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진 ㅋ

흠.. 어딜보고 있는건지.. 꼬마신랑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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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9-02-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 제가 하긴 좀 그렇지만 귀여우십니다 ㅎㅎ

Mephistopheles 2009-02-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이제 푸릇푸릇한 총각 하나가 유부남이 되는군요...^^

기인 2009-02-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ㅎㅎ 감사감사 ^^;
메피님 ㅋ 결혼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릴께요 ㅎㅎ

마늘빵 2009-02-2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아. 축하해요. 결혼하셨군요! ^^

2009-02-2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2-21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축하합니다~~ 기인님 멋져요^^

기인 2009-02-2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결혼은 4월이고 결혼사진만 찍었어요 ㅋㅋ
우주돌이님 반갑습니다 ㅎㅎ 뭐 유령즐찾 할만한 내용도 없는데요 뭐 ^^;
진짜, 역시 대학때로 돌아가야하겠어요 ^^a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2
박동천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에 출간된 책만 아니었으면, 별 다섯개를 줄만한 책이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판이기 때문에 내용이 소략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독자들에게 왜 '선거제도'가 '정치적 상상력'을 넓히는 것과 연관되고, 대중의 뜻을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선거제도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내용의 80%정도는 여러 선거제도와 실제로 이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의 사례들을 소개하는 것인데, 정말 다양한 선거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의지를 가장 섬세하게 반영할 수 있는가의 연구끝에 도출된 제도들인데, 예를 들면 '선호대체투표제'나 '명부식 비례대표제'같은 것들은 투표자들의 제일 마음에 드는(?) 한명만 뽑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매기고, 그 순서가 투표에 반영된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실행되고 있다. 사실 내심 여러 나라의 '선거제도'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게 넓혀질 여지가 있을까 하고 의심하면서 읽게 되었지만, 읽으면서 꽤나 구체적으로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도 흥미롭지만, 뒤에 첨부된 '더 읽어야 할 자료들'도 해당분야 초심자들을 위해 번역의 질이나 참고문헌에 관한 소개도 충실히 되어 있다. 

사실 책이 나온지 9년째 되었고, 그 중에 17대 총선에서 투표제도의 변화도 있었고(지은이가 제안했던 투표제도 중 하나인 지역구와 정당에 따로 투표하여 정당에 비례대표를 할당하는 방법) 대통령 선거도 한번 있었으니만큼,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 9년동안 일신될 참고문헌 목록도 기대되고 말이다. 

이 책을 계기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를 다시보게 되었다. 이런책들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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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주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무시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주무시는 것이지만, 특수한 잠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한 달째, 어머니는 매일 팔다리를 마사지 해주시고 계셨다. 팔다리를 주무를 때면,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몸을 뒤틀고 싫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될 것 같았다. 이쪽과 저쪽이 가늘게 할아버지 몸의 들숨과 날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저쪽으로 가셨는데, 몸은 이쪽에 남아있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어딘가에 있었다.

지금 나에게도 할아버지가 있다. 금방이라도 다시 서울에 올라오셔서, 스탠드 불빛에 책을 읽으실 것 같다. 아니면 창원에 내려가면 그 곳에 할아버지가 계실 것 같다. 할아버지 안에서 끊임없이 풀어져 나오던 이야기들. 소년시절 이야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 그 후의 당신의 삶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풀어져 나왔었다. 그것이 내 안에 어딘가에 엉켜있다가, 가끔은 풀어져 떠오른다.

나는 죽음의 의미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처음 안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와는 다르다.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아간다는 것 또는 죽어간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그만큼 나에게 할아버지란 존재는 컸던 것인지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한 것 같다. 덧없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아직도 그 때가 생생하다. 이쪽과 저쪽이 나뉘어 있는데, 이쪽과 저쪽이 육화되어 경계로서 현존하는 것 같았던 의식불명의 할아버지 모습. 나는 아마, 살아가면서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몇명 이렇게 보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잘 해드릴껄, 조금 더 이야기를 많이 해 볼 껄'같은 생각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이별하는 구나, 조금씩 지쳐가기도 하고, 조금씩 그리워지기도 하다가, 어느순간 떠나는 것. 남겨진 사람은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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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살펴본 일본 문화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80
스즈키 다카오 지음, 이길원 옮김 / 소화 / 200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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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 즉 번역본을 읽은 것은 아니고 일어로 된 책을 읽었으니, 번역본에 대한 본격적 '리뷰'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본, 鈴木孝夫, <<ことばと文化>>, 岩波新書, 1973 (2007 인쇄본)는, 일본어 중급 이상의 실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한번 꼭 읽어볼만하다. 

일본에서 가족관계 상에서 왜 자신을 자신의 아이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아빠' '엄마'라고 지칭하는 지의 이유를 인도-유럽어와 다른 일본어의 문화적 의미를 밝히고 있어서, 일본어'다움'을 이해하기 좋다. 영어에서 말하는 'I' 일본어의 私(わたし)는 똑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영어의 체계와 일본어의 체계 속에서 보았을 때,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영어에서는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I'라고 하고, 그 이후의 타자인 'you'라는 개념이 도출된다면, 일어에서는 우선 나와 대화하는 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私、わたくし、ぼく、おれ 등을 쓰기 때문에 전혀 순서가 반대이다. 또 이는 '나'를 지칭하는 것보다, 나와 상대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아빠' '엄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부'라는 평등적 계약적 관계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에 의해서 규정되는 가족 체계 속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현인 '아빠' '엄마'라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는 부분도, 이 '대상의존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까지(1970년초) 서구 언어학을 직접적으로 이입하려는 사고방식 때문에 일본어의 특수성을 못 드러내었다고 비판하며, 일본어 연구는 일본어라는 체계 속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학문연구에서도 유심히 경청해서 잊으면 안되는 부분이다. 이는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연구에서는 이를 '잊은 듯'한 모습들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미에 밝히듯이,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최대한 글을 쉽게 썼기 때문에 읽기도 쉽다. 2007년에 65쇄이고, 30대중후반 된 일본 사람들은 대학입시때 이 책을 꼭 봤어야만 했다고 하니까, 교양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어 중급 이상인 분들, 일본어의 특수한 지점과 이것이 일본 문화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한 분들이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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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02-1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 책도 읽어봐야 겠네요. 위 책에서는 한국어와 비교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아쉬웠었어요. 한국어와 일본어와 비교하면 참 흥미로울 것 같은 논의들인데, 일본어의 대타로서 인도-유럽어만 비교해서 아쉬웠어요. 스펙트럼 상에서 한국어까지 위치시키면 조금 더 입체적으로 흥미로워 질 것 같은데 말이죠. ^^
감사합니다. 그 책도 주문해야겠네요 ㅎㅎ
 

본격적 영국사회/문화에 대한 논의인 2부를 읽기 시작했다. 2부는 칼럼같이 읽혀지는데, 흥미로운 논의들이 보인다.  

1장 '교육과 영국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는 지금 한국교육을 되돌아보는데도 도움이 된다.  

영국 교육의 역사를 중세시기부터 당대(1960)에 이르기까지 되짚으면서 19세기에 드러 교육제도/내용이 변화한 것은 '교육을 요구하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발흥과 경제에 대한 확장되고 변화된 요구'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착이 되면서,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교육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산업혁명 이래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미래의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을 위한 직업학교식의 요청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회적 성격인 '규칙적인 습관, '자기절제', 복종 훈련받은 노력'을 가르치게 되었다. 

최근에 '대학나와서 뭐해, 취직도 안 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딱히 반론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왠지 반발심이 드는 이야기였는데, 대학=취직을 위한 직업학교라는 전제가 그러했다. 위 글을 읽다보면, '대학'이라는 교육이 적어도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양성 교육의 일환으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올바른 정치적 판단과 대중 문화/예술의 비평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나중에 윌리엄스가 더 논의하겠지만, 이것이 중고등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든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대 '대중교육'이 나뉘어졌는데, '모든 인간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그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의 여부는 이러한 원칙을 정부가 스스로의 의무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전문화된 일을 훈련받는 것 이상의 교육, '교양의' '인문적인' 혹은 '문화적인'이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교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가 주장하는 교육의 원칙은 '교육받고 참여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기준'이다. 이에 맞추어 실질적인 커리큘럼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한다.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중요한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책임이 국민 전체로 옮겨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교육에서 중심적이고 불가피한 중요성을 지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새겨둘만하다.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대중문화 속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단지 다양한 등급의 직업을 준비하는 교육을 유지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며 의도적으로 표현한 가치관이고, 도전하고 변화하는 주체의 표현이다." (237)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교육 시스템이 대다수 사람들을 참여 민주주의와 대중의 지지에 기초한 예술에 필요한 일반적인 지식과 교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결코 적절한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없다." (238)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는 모든 정상적인 아동의 최소한의 목표'를 제시한다. 

(a) 영어와 수학의 기본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습 

(b) 우리와 환경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이는 별개의 과목으로 중등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등 단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이끌어온 일반적인 지식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그 분야는 다음과 같다.   

    (i) 생물학, 심리학 

    (ii) 사회사, 법과 정치 제도, 사회학, 경제학, 실제의 산업과 교육을 포함한 지리학 

    (iii) 물리학과 화학 

(c) 역사, 문학, 시각예술, 음악, 연극, 조경과 건축에 대한 비평 

(d) 회의와 협상, 민주적 조직에서 리더를 선출하고 운용하는 일을 포함한 민주적 과정에 대한 폭넓은 실습. 도서관,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다른 정보, 의견, 영향력의 원천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폭넓은 실습 

(e) 부분적으로는 방문과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주어지는 언어와 역사, 지리, 제도와 예술을 포함하여 최소한 한 가지 다른 문화에 대한 입문 (239) 

학교 선생님들의 제도적 업무를 줄이고, 방학 중에 선생님들의 자기계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 학급당 아이들 수, 선생님들의 투자할 수 있는 시간/역량 때문에, 10여년전의 한국의 중등/고등학교 수업은 정말 유의미한 감동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윌리엄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을 동반한 산업과 서비스의 미덕을 설파하기만 하고 기존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놓아두기만 해도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생각이다. 위에서 내가 제안한 내용들을 유토피아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느냐, 혹은 도전받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을 힘들에 의해 고착된 소수의 지배계급과 중간의 전문가계급, 그리고 다수의 노동계급에 기초한 사회적, 교육적 패턴을 계속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세습되는 형태의 특권과 장벽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대체할 것이냐, 아니면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으로 대체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241)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이라는 표어가 좋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되돌아보면,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겠다고 하는 것만 떠오르지, 우리가 어떻게 '민주주의 시민'이 되는 자질을 기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전자는 '국가와 민족'을 '천황'이나 '왕'으로 바꾸면, 딱 '신민됨의 자세'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혁이든, 힘들고 저항도 만만치 않다. '교육의 교과과정이란 선택되어 계승된 이해관계와 새로운 이해관계의 강조 사이의 타협을 나타낸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는 개혁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만이 유일한 길일까. 

윌리엄스의 논의는, 매우 긴 칼럼같은데, 칼럼 대로의 맛이 있다. 논의의 한계라면, 역시 담론 내부에 한정되지 않은 현실의 역학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내지는 현실화하기 위한 돌파구나 전선은 어디인가라는 부분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논의와 대비하며 읽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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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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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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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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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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