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lastmarx >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의 극복
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의 극복
  - 20년만에 새로 번역한 『경제학-철학 수고』 읽기

  1.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노트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80, 90년대엔 대학 근처에 한두 개씩 사회과학(전문)서점들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전문)출판사도 꽤 많았다. 이론과실천사를 그 가운데 대표적인 출판사로 기억한다. 당시 그 출판사는 ‘이론과 실천이 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관한 책들’이라며 『자본』 아홉 권을 필두로 『경제학-철학 수고』(1987)와 『경제학 노트』(1988) 등 글자가 작고 행간이 좁은 책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책들이야 맑스의 저작이나 노트들이지만 그밖에 문자 그대로 맑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진 이론서, 해설서들도 망라하고 있었다. 책 제목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사/미학사/미학원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2006년 말, 이론과실천사는 『경제학-철학 수고』(2006)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많은 극좌 교조주의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마르크스의 저작이기도 했다. 되돌아보라, 1932년이란 20세기 역사의 어느 즈음에 자리하고 있는가. 사회 정치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 스탈린주의가 극점에 달하여 몰락의 길을 재촉하던 때가 아닌가? 극좌 교조주의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이 책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으리라.” 맑스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이 출판사를 포함하여 지난날 사회과학출판사들에서 내놓던 책들이 ‘극좌 교조주의자’들의 공식 교과서들이었는지 그 가운데 일부만 ‘스탈린주의(맑스레닌주의)’였는지 돌아볼 일이다.

  『경제학 노트』에는 세 개의 글이 묶였는데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과 1857/58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문>이 나란히 실려있다. 역자 김호균은 2000년에 ‘요강’(백의) 전체를 3권으로 번역 출간한다. 이어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결과>라는 『자본』에 포함하려다 포함하지 않은 연구노트가 들어 있고 끝으로 『임금, 가격, 이윤』(1865) 이라는 강연 원고가 실렸다. 아무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을 음미하려는 출판사의 각오가 엿보이는 집요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경제학-철학 수고』는 매우 난감한 텍스트였다. ‘텍스트’,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그런 말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산당 선언』의 깔끔함과 달리 문체가 딱딱했다. 원래 맑스가 대부분의 글을 그렇게 쓴 까닭인지 한국어 최초 번역작업이라서 더욱 읽기 어렵게 된 것인지 당시에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박종철출판사) 1권에 실린 발췌본을 읽었을 때엔 훨씬 읽을 만 했다. 맑스의 모든 글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용도에 따라 달랐지만 하여간 원전 자체가 어렵고 거친 번역도 한몫했다. 그 텍스트는 맑스가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자기 이해를 위한 수고手稿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저작선집 맨 앞에 실린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을 함께 보면 청년시절 맑스의 문체가 난공불락의 스타일임은 분명하다.

  2.  20세기 초 『경제학-철학 수고』의 출간 이후

  1844년에 작성된 이 노트는 1932년에야 출간된다. 19세기 이 작업은 맑스가 철학 비판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넘어가는, 즉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정리였다. 훗날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요 텍스트들인 ‘요강’, ‘자본’, ‘잉여가치학설사’ 등으로 확대재생산 될 시초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에 수많은 맑스주의 학자들이 이 『경제학-철학 수고』를 주목하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다며 지적 소동을 벌이게 될 것을 결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맑스학과 맑스주의 연구사에서 『경제학-철학 수고』 만큼 중요하게 거론되는 작품도 많지 않다. 가령 알뛰세르는 『맑스를 위하여(1965)』(백의, 1996)에서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가르는데, 그는 1844년까지의 작품들을 ‘청년 맑스의 저작들’이라 규정하고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절단기의 저작들’로 분류하고 이후의 작품들을 가리켜 ‘성숙기의 저작들’과 ‘이론적 성숙기의 저작들’과 ‘완숙기의 저작들’이라 불렀다.

  알뛰세르는 “맑스가 『1844년의 초고』에서 헤겔로의 급작스럽고 총체적인 회귀 속에서, 포이어바흐와 헤겔의 이 천재적인 종합 속에서 … 가장 근본적인 ‘전복’의 시련 속에서 … 비상한 이론적 긴장 속에서” 이 노트가 작성된 것이라며 맑스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라 우선 칸트-피히테주의자였고 나중에는 포이어바흐주의자였다”고 설명한다. 이 노트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음미하고 대결하면서 알뛰세르는 『자본』을 새롭게 읽으려고 분투한다.

  게오르그 리히트하임 Georg Lichtheim은 『마르크스에서 헤겔로(1971)』(문학과지성사, 1987)에서 “인간학적 자연주의와 엥겔스 및 플레하노프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논리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라며 “맑스의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 변형된 것은 엥겔스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논리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면, 전체적 혼동의 이해가 가능하다. <맑스주의>는 응집적 세계관으로, 즉 먼저 독일 노동 운동을 위한 세계관으로, 그 다음엔 소비에트 인텔리겐차를 위한 세계관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인간학적 자연주의’ 또는 ‘자연적 인간주의’는 『경제학-철학 수고』에 나타나는 맑스의 유물론이다.

  리히트하임은 그 책의 <변증법의 새로운 왜곡>이란 글에서 “철학을 버릴 때 실증주의로 회귀함은 필연적이나, 구조주의는 콩트적 전통과 잘 조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맑스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구조주의는 현대 인류학 · 심리학 · 언어학의 명성에도 의존할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보았듯이, 맑스 자신은 시대에 앞선 구조주의자라는 주장까지도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관념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할 능력을 상실한 타락한 헤겔주의의 교정책으로서의 이러한 알뛰세르 사고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알뛰세르는 합리주의 모델을 역사 현실에 적용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낮게 평가한 것 같다. 역사의 논리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철학은 이 주제에 적합한 모델을 탐구해 왔다 ― 헤겔주의를 어마어마한 착오로만 생각하는 사상가는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한편, <역사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란 글에서 “1930년대에도 맑스의 『파리 초고』는 출간되었었다. 하지만, 후에 『자본』이 된 원고, 1857~58년의 『요강』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었다. 그런 까닭에 (호르크하이머의) 『비판 이론』은 『자본』의 저자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뛰어난 철학적 인간학을 구체화한 휴머니스트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칼 뢰비트는 『헤겔에서 니체에로(1939)』(민음사, 1985, 헤겔에서 니체로 2006)에서 “맑스는 노동의 분석을 현실적 생존 관계의 표현이라 할 경제 문제에 집중하고, 그것을 동시에 헤겔 철학의 보편적인 노동 개념에 있어서 비판적으로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로서 생긴 것이 고전적 국민 경제학과 헤겔 철학에 대한 이중의 비판이다. 루게에 있어서는 인생 문제에 머무를 것이 맑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상술된다. 그의 경제이론과 헤겔 철학과의 본래의 관계를 인식하기 위한 주요한 자료는 1844년의 국민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초고이다. 그것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합친 헤겔 이후의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맑스가 1844년 초고에 전개한 이 사상은, 그 시대에는 발표되지 않고 『자본』의 모양으로 되어서도 독일 철학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은 지금까지 어떤 학설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물의를 일으켰다. 레닌의 맑시즘과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는 사상적으로 맑스의 헤겔과의 대결에 기초하고 있다. 획득과 소외의 분석을 더욱 완수함에 있어서, 맑스는 노동 문제를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파악하고 노동을 임금과 이윤과의 연관에 있어서 상품의 사회적 실질로 정의하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확정되어 특수화된 노동개념, <노동량>을 산정하여 자본에 대한 그러한 관계에서 <잉여 가치>를 규정하는 이 노동 개념 때문에 우리들은 그러나 그처럼 논의된 이 경제 학설의 본래의 기초가 헤겔의 정신 철학과의 대결, 너무나도 지나치게 간과된 그 대결이라는 것을 오인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인다.

  3.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 비판

  칼 뢰비트가 지적했듯이 국민경제학과 헤겔철학에 대한 ‘이중의 비판’이 바로 『경제학-철학 수고』 전체를 관통하는 맑스의 관심사다. 맑스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지만 책 제목을 분석해보면 ‘경제학’은 국민경제학(정치경제학)이고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이다. 이 동전의 앞뒷면을 각기 장식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비판을 위해 맑스가 읽고 연구하고 논평하며 기록한 결과가 바로 『경제학-철학 수고』다.

  ‘이중의 비판’에 대해 해석자들의 매개를 거치지 말고 맑스의 주장을 직접 살펴보자.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에 서 있다. 그는 노동을 인간의 본질, 자기를 확증하는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다. 그는 노동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볼뿐 부정적인 측면은 보지 못한다”(192쪽)라고 지적한다.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는 것은 국민경제학자들과 헤겔의 공통점인데 마찬가지로 그들은 정치경제학과 철학에서 진실을 은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소외를 은폐한다”(88쪽)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화폐’와 ‘정신’을 매개로 하여 설명하는데 맑스는 이러한 매개를 극복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이다. 먼 훗날 『자본』에 구사된 가치형태에 대한 탐구는 ‘매개’에 대한 매개형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기도 한데 이는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 연구에서는 주목되었으나 맑스주의 철학 연구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아마도 맑스처럼 ‘경제학-철학’을 동시에 비판하지 않는, 현대 학문의 분화 추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맑스는 “무신론은 종교를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매개된 인간주의이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매개된 인간주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매개를 지양함으로써 비로소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인간주의가 생성된다”(208쪽)라고 정리한다. “논리학 ― 정신의 화폐”(188쪽)이듯,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다시 말해 스미스와 리카도에겐 상품의 화폐 즉 ‘자본’ 현상학이다. 맑스가 그들의 작업을 발전시켜서 ‘노동가치론’을 완성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성립했다는 식의 해석은 매개를 지양하려고 분투했던 맑스의 문제의식에 대한 무지다.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맑스). 또한 그것은 맑스에게 ‘이중의 비판’이 왜 중요한지 모르는 이들의 즉 맑스 이전에 머무르는 맑스주의자들의 끈질긴 ‘정통’적 전통이기도 하다.

  4. 오늘날 왜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는가?

  헤겔과 맑스가 ‘사람들은’으로 문장을 시작할 때는 대체로 상식에 편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 대상의 발상과 주장을 비판할 때다. 오늘날 『경제학-철학 수고』를 찾고 읽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의문이 냉소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는 21세기에 『경제학-철학 수고』를 왜 읽는 것일까?

  맑스의 대표작은 『공산주의 선언/공산(주의)당 선언』과 『자본』이다. 육상의 꽃이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이라고 하듯이 ‘선언’과 ‘자본’은 맑스를 생각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할 작품들이다. 그 두 작품은 맑스가 살아 있을 때 출판했고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출판이 어려워지자 “원고를 쥐들더러 갉아먹고 비판하라고 주어버렸다. 우리의 주된 목적- 자기 해명 -은 이루었기 때문에, 더욱더 기꺼이 주어버렸다”라며 끝내 방치한 작품이다. ‘요강’의 경우 ‘1859년의 서문’과  ‘자본’ 등의 출판으로 이어졌고 자본의 ‘초고’로 간주되지만 그 자체를 출판하려고 정리한 것은 아니다.

  『경제학-철학 수고』는 맑스가 자기 이해를 위해 연구하고 정리한 그의 노트로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니다. 맑스학을 하려는 전문가도 아니고 맑스주의의 전화나 재구성을 도모하는 학자나 이론가도 아니라면 맑스가 자기 이해를 위해 작성한 노트를 꼭 읽어야 할까? 또한 읽을만한 텍스트일까? 이 작품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볼만한 고전일까? 워낙 유명한 저작- 그런데 정말 유명한 것일까? -이니까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볼 수 있겠다. 20여년 만에 새로 출간되므로 그 노고를 생각해서 구입하고 읽어볼 수도 있겠다. 맑스의 다른 주요 작품들을 섭렵했는데 이 노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책을 반드시 필독해야할, 읽어보라고 추천할만한 이유로 공감되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본』 1권을 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른바 ‘프랑스혁명사 3부작’으로 회자되는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1850),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1852), <프랑스에서의 내전>(1871)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 문제작을 먼저 읽을 이유는 없다. 절판될 수 있으니 출간 즉시 사 두는 것도 가능하지만 놀랍게도 잘 팔리고 있으므로 서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왜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주문하고 구입해서 펴보는 것일까?

  만약 맑스를 더 많이 이해하고 그의 연구방법을 더 깊이 추적하고 그의 초기 정치경제학 학습의 흔적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그런 이유로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고 또 읽자고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자본’을 읽기 전에 혹은 읽고 나서 반드시 ‘요강’을 전부 통독해야 한다는 것에도 반드시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필요성이라면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의 의의 역시 『경제학-철학 수고』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맑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세부적’ 차이를 통해 천체에 대한 생각, 세계관의 차이 즉 전체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 그리고 훗날 ‘자본’에서 상품이라는 세포의 해부를 통해 자본주의 전체의 운동과 운명을 파헤친 방법론 역시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철학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5. 『경제학-철학 수고』의 주요 내용과 새 번역의 특징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정치경제학 노트, 소외된 노동, 화폐, 헤겔 등의 내용이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텍스트를 충분히 섭렵하고자 한다면 ‘요강’, ‘1859년 서문’, ‘자본’, ‘잉여가치학설사’ 등을 봐야 한다. 참고서로서 알뛰세르의 『자본 읽기』, 벤 파인의 『마르크스의 자본론』, 로스돌스키의 『마르크스 자본론의 형성』 등을 보면 되겠다. 맑스의 화폐론에 유달리 흥미를 갖는다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긴 <화페에 관한 장>과 ‘자본’의 언급들을 살펴야 할 텐데 원전에 충실한 로스돌스키의 ‘맑스의 화폐 이론’에 대한 논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맑스가 읽은 정치경제학에 서적들과 그 국민경제학자들에 대한 논평을 보고 싶다면 ‘요강’과 ‘자본’에 널려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관련 연구, 자료, 초안으로서의 노트들은 『경제학-철학 수고』를 시작으로 해서 1850년대의 방대한 노트들- 그것은 ‘요강’으로 재정리, 결집, 집대성 된다 -과 1860년대의 노트들로 이어지는데 결국 같은 주제, 같은 관심이 반복되는 텍스트들이다. 스미스, 리카도, 세이, 제임스 밀에서 점점 더 연구가 다양해지고 더 최신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새롭게 천착한 주제들의 선행연구자, 언급자들이 추가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미스와 리카도이다.

  맑스는 1850년과 51년에 52명의 경제학자들의 책을 인용한 초록을 작성했다. 그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제학이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과학은, 종종 극단적으로 미묘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고찰들이 제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스미스와 리카도 이후로는 어떠한 진전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물론 프루동을 중심으로 한 당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혐오가 전 텍스트에 걸쳐 지속된다. ‘요강’과 ‘자본’에 이르면 제임스 밀 대신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이 비판의 대상으로 대체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내용 가운데 다른 텍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주제는 소외된 노동과 헤겔에 대한 맑스의 생각일 것이다. “노동은 …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90쪽),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연’을 ‘유(類)’를 ‘인간적 본질’을 소외시키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은 외화된 노동,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산물이요, 성과이며, 필연적 귀결이다”(99쪽). “노동임금과 사유재산은 동일한 것”이므로 “한 쪽이 몰락하면 한 쪽도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사유재산에 대한 소외된 노동의 관계에서 귀결되는 것은 사유재산 등에서, 노예 상태에서 사회의 해방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명된다”.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 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100~102쪽)

  1987년판 이론과실천의 『경제학-철학 수고』에 비해 2006년에 등장한 새 번역서는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 편집, 책 만듦새 등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술술 읽힌다. 그것은 맑스의 작품들과 맑스주의 이론서들을 읽는 독서 수준이 나아지고 독서량이 20여 년 동안 보다 많이 쌓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원전 자체의 난해함이나 문체의 낯설음은 변한 게 아니지만 우리의 역량이 조금이라도 나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1987년판은 마치 대부분의 문장이 비문처럼 보인다. 눈은 글자들을 읽어나가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되지 않는다. 물론 정신을 집중해서 수수께끼 퍼즐을 맞추듯 응시하면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느낌은 생긴다. 그런데 2006년판은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된다. 번역자가 “원전의 난해함은 번역본에서도 유지되어야 하며, 그 어려움은 별개의 해설서나 연구서 등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것이므로 윤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내용의 훼손 없이 훨씬 읽기 편해진 것은 분명하다. 어떤 책이든 역자가 텍스트의 내용과 배경과 맥락을 더 많이 파악할수록 좀 더 명료하게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법이다. 이전 번역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다. 그 시간에 새 번역을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

  맑스는 “철저하게 관철된 자연주의 또는 인간주의가 어떻게 해서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이 양자를 통합하는 진리인지를 알게 된다”(198쪽),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類)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책이다”(128쪽)라고 한다. 그는 ‘요강’ <서설>에서도 “자연주의적 유물론”에 대해 언급하는데 예전에는 이것을 진화론적, 기계적 유물론으로 해석하곤 했다. 『경제학 노트』(1988)에서는 이 메모가 있는 서설의 마지막 부분이 빠졌는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백의, 2000)년의 서설에는 들어 있다.

  끝으로 이미 새 번역을 읽기 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문제작으로부터 비롯한 논란과 관련된 숙제를 생각한다. 어이하여 같은 텍스트를 놓고 알뛰세르는 맑스에게 헤겔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징후가 보인다고 독해했으며, 수많은 20세기 초반의 맑스주의자들과 로스돌스키는 헤겔과 더욱 가까운 인간적인 맑스를 이 노트를 통해 확인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마찬가지로 왜 어떤 이들은 당시 새로 출현한 ‘요강’을 보며 반헤겔주의의 실마리를 찾게 되고, 왜 어떤 사람들은 ‘자본’에서 숨겨진 논리전개방식이 ‘요강’에서 노골적으로 헤겔적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는가.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는가? 맑스는 1859년에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고 했는데 맑스가 시도했던 ‘이중의 비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것일까.

  20세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많은 맑스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 함부로 뛰어들어 자신들이 숭배하는 맑스주의 학습안내자 즉 매개자를 변호하고 흉내 내고 그들의 해설서 몇 개 읽고 다른 입장들을 논박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우선 맑스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읽어보라. 팸플릿 몇 개 읽고 세상을 변혁하겠다고 김남주의 <슬픔>이라는 시처럼 당장에 “칼을 품고” 거리로 나설 게 아니라면, 그런 급박한 시대가 아니라면 굳이 원전 텍스트 전에 그에 대한 해설서들을 먼저 읽을 이유는 없다. 맑스보다 더 어렵게 글을 쓰기도 하는 그 이데올로그들의 현학과 심오한 말장난을 즐기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새로 나온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고 나니 맑스의 나머지 작품들의 첫 번역이 또 나오면, 완역본이 나오면 그리고 절판되거나 오래 전에 번역되어 이젠 읽기 힘든 것들이 다시 번역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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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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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대인적對人的으로 증명되지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자마자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독일 이론의 근본주의에 대한 명백한 증거, 그러므로 독일 이론의 실천적 에네르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그것이 종교의 결정적이고 확실한 지양에서 출발했다는 것에 있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은 인간에게 지고한 존재라는 가르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종교의 비판은 인간이 천대받고 예속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있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시키라는 정언 명령으로 끝나는데, 이 관계는 견세犬稅가 구상되고 있을 때의 어떤 프랑스 인의 다음과 같은 외침에 의해서보다 더 잘 묘사될 수는 없다: 불쌍한 개들아! 사람들이 너희를 인간처럼 취급하려고 하는구나!-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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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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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민족들이 그들의 전사前史를 상상 속에서, 신화 속에서 체험한 것처럼 우리 독일인들은 우리의 후사後史를 사유 속에서, 철학 속에서 체험하였다. 우리는 현대의 역사적 동시대인들이지 않은 채, 그 철학적 동시대인들이다. 독일 철학은 독일 역사의 이념적 연장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실질적 역사의 미완성작들 대신에 우리의 이념적 역사의 유작, 즉 철학을 비판할 때, 우리의 비판은 현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 문제들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선진 민족들의 경우에는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인 것이, 이 상태 자체가 부재한 독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상태의 철학적 반영과의 비판적 반목이다.-6-7쪽

독일의 법철학 및 국가 철학은 공식적인 현대적 현재와 동급으로 서 있는 유일한 독일 역사이다. 따라서 독일 민족은 이러한 자신의 몽사夢史도 자신의 현존 사태들에 덧붙여야 하며, 이러한 현존 상태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상태의 추상적인 계속도 비판에 부쳐야 한다. 독일 민족의 미래는 자신의 실질적 국가 및 법의 상태들의 직접적 부정에도 제한될 수 없고, 자신의 이념적 국가 및 법의 상태들의 직접적 실행에도 제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일 민족은 자신의 이념적 상태들 속에 자신의 실질적 상태들의 직접적 부정을 가지고 있고, 결국 이웃 민족들에 대한 관조 속에서 자신의 이념적 상태들의 직접적 실행을 이미 거의 재유실하였기 때문이다.-7쪽

헤겔 법철학 비판이지만, 헤겔적인 사유가 눈에 띈다. 맑스는 끊임없이 '현대'를 고민했는데, 그 '현대'라는 것은 유럽의 현대일 것이고, 더 좁게 말한다면 '영국'으로 대표되는 현대일 것이다. 산업은 영국, 정치는 프랑스, 철학은 독일이 바로 현대였다.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강박. 철학(사유)-역사를 동급으로 보며, 철학이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고, 역사가 조금 늦게 올 수도 있고, 거꾸로 일 수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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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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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의 요구이다.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종교의 비판은 맹아적으로, 그 신성한 후광이 종교인 통곡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다.-1-2쪽

비판은 사슬에 붙어 있는 가상의 꽃들을 잡아뜯어 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가지고 위해서이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을 미몽에서 깨워 일으키는데, 이는 인간이 각성된, 분별 있는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의 현실적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 태양일 뿐이다.-2쪽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彼岸이 사라진 뒤에, 차안此岸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이다. 인간의 자기 소외의 신성한 형태가 폭로된 뒤에, 그 신성하지 않은 형태들 속의 자기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임무이다. 이리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된다.-2쪽

명문. 니체와 맑스의 문체. 한 문장, 한 문장, 한 비유 한 비유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한문을 쓰듯이 공들여서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한 것일까, 아니면 일필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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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1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노동자 중심주의와 레닌. 맑스와 러시아. 전태일과 근로기준법. 87년이후 남한의 노동운동과 FTA반대 투쟁.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는 미묘한 관계이다. 닮은 것 같으면서, 영향을 받았거나 주었거나 했으면서도, 닮지 않고 서로 극명한 차이들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고민했었던 문제들. 어쩌면 '고민'만 했던 문제들. 1920년대, 1930년대 식민지시기 '한국어'문학을 공부하면서, KAPF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위한 목적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맑스주의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혹은 모순점들?

 

그 중 핵심은, '노동자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지식인의 역할'은 그럼 무엇인가로 압축되었다. 노동자의 문화, 노동자의 힘, 노동자라는 세 글자 자체를 신성시했던 선배들과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남으려했던 움직임 등.


역사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에 본격적인 공산주의 사상가, 활동가들이 활동을 시작했고, 30년대에 꽃(?)을 피웠으며 40년에는 지하에 들어갔다가 '도둑처럼' 해방이와서 분단이 되었다. 특히 KAPF라는 청년들은 문학/문화 활동, 시나 소설 '나부랭이'를 쓰는 것을 통해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려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사실을 어떻게 우리는 해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동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고, 문맹도 많았던 시절. 노동자-농민 연대를 주장했지만, 농민들의 문맹률은 더욱 심각했던 시절. 그 시절에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 중심성을 토대로 혁명가에 의해 부여된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1920-30년대를 공부할 수록,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나 싶게 된다.


쉽게 말해, 혁명 후 본격적인 사상, 설득 작업이랄까. 어이없게도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형태로 될 수 밖에 없다는 지독한 아이러니. 1920-30년대에 만약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법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적인 당 독재 형태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중심주의를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던 나는,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다중'의 긍정적인 에너지도 구체적 투쟁 기반을 거의 상실한 지식인의 헛된 꿈이라고 간주하였고, 이미 실패한 '실험'은 정말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고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골방 학삐리의 퇴락과정이랄까..)


이러한 회의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과 이 책,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반FTA시위의 가속화에 있다. 이 중, 이는 이 책의 리뷰임으로 이 책에 한정해서 더 이야기해보겠다. (서론이 길다...)


1920-30년대 조선의 상황에서 '리얼리즘' 소설에서 처리해야 될 중요한 현실적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지식인의 역할(이는 곧 노농대중의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 노동자-농민의 역할(역할 배분? 등)


당대 조선현실은 KAPF 지식인들이 파악하기에, 노동자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는 무엇도 조직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고군분투하여 어떻게든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지식인'이 준-신적인 존재(마치 deux ex machina처럼)로 나타나서는 별다른 내적 갈등 없는 혁명 영웅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당에의해 교육받고 정보를 획득한 것?) 열정적 에너지에 넘치며 노동자-농민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식민지 시기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이기영의 '고향'은 그런 의미에서 등장하는 지식인이 '현실적'인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지식인'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본가-지주(일본인)에게 픽박과 착취를 당하며 노동자-농민은 살아가야 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너무나도 당연히 깔려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농민의 역할이란 이런 '지식인'에게 잘 배워서 투사가 되어서 자기 확장하는 것. 그리고 이는 당대 조선 노동자-농민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우월적 시각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식민지 시기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시각도 은연중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보라. 그리고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삶을 보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문제적 인물 루디가 각성하는 것은 선배 노동자 로르켕에 의해서이다. 로르켕은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도, 아니 '자본주의 시대'라는 것 자체가 노동자는 노예임을 의미할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마 언젠가는 정말로 노동자 없는 공장이 생겨날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건, 그건 노예들, 꾸역꾸역 군말 없이 일해주는 노예들이지."

(...)

“첫째, 자넨 가진 게 아무것도 없네. 자네 집, 그건 은행 소유지. 단수(斷水)해버리면 자넨 거리로 나앉게 되지. 둘째, 이론적으론 자넨 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땡전 한 푼 없으니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고! 휴가 때 어디로 가냐고 자네에게 묻지 않겠네. 답을 아니까. 여기, 집에 처박혀 있겠지. 셋째, 자네가 일해서 버는 돈은 그저 근근이 먹고 살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야. 그리고 만약 자네가 생각을 고쳐먹고 불평을 늘어놓기라도 할라치면, 버릇을 가르치겠다고 그나마 자네가 갖고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것까지 빼앗아가겠지. 그러니 입 다물어야지. 집, 마누라, 아이들이 있으니...... 자네는 채찍질 당하지 않았고, 노예 시장의 매물이 되지도 않았고, 투표권을 갖고 있고, 자네에게 일어난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라 부아지의 독자란에 투고할 수도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자네에게 있다는 것엔 동의하네! 하지만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인가? 만약 자네가 진정한 자네 생각을 적어서 보낸다면, 그건 자네가 공개적으로 국영취업알선소에 자네 이름을 등록한 거나 진배없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내 말을 믿게나. 가까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네 삶은 토끼 방귀만큼의 가치도 없고, 자넨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이 말하듯, 자네는 그저 한 명의 생산 조작자지. 수레를 끄는 짐승과 기계부품 사이의 그 어디쯤에 위치한....”(1권: 312~313)


이러한 '루디'는 단순한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집단을 체화한 문제적 인물로 서술된다. 감동적인 다음부분을 보자.


루디는 달린다. 두 눈이 불타는 것 같다. 그는 망자들과 함께 달린다. 양아버지 모리스의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그들과 함께. 피의 일주일을 겪었던 파리코뮌 가담자들과 함께. 군 기강 확립을 위해 본보기 처형을 당했던 일차대전 참전군인들과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기를 거부하며 1919년 흑해에서 선상반란을 일으켰던 수병들과 함께. 1936년의 전국적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이민 노동자들과 그들을 이끈 마누쉬앙과 함께. 세상이 존재한 이래로 정의를 요구하는 그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절대로 이들을 망각해서는 안 됐다. 여기, 루디의 손에, 루디의 다리에, 그의 신발이 아스팔트를 차며 내는 소리에, 그들이 있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격려하지 않는가.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으리!” (2권: 355)


감동적인 순간. 공권력과 투쟁하며,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던지는 장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한 흐름이 되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비로소 ‘민중’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노동자, 민중에 비해 이 책에서 지식인은 등장해도 노동자를 조직하는 역할이 아니라, 노동자 곁에 사는 어떤 이일 뿐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는 이로 실질적인 직업(의사, 변호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지식인에 의해서 사상 교육되고 조직화되어 투쟁하는 노동자 상이 아니라, 노동자들 끼리의 의식화와 조직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에 대한 내 기대감도 은연중에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일 뿐이고, 이렇게 1000페이지나 되는 소설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대화'로 가득차 있다. 노동자 출신이며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었겠지만, 이러한 대화중심은 서술자(작가)가 교조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을 지양한다. 또 특이한 점은 서술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서술적 반과거 형태로 상황을 지배하는 시선도 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현란한 대화의 장 속에 던져져, 지금 눈 앞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묵묵히 촬영(서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노동자들의 일상과 투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서술은 다국적기업이라는 배경 속에서 더 이상 80년대 남한 노동소설 처럼 자본가-노동자라는 이분구도와 자본가는 뚱뚱한 돼지이자 파렴치한 적이라는 구호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나쁜 놈이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보여지지만, 그들 또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다국적기업'이라는 시스템으로 실질적 고용주/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관계 자체가 부재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박노해 시에서도 자주 들어나듯, 80년대 노동자들에게 있어 공장장은, 자본가는 바로 저 앞에서 숨쉬고 먹고 있는 자였고, 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이 소설에서처럼, 사장은 외국에 있는 어떤 기업이라고 하고, 공장장은 단지 그에 의해 고용된 자일 뿐이고, 복잡한 M&A나 국가관계나 법들 때문에 이제는 누가 실질적으로 우리를 고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버리고 말았다.


누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시스템!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노동자들의 노조 대표, 노조에서 파견나온 중앙 간부들이 모두 나름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동시에, 통제되거나 대표될 수 없는 민중 개개인의 의견과 힘을 보여주고 있다.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시장은 선거를 위해 노동자 편에 서지만, 도지사, 장관들의 반대 등.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총체적 면모들이 너무나도 꼼꼼하고도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거의 전율에 가깝게 읽어나갔었다. 사실 외국 노동소설은 처음 접해 본 것이지만, 이렇게 훌륭하다니 가슴이 벅차다!


이 다음에는 책의 내용자체가 아니라 책을 만든 현대문학과 번역자에 대한 이야기를 쫌 해 보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정말 훌륭해서 한국어로 매우 잘 읽혔다.


ps.

오타지적.

1 권 296p 아래서 3번째 줄 루디와 달라스는 살을 에는 발바람을 맞으면 -> 맞으며

493p 가운데 부분 "별 거 아니야." 달라스가 대답한다. -> 달라스가 아니라 '바르다'

 

2 권 268p 가운데 고딕체로 끝까지 갑시다! 두번 반복 된 후 한줄 띄어야 되는데 안 띄었음.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은 표지 뒷면의 추천사다. '추천사 수록은 가나다순'이라고 명시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정남/김주영/박원순/정몽준/손학규/신경숙 순서이다.

아니 정몽준은 왜 손학규와 신경숙의 앞일까?

 

이것은 사소한 실수라고 해도, 정몽준과 손학규의 추천사는 이 사람들이 (또는 이 사람들의 비서가) 이 책을 읽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책 소개를 대충 받고 아무렇게나 씨부린건지 알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후자 같다.

 

정몽준은 '이 책이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는데, 혁명을 이야기하는 책이 어떻게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손학규는 '노동의 신성함, 일자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는데, 개뿔 무슨 노동의 신성함이냐? 나는 노동의 신성함을 논하는 자들을 믿지 못한다.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노동 또한 밥 벌어먹기 위해 해야되는 지겨운 곤욕으로 그려질 뿐...

 

도대체 왜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한 것인지, 현대문학 출판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의 네임밸류는 물론 엄청나다. 그런데 노동소설에 손학규/정몽준 이라니!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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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cka 2006-12-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책 빌려됴요^^

기인 2006-12-2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집에 있는데 가져다 줄께요~ ^^*

2007-03-01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6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