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주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무시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주무시는 것이지만, 특수한 잠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한 달째, 어머니는 매일 팔다리를 마사지 해주시고 계셨다. 팔다리를 주무를 때면,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몸을 뒤틀고 싫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될 것 같았다. 이쪽과 저쪽이 가늘게 할아버지 몸의 들숨과 날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저쪽으로 가셨는데, 몸은 이쪽에 남아있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어딘가에 있었다.

지금 나에게도 할아버지가 있다. 금방이라도 다시 서울에 올라오셔서, 스탠드 불빛에 책을 읽으실 것 같다. 아니면 창원에 내려가면 그 곳에 할아버지가 계실 것 같다. 할아버지 안에서 끊임없이 풀어져 나오던 이야기들. 소년시절 이야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 그 후의 당신의 삶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풀어져 나왔었다. 그것이 내 안에 어딘가에 엉켜있다가, 가끔은 풀어져 떠오른다.

나는 죽음의 의미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처음 안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와는 다르다.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아간다는 것 또는 죽어간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그만큼 나에게 할아버지란 존재는 컸던 것인지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한 것 같다. 덧없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아직도 그 때가 생생하다. 이쪽과 저쪽이 나뉘어 있는데, 이쪽과 저쪽이 육화되어 경계로서 현존하는 것 같았던 의식불명의 할아버지 모습. 나는 아마, 살아가면서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몇명 이렇게 보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잘 해드릴껄, 조금 더 이야기를 많이 해 볼 껄'같은 생각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이별하는 구나, 조금씩 지쳐가기도 하고, 조금씩 그리워지기도 하다가, 어느순간 떠나는 것. 남겨진 사람은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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