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BMW를 타는 까닭은 무얼까. 사실 단순하다.

1. 빠르고 안전하다. (비교적)

2. 앉아서 책을 볼 수 있으며, 건강에도 좋다. (비교적)

3. 싸고, 스트레스도 덜 하다. (비교적)

4. 환경 오염도 덜 된다. (비교적)

그렇다. 앞으로도 당분간(적어도 최소한 5년간은, 그리고 최대한은 평생!) 나는 BMW만을 고집할 생각이다. 에릭 프롬이 언젠가 말했듯이, 자동차와 올림픽만 없어져도 세상은 참 살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서문에서 한 말인데, 정확하지는 않다.)

BUS, METRO, WALKING!

뭐 솔직 담백하게 말해서, 내가 BMW를 핵심 이유는, 자동차 살 돈도, 유지할 돈도 없고

그 돈 있으면 헌책방을 습격하겠다! ㅋ

(요즘 80년대 한창 나왔던 맑스주의 이론서 사는데, 한권에 3천원 정도면 해서, 지금까지 15만원어치정도 사 모았다. 80년대를 전공하거나, 30년대를 전공하려면 반드시 이 부분을 공부해야 한다. 정말 지난한 작업이지만, 80년대 일본 중역판이 어떻게 맑스를 오해하게 했고, 운동진영마다 어떠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나등, 80년대 '운동권'의 책읽기라는 제목의 연구는 정말 흥미진진할 것이다. 김영하의 '무협 학생운동'만큼이나!)

보니까 이 쪽도 꽤나 연구가 되어 있다. 학위논문으로는 30년대로 갈지, 80년대로 갈지, 순수 이론으로 더 파볼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공부나 할 때다. (지금은 공부 정말 할 시간 많은 보직인데, 조금 후면 빡센 곳으로 옮겨질 듯. 널널할 때 공부좀 해야 되는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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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2-2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 놀랬잖아요. -_- 어 그럴리가 없는데 이러면서 들어왔어요.

기인 2007-02-2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진짜 BMW타고 다니고 있어요! ㅋ 공익복 입으면 버스랑 지하철은 공짜래요~ walking은 당연히 공짜니 짱이죠. 근데 공익복 잘 안 입어요 -_-;;

가넷 2007-02-2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MW가 무슨 자동차 였나요?(--;) 그런건 전혀 몰라서..ㅋㅋ;

아, 공익복 입으면 다 공짜군요...ㅎㅎ; 전 지하철은 공짜로 타고 다니는데..

이잘코군 2007-02-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두분 지하철을 공짜로. -_- 3월에 차비 또 오른다던데. 쩝. 맨날 올려.

비로그인 2007-02-2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기인님 .. SM5를 타고다닌다는 아버지가 매우 자랑스럽다는 광고속에 아이가 이런 글을 좀 봤으면 좋겠네요.BMW(?)야 말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사실 환경만큼 중요한 것이 있나요?ㅎ

기인 2007-02-2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BMW가 자동차라니요? ㅋㅋ 제가 섭섭하죠
아프락사스님/ 저는 공익복 안 입기 투쟁하고 있어서 -_-; 지하철 돈내고 탑니다 ㅜㅠ 버스도 돈 냅니다 ㅠㅜ
테츠님/ 걸어서 하늘까지! 화석연료 줄이기! BMW타기 운동본부~ㅎ

antitheme 2007-02-2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MW 3,5,7 시리즈 중 어떤건가 궁금해서 들어왔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80년대 이론서라면 사실 87년 이후에 급격히 쏟아졌다가 90년대 초반에 많이 자취를 감췄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집사람이 몇번의 이사동안 다 처분해서 남아있는게 없어서 도와드리고픈 마음은 있는데 방법이 없군요...

기인 2007-02-26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itheme님/ 안녕하세요? ㅎ 뭐 박사논문 10년쯤 잡고 있습니다 ^^; 마음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저는 순수 BMW만 탑니다 ㅋ
 
 전출처 : 로쟈 >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뒷걸음질

윌리엄 도울링의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월인, 2000)의 서문 읽기이다. 원서는 <제임슨, 알튀세르, 마르크스(Jameson, Althusser, Marx)>(코넬대학교출판부, 1984)이고, '<정치적 무의식> 입문(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Unconscious)'이 부제이다. 국역본은 그 부제를 제목으로 삼았다. 원저는 147쪽의 '가벼운' 책인데, 번역본은 하드카바에다가 저자의 사진까지 (표지뿐만 아니라) 서장을 장식하고 있어서 좀 격에 맞지 않는다(우리 같은 경우 회갑논총이나 정년퇴임기념논총 등에나 그런 사진을 집어넣는다). 자신의 책도 아니고 제임슨 '입문서'에 그런 치장을 한 걸 알면 저자도 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독자로선 책값이 비싸지니까 유감스럽고).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이다."라고 서문의 첫문장이 시작할 때 내가 떠올리는 '주제 넘는 일'은 이러한 외형과 장정에 관련된 것이다. 말 그대로 '찍찍'읽어보고 치워야 할 입문서를 하드카바로 펴내는 것부터 불만스러운데, 번역이 그런 '하드함'을 전혀 받쳐주지 못하기에 더더욱 유감스러운 것이 이 <서설>이다. 과연 저자가 원하는 바대로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책을 읽는다는 게 단지 '뒷걸음질'에 불과한 건지 이 '서문'에 대한 브리핑을 읽고 판단해보시길(보통 서문은 '곁다리텍스트'에서 다루지만 제대로 된 서문이 아니어서 '브리핑'에 집어넣는다. '곁다리텍스트'도 격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먼저 책의 용도와 의의에 대해서 규정한다. 이게 연구서나 비평서도 아니고 당대 마르크스주의 비평 혹은 거기서 제임슨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고찰도 아니라는 것. "다만 이 글은 <정치적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익히 들어왔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단순히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에 관해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를 시도하려는 것일 뿐이다."(17쪽)

책은 그러니까 <정치적 무의식>에 대해서 '지끔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그럼에도 내가 읽은 도울링의 문체는 만연체여서 제임슨만큼이나 읽기 뻑뻑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한국어 독자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아직 <정치적 무의식>조차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해서 <서설>이 먼저 나오는 상황 자체는 코믹하다). <정치적 무의식>?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다. '태생적으로'는 'seminally'의 번역인데, 직역하는 '씨눈이 될 만한'이란 뜻이다. 풍부한 열매를 거기서 기대할 수 있다는.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the very demanding argument'의 번역인데, 여기서 'demanding'의 사전적 의미는 '벅찬'이란 뜻이다. 제임슨의 논의를 압축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일이 저자의 능력에 비해 벅찬 일일 수 있다는 겸양의 표현으로 읽힌다. 물론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오역이 아니며 사실에 부합한다. 실제로 이 번역서를 완독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왜 이런 류의 '안내서'(introduction)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복잡한 이유는 아니다. 아주 중요한 책이지만 그만큼 난해한 책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왜 중요한가? "실로, 이 책은 서로 다른 다음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 발생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은 "Indeed, the book could claim a seminal importance on either of two separate grounds:"

번역문은 우리말로도 비논리적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근거에서 각각 '배아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란 뜻이다. 그 두 가지 입장/근거란 무엇인가?

"그 두 가지 입장이란, 알튀세르 저작으로부터 비롯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부활을 영어로 된 문화적 연구물들에 확대하고자 한 최초의 지속적 시도로서, 그리고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이 경쟁적으로 전개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독창적이고 강력한 시도로서의 입장 그것이다."

요컨대 (1)알튀세르적 마르크수즈의를 영어권 문화연구로 확장시키고자 한 시도로서, (2)데리다와 푸코, 들뢰즈 등의 경쟁적인 프로그램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섭하고자 한 시도로서 <정치적 무의식>은 의의를 갖는다는 것. 거기에 "지금까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필적할 만한 사람으로서 영어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제임슨이 유일하다."(18쪽)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워낙의 그의 책들이 난해하기 때문에("최근 그의 사상은 계속해서더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더욱 우회적이고 압축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제임슨이 어렵다는 단순한 사실, 혹은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평이한 영어로 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이 데리다와 라캉 같은 저술가들의 난해함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격분케 할는지 모른다. 그러한 저술가들에 대하여 항상 질문받게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말할 수 없는가?"(19쪽) 

그러니까 데리다나 라캉의 난해함도 부족해서 제임슨까지 머리 아프게 하느냐란 불평이 나올 만하다는 것. "왜 그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버럭) 거기에 한술 더 뜨는 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평이한 한국어'로 옮겨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원문은 이렇다: "Why, to ask the question that always gets asked about such writers, can't he just come out and say what he means?"(10쪽)

번역문은 'to ask-'하는 삽입문을 목적을 가리키는 부정사구문으로, '질문(question)'를 '문제'로 오독함으로써 혼란을 자초했다. 다시 옮기면, "데리다나 라캉 같은 저자들에게 항상 던져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묻자면, 제임슨은 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는 "데리다가 여기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고 친구들이 물었을 때 설명하고자 애를 쓰면서 느꼈던 피로감을 되새기면서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의미에 대한 허위이론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고 있었던 바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제임슨은 그 점을 직접 말하지 않았으며, 그리고...(이것들이 우리가 느꼈던 좌절이다.)"

그 '좌절감'을 그대로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번역문은 정서적인 '직역'에 가깝다. 마지막 문장의 주어가 '제임슨'이 아니라 '데리다'란 사실만 빼면. 원문은 이렇다: "What Derrida was saying, I later realized, was that wou can come right out and say what you mean only if you've got a false theory of meanng, but even so, he never said that directly, and...(There are the frustrations one felt.)"(11쪽) 그리고 다시 옮기면, "내가 나중에 깨달은 바이지만,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의미에 대한 잘못된 이론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실상 데리다는 결코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며, 게다가...(이런 것이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것인가? "<그라마톨로지> 그리고 <정치적 무의식>에 똑같이 제기된 문제는 다름 아닌 법규로서의 문체 문제이다: 알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을 말해줄tells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shows 하는 글쓰기 방식." 여기서 '법규로서의 문체'는 'style as enactment'의 번역인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문구에서 'enactment'는 '법규'가 아니라 '연기(演技)' 혹은 '공연'이란 뜻이다. 메시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 한다는 게 그런 '연기로서의 문체'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는 데리다의 경우 지시적/도구적 언어관에 근거하고 있는 '단순명쾌하게 말하기'에 대한 회의/의문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제임슨에게 있어서 법규(*연기)로서의 문체 문제는 이론과 실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 평이한 문체는, 모든 진실들이 미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불분명해야 할 어떤 필요성도 없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투명한 문체이다."(20쪽) 곧 '평이한 문체'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것. 

"어떤 책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이루어내는 진보에는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많다고 제임슨 박사가 말했다. 그는 소설이나 미스터리 이야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지적 산문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에 관해서 18세기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변증법적 충격에 의해 제임슨이 의도하는 바에는 그러한 종류의 고통, 즉 어떤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 우리 모두가 느꼈던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21쪽)

'그러한 종류의 고통(that sort of pain)'에서 'that'이 강조돼 있어서(번역문에는 누락돼 있어서) 굵게 처리했다. 한데, 이런 번역문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에 느끼는 고통과 무관하다. '존슨 박사(Doctor Johnson)'가 난데없이 '제임슨 박사'로 오기돼 있어서 겪는 어리둥절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존슨 박사'란 별명으로도 흔히 불리는 이는 영문학의 거장 새뮤얼 존슨(1709-1783)이다(국내에는 그의 풍자적 산문집 <라셀라스>(민음사, 2005)가 번역돼 있다. 번역/소개된 걸로 치면 '거장'이란 말이 무색하군).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1709년 영국의 중부 지방인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의 펨브루크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중퇴했다. 1737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고 <산사의 잡지>에 의회 기사를 써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잡지 <산책자>를 냈다. 풍자시 '런던', '욕망의 공허', 비극 <아이린> 등을 발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1747년 방대한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영어사전>을 혼자 힘으로 팔 년 만에 완성시켜 사전편찬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문학상의 업적을 인정받아 이후 '존슨 박사(Dr. Johnson)'라 불렸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해인 1759년 <라셀라스>를 집필하고, 1765년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의 편찬을 완성하여 출간했다. 이후 십여 년간 정치 논설문 등을 발표했다. 만년에는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하여 열 권의 <영국 시인전>을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1784년 런던에서 숨을 거두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1979년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제임스 보즈웰은 그의 전기를 출판했다. 저술뿐 아니라 재치 있는 논객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로,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지난 천 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저자로 선정하였다."

이 만한 인물을 '제임슨 박사'로 오기하는 건 무성의의 소치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불유쾌한 고통과 달리 제임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고통은 보다 고차적이다.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또 한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유일한 탈출구가 정치적-사회적 혁명에 있을 뿐인 하나의 악몽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 역시 제임슨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는 대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같은 안내서가 그 효과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렇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변증법적 충격은 해석을 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다." 원문은 "dialectical shock is, as Robert Frost said of poetry, what is lost in translation." 프로스트는 물론 '가지 않은 길'의 시인 프로스트를 말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란 번역하면 잃어버리는 것"이란 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그러니까 '해석'이 아니다. 왜 임의로 번역하는가?). 도울링이 얘기하는 것은 만약 읽기 어려운 제임슨을 읽기 편하게 옮겨놓으면 고통이 경감되는 만큼 그 효과도 상실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저자의 당부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이 안내서를 통해서 <정치적 무의식>에 다가온 독자는 보다 어려운 제임슨의 논의를 있는 그대로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곧, 이 <서설>을 읽고 나서, 혹은 이 <서설>과 함께 반드시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야 한다는 것. 결코 안내서가 원저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읽는 것은 원저에 대한 배반이 될 것이다. 배신, 배반...  

이제까지 읽은 것은 8쪽 짜리 서문의 절반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뒤뚱거리면서 나머지 절반쯤을 더 읽어가야 '서문'을 다 읽게 된다. 그런 수고를 감내할 용의는 있지만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어서 '브리핑'은 이만 줄인다. 책을 덮으려다가 잠시 훑어본 '옮긴이 해설'(저자 서문보다도 앞에 위치해 있다).

"여러 문헌의 도움을 받아 도울링의 저술 의도에 부합하는 번역이 되고자 했으나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역자에게도 이 번역은 'demanding work'였던 것.

"이 번역서를 읽을 때, 문맥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짜증스러움을 누구나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번역의 난삽함도 난삽함이지만 당혹스러울 정도의 (:)과 (;)의 사용은 독서의 매끄러움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다." -->역자는 '귀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본 의도를 살리기 위해 특별히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원문의 문맥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곳곳에 산재하고 있을 오역은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며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으로 꾸준히 바로잡아 걸 것을 약속한다." -->2000년 가을에 책이 나왔지만 그간에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짐작엔 이 책을 구입한 사람도 드물겠지만 완독한 사람은 아예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치적 무의식>을 완독한다면 모를까). 아직 초판도 다 나가지 않은 듯하니 '꾸준히 바로잡는' 일은 언제 가능할는지...

07.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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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라 > 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위한 실험적 공동세미나 첫 시작

참세상에서 퍼옵니다.

 

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위한 실험적 공동세미나 첫 시작 
 
 '문학과 경제', '마르크스 경제학' 등 6개월 과정 
  
 
 조수빈 기자  / 2007년02월23일 14시29분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유기적 지식인과 실천가 양성을 위한' 사회과학대학원이 오세철 연세대 교수, 강내희 중앙대 교수,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40여명의 좌파 교수 및 연구자들의 주도로 설립 추진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선언' 넘어선다


가칭 사회과학대학원 추진위원회 준비모임(추진위준비모임)은 "한국사회가 무차별적인 시장논리와 효율성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에 휩쓸리고, 대학이 신자유주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실천과 연관된 유기적 지식인의 양성을 위해 보다 계획적인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추진을 준비하고 있다"고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좌파교수, 연구자들의 대안적인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추진 모색은 지난해 대학교수들의 '인문학의 위기선언'을 넘어선다"고 밝혔다.


언급된 '인문학의 위기선언'은 지난해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들이 "무차별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근거가 위협받고 있다"며 '인문학 위기를 선언하면서 공론화된 내용이다.


추진위준비모임은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을 위해 이미 공청회와 3차례 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추진위준비모임은 지난 공청회와 토론회에 이어 오는 3월 12일 추진위준비모임과 사회실천연구소가 공동 주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어, 분과학문의 체계를 뛰어넘는 사회과학대학원 교과과정 수립'을 위한 첫번째 세미나를 시작한다.


이번 공동세미나는 사회과학대학원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문학과 경제',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주의노동과정', '욕망과 혁명', '역사와 혁명'을 주제로 6개월간 실험적인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한다.


한편 2005년 10월 오세철 교수, 강내희 교수, 김세균 교수 등 교수 및 연구자 8인은 '가칭 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취지 제안문'을 통해 "현 시기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사회과학 대학원의 설립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의 건설이 시급하다"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과 대학원이 모두 요구되고 있으나 대중교육을 넘어서 변혁적 연구자와 전문가를 양성할 대학원부터 건설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대학의 경우는 대학원 설립 이후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리고 실천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단기 프로그램과 단기 교육과정에 대한 평가와 재편을 바탕으로 2단계 계획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중장기 계획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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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저에게 웃음을 주신 김성모 작가님이십니다. 티셔츠에 그를 상징하는 '근성'이 써있군요 ㅎㅎ




곰이 꽤애액?



꾸와앙...........................



언행의 불일치....................






하지 말랜다.......................ㅋㅋ



도대체 어디가..................................

 



됀된다..................................

 



불손한 안내판........................



미칠듯한 스피드..............ㅋㅋㅋㅋ



똥과 당당함.....................................

 



괜히 반문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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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23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먹기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돈은 많이 잡히는 모양이더라구요. -_-;

비로그인 2007-02-2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 똥사느라 늦었어" 이런 반박할 수 없는 말도 드물것입니다. ㅋㅋ

기인 2007-02-2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ㅋ 이거 정말 전체를 보면 욕나오는데, 이렇게 부분부분 보면 정말 웃기네요.
테츠님/ ㅋㅋ 미안하다는데, 그것도 똥 싸느냐고 늦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물론 '똥 사느냐'늦었다고 하면 또 무슨 말이야 하겠지요. ㅋ

yoonta 2007-02-2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根性있게 생기신 분이네요..작품도 그렇고..ㅋㅋㅋ

기인 2007-02-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 이거 만화방 가서 문득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전출처 : 로쟈 > 도올 딜레마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올 김용옥의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가 이런저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시끄러운 건 개신교계(한국기독교총연합회)인데 동아일보와 한겨레에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에 실린 김경재 교수의 인터뷰기사는 읽어볼 만하다(일단 '동네 개가 짓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동아일보(07. 02. 22) 개신교계 '도올 딜레마'

도올 김용옥(사진) 세명대 석좌교수의 EBS 외국어학습 사이트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를 둘러싸고 개신교계가 고민에 빠졌다. 강력히 대응하기도 그렇고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개신교계는 표면적으로 ‘무대응’ 방침을 밝히면서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강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반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김 교수는 이번 강의에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가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애급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라며 구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약의 모세를 믿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해서도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 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 보라. 한 대가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0일 “김 교수의 가치 없는 주장에 일일이 답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도올은 실력 있는 철학자지만 철학자가 자기 영역을 벗어나 신학을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회장은 “예컨대 모세를 주몽과 비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한기총 총무 최희범 목사도 “도올의 강의는 교회를 훼손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음모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김 교수의 강의 자체를 무시하는 분위기다. 김 교수의 성경 해석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긁어 부스럼이라는 속내로 보인다.

예장통합 사무총장 조성기 목사는 “설득력 없는 한 개인의 해프닝에 반응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 교수의 성경 해석이 어디에 근거를 뒀는지 모르겠다”며 “김 교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해석이 기발한 착상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공감하기 어려운 기행일 뿐”이라고 말했다. KNCC 총무 권오성 목사는 “동네 개가 짖는다고 ‘왜 그러느냐’고 물을 필요가 있는가”라며 “터무니없는 내용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어느 동네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올이 '개' 수준이라면 최고 석학의 할애비들만 모여사는 동네인 듯하다). 그는 “김 교수의 말 한마디 때문에 2000년 역사 속에서 고백해 내려온 교회의 진리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윤완준 기자)

한겨레(07. 02. 22) 교계 정치참여는 강자에 동조하는 것 구약폐기론은 잘못”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계의 대표적 지성인 김경재(67)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 21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논쟁에 대해 입을 열었다. 최근의 논쟁은 김 교수가 〈교육방송〉 인터넷 요한복음 강의와 〈한겨레〉 인터뷰 등을 통해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비판하고, 성서적으로는 구약 폐기를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이에 한기총은 “교회 매도 음모”라며 도올의 주장을 맞받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경계하되, 최근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하나님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올이 제기한 구약 폐기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보수 기독교계가 시시콜콜한 것을 시비삼지 말고, 큰 틀에서 한국 기독교의 생명력을 살려 한국 기독교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거듭나게 하려는 (도올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개방적 성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고 “현재의 모습을 고수하겠다면 결국 한국 기독교도 죽고, 한민족도 불행해지고,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문일답이다.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구약폐기론 반대이유
김경재 교수는 “어떤 맥락인지 들어봐야 하겠지만 구약을 폐기하라고 했다면 이는 잘못”이라며 도올의 구약폐기론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리스철학에 뿌리를 둔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이 만나면서 신약의 정신세계가 형성됐는데,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 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예수 이후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도 히브리사람이긴 하지만 헬레니즘적 배경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아 용어와 내용에 두 요소가 함께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는 “구약을 빼면 율법주의에선 자유로울지 몰라도 기독교답게 하는 (헤브라이즘) 정신이 약해져버린다”고 경계했다. 그는 또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라고 했다. 또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그 뿌리를 제거해버리면 기독교가 천박해진다”고 주장했다.

김경재 교수가 본 도올
김경재 명예교수는 김재준·함석헌·서남동·문익환·안병무·강원용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가르쳤던 한신대에서 신학대학원장과 학술원장을 지냈고, 강원용 목사에 이어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도 맡았다. 상당수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이성보다는 감정을 드러내 도올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달리 김 교수는 도올에 대해 “물건!”이라며 웃었다. 한신대 재직 시절 후배들의 총장 추대를 거절한 채 기숙사 사감을 자처해 정년을 맞은 뒤 서울 신촌 이화여대 후문 ‘김옥길 기념관’ 지하의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매주 일요일 소박한 목회를 하기도 하는 그다운 ‘폭’이었다.

김 교수는 특히 도올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더구나 그의 집안이 속한 예수교장로회의 중도 및 중도 우파적 사상 계보로 볼 때 도올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노자와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서양철학 등을 섭렵한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한 것을 보고 놀랐다”며 “기독교에선 어떤 교리를 믿어야 정통이 아니라, 그런 신앙을 ‘정통’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에서 도올만큼 ‘준비된 지성’도 흔치 않다”며 “서양 선교사들의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맥이 도올에까지 가 닿았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루터와 칼뱅도 성서 해석을 바로 함으로써 새로운 기독교를 열었다”며 도올이 한국 기독교의 루터와 칼뱅이 될 수 있다고 점쳤다.

그러면서 그는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자신의 독특한 신관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성서와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어느 한 집단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전 세계,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던 한반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조연현 기자)

07.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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