉이 2001년 여름.
토토로 라는 말 넘 이뻐요. 동그리도 그렇고. 동그리~ 동그리~ (메이 말투)
근데 안자고 머하삼?

하이드 2005-12-1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원래 활동시간이지만, 아프락사스님이야 말로.
이거 80년대 영화였던걸로 기억나네요.
메가박스에서 개봉했을때 보러갔다가, 와글와글 애들 너무 많아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막 착해지고 싶은 영화음악이에요. ^^

마늘빵 2005-12-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러게요. 전 잘 시간인데 뭐하고 있는건지. 흠. 이제 오늘은 그만 쓸래요. 영화는 아직 네 개 더 남았고, 책도 다섯개 써야되는데. 이번 달 안으로만 써야지. 그때그때 보고 읽을 때 마다 쓰려고 하는데 자꾸 미루다가 감동의 여운이 한풀 꺾이고 쓰려니 힘들어요. 하이드님 원래 착해서 이런거 안봐도 되지 않아요? ㅋㅋ

panda78 2005-12-17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학교 때 일본 살다온 애가 비디오(당연 일어.. 내용은 몰랐음) 빌려줘서 그때 처음 보고, 그 뒤로 자막판 구해 보고 하여튼 십수번 봤는데
그래도 개봉했을 때 보러갔어요.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서.. ^^
DVD도 사려구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는 대충 다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토토로만큼 정이 가는 건 없는 듯 해요. ^^ 넘 좋아요, 토토로.
먼지벌레들도 넘 귀엽구.. ㅎㅎ

마늘빵 2005-12-1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 ^^ 저도 이거 몇번 더 봤어요. 비됴로도. 볼때마다 마음이 참 깨끗해져요. 제가 원래 마음이 때가 많아서 그런지. ㅡㅡ; 먼지벌레도 귀엽죠. ㅋㅋ 이 먼지 벌레가 나중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마솥 벌레로 둔갑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