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 영국사회/문화에 대한 논의인 2부를 읽기 시작했다. 2부는 칼럼같이 읽혀지는데, 흥미로운 논의들이 보인다.  

1장 '교육과 영국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는 지금 한국교육을 되돌아보는데도 도움이 된다.  

영국 교육의 역사를 중세시기부터 당대(1960)에 이르기까지 되짚으면서 19세기에 드러 교육제도/내용이 변화한 것은 '교육을 요구하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발흥과 경제에 대한 확장되고 변화된 요구'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착이 되면서,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교육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산업혁명 이래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미래의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을 위한 직업학교식의 요청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회적 성격인 '규칙적인 습관, '자기절제', 복종 훈련받은 노력'을 가르치게 되었다. 

최근에 '대학나와서 뭐해, 취직도 안 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딱히 반론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왠지 반발심이 드는 이야기였는데, 대학=취직을 위한 직업학교라는 전제가 그러했다. 위 글을 읽다보면, '대학'이라는 교육이 적어도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양성 교육의 일환으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올바른 정치적 판단과 대중 문화/예술의 비평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나중에 윌리엄스가 더 논의하겠지만, 이것이 중고등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든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대 '대중교육'이 나뉘어졌는데, '모든 인간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그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의 여부는 이러한 원칙을 정부가 스스로의 의무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전문화된 일을 훈련받는 것 이상의 교육, '교양의' '인문적인' 혹은 '문화적인'이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교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가 주장하는 교육의 원칙은 '교육받고 참여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기준'이다. 이에 맞추어 실질적인 커리큘럼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한다.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중요한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책임이 국민 전체로 옮겨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교육에서 중심적이고 불가피한 중요성을 지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새겨둘만하다.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대중문화 속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단지 다양한 등급의 직업을 준비하는 교육을 유지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며 의도적으로 표현한 가치관이고, 도전하고 변화하는 주체의 표현이다." (237)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교육 시스템이 대다수 사람들을 참여 민주주의와 대중의 지지에 기초한 예술에 필요한 일반적인 지식과 교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결코 적절한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없다." (238)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는 모든 정상적인 아동의 최소한의 목표'를 제시한다. 

(a) 영어와 수학의 기본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습 

(b) 우리와 환경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이는 별개의 과목으로 중등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등 단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이끌어온 일반적인 지식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그 분야는 다음과 같다.   

    (i) 생물학, 심리학 

    (ii) 사회사, 법과 정치 제도, 사회학, 경제학, 실제의 산업과 교육을 포함한 지리학 

    (iii) 물리학과 화학 

(c) 역사, 문학, 시각예술, 음악, 연극, 조경과 건축에 대한 비평 

(d) 회의와 협상, 민주적 조직에서 리더를 선출하고 운용하는 일을 포함한 민주적 과정에 대한 폭넓은 실습. 도서관,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다른 정보, 의견, 영향력의 원천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폭넓은 실습 

(e) 부분적으로는 방문과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주어지는 언어와 역사, 지리, 제도와 예술을 포함하여 최소한 한 가지 다른 문화에 대한 입문 (239) 

학교 선생님들의 제도적 업무를 줄이고, 방학 중에 선생님들의 자기계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 학급당 아이들 수, 선생님들의 투자할 수 있는 시간/역량 때문에, 10여년전의 한국의 중등/고등학교 수업은 정말 유의미한 감동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윌리엄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을 동반한 산업과 서비스의 미덕을 설파하기만 하고 기존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놓아두기만 해도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생각이다. 위에서 내가 제안한 내용들을 유토피아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느냐, 혹은 도전받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을 힘들에 의해 고착된 소수의 지배계급과 중간의 전문가계급, 그리고 다수의 노동계급에 기초한 사회적, 교육적 패턴을 계속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세습되는 형태의 특권과 장벽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대체할 것이냐, 아니면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으로 대체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241)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이라는 표어가 좋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되돌아보면,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겠다고 하는 것만 떠오르지, 우리가 어떻게 '민주주의 시민'이 되는 자질을 기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전자는 '국가와 민족'을 '천황'이나 '왕'으로 바꾸면, 딱 '신민됨의 자세'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혁이든, 힘들고 저항도 만만치 않다. '교육의 교과과정이란 선택되어 계승된 이해관계와 새로운 이해관계의 강조 사이의 타협을 나타낸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는 개혁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만이 유일한 길일까. 

윌리엄스의 논의는, 매우 긴 칼럼같은데, 칼럼 대로의 맛이 있다. 논의의 한계라면, 역시 담론 내부에 한정되지 않은 현실의 역학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내지는 현실화하기 위한 돌파구나 전선은 어디인가라는 부분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논의와 대비하며 읽어봐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2-12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3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