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리얼리즘 비평선집 - 자료편, 교재용
김윤식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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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 문제를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비교적 명료하게 입장을 밝혀 놓았다. 실상 조선의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반자 농민'이라고 정의하고 농민문학문제를 이끌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농민은 문학을 향유할 여유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창작을 할 여유나 능력은 더군다나 없는 것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 방안을 내놓는데, '농민신문'이나 '농민운동원'등 농민은 작가에게서 점차적으로 문학을 배워서 농민작가가 되고 작가는 농민에게 농촌의 실상을 배운다는 것인데 말도 안된다.

우선 농민 중 일부 지각한 농민은 기존 농민으로 보아야 될 것인지. 그리고 문학가에게서 '형식'을 배운다는 것인지. 그거 배운다음에 진정한 '농민에 의한 농민문학'이 가능할 것인지.

안함광은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다. 글로 쓰는 '문학'을 통한 혁명을 지상과제로 설정하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구비문학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민중성과 용이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당대 진실한 의미에서의 맑스주의 문학 운동을 하려 했다면 구비문학에 주목했어야 한다.

또 조명희나 이기영의 작품을 비판하면서, 이러이러한 면모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방민호 선생님의 기존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을 생각나게 했다. 결국 리얼리즘은 문학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문학을 교조화시켜서 그 생명력을 고갈시킨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보아야 한다. 각 작가의 개성과 능력은 무시되고, 이론과 규범이 있어 이를 따라야 한다. 물론 안함광이나 김우진 같은 이들은 문예의 제2차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종교에 대한 비판은 꽤나 재미있다. 맑스나 모택동의 명제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종교의 기원은 '원시공산제'사회에도 있었으니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현혹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것은 발생적으로는 옳지 못하다. 그렇게 사용되는 측면은 물론 있다. 그러나 실로 서구나 중국, 조선의 경우에 있어서 상층계급의 종교와 하층계급의 종교는 다르거나 양상이 많이 달랐고 오히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악독한 착취를 제한하는 역할과 기능을 강조했던 것도 분명하다. (물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면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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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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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은 '마르크스'를 표나게 강조했지만, 글을 읽는 내내 눈에 띄는 것은 '소쉬르'의 이야기들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과 또 보다 중요하게 의미는 '차이'의 체계라는 구조들에 의해서 생성되고 '본질'이나 '내재적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본질이나 개념이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전도에 불과하다는 것(38면)

이를 '자본'의 관계에서 파악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고, 그의 <<자본론>>이다. 즉 '가치생산적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생산하는가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15면)는 것. 맑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가치설을 유지하지만, 고진이 새롭게 읽는 맑스는 상품들에 '내재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폐'에 대한 물신성 분석을 통해서 꿰뚫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는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과의 가치관계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하지만 화폐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수량적으로 표시된다. 같은 상품이라도 어떤 지역에서는 싼데 다른 지역에서는 비싼 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다른 상품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할 뿐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화폐형태에 의해 사라져 버리면 마치 그 상품에 독자적으로 내재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 관계의 체계로서의 차이가 화폐에 의해 양적인 차이로 나타난다. (52~53면)

그렇다면 어떻게 '이윤' 즉 '잉여가치'가 생산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교환가치 만큼을 자본가에게 임금으로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이 때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협업을 통해서 초과생산을 발생시킨다는 것. 이를 '체계'로 설명하자면, 시간이 다른 두 축의 이동으로 인해 '차이'가 발생하고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시스템이 매개될 경우에만 부등가교환 또는 잉여가치가 비로소 필연성을 갖고 존재한다. (58면)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분업이나 협업의 강화에 의한 것이든 기계의 개량에 의한 것이든 노동력의 가치를 잠재적으로 저하시킨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좋다. 자본가는 이미 더 싸게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물을 기존의 가치체계 속으로 들여보낸다. 결국 잠재적으로는 노동력의 가치도 생산물의 가치도 상대적으로 하락하지만, 이것은 곧바로 현재화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체계와 잠재적인 체계가 여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자본도 두 개의 상이한 시스템 중간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상인자본이 이른바 공간적인 두 개의 가치체계--더욱이 거기에 속하는 인간에게는 불가시적인--의 차액에 의해 발생했음을 분명히 밝혔지만, 산업자본은 그런 의미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여 시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8~69면.)

이렇게 고진이 말하는 '읽는다'는 것은 '맑스'가 의도했듯 안 했듯, 작품 속에 내재한 '내적인 체계'를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본론>>에 대한 독해를 통해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브뤼메르 18일>>까지 읽어내는 젊은 고진(이 책이 쓰일 당시 37살)의 자유분방함과 창의적 독해는 뛰어나다.

이러한 '소쉬르'의 재발견은 다음 글 <역사에 대하여- 다케다 다이준>에서도 이어진다. 화폐가 상품이란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고진은 '죽음'과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죽음의 관념은 언제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은폐하고 있다.(126면)

맑스를 읽어낸 것과 똑같이 다음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를 읽은 다케다 다이준을 읽는다.

<<사기>>라는 텍스트의 구조만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는 어쩌면 사마천이 의도하지도 않았을 문제를 거기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마천>>이란 비평작품에서 다케다 다이준이 의식하지 않았을 문제를 발견한다. (131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사마천의 <<사기>>는 죽음 또는 진공에 대한 공포를 구조의 중심에 갖고 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이는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에 대해서 다케다 다이준의 해설에 대한 고진의 독해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뒤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하나의 관계의 체계가 다른 체계로 변형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즉 장례가 끝나고 죽은이의 부재에 사람들이 익숙해져 갈 때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로 이루어진 재편성한 관계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그러한 '체계' 속에서 사라졌을 때는? 극도의 진공상태가 형성된다. 그가 죽었을 때는 그가 죽었을 때가 아니다. 진시황이 죽는 것은 '누군가가 시황제를 대신하는 관계의 질서를 형성할 때이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과 진공에 대해서 다시금 고진은 소쉬르를 인용하여 언어에 대한 비유로서 설명한다. 이는 단지 비유가 아니다. 모든 체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공을 상상하는 데 그렇게 큰 무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언어라는 체계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쉬르가 언어를 차이짓기의 체계로서 파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성과 의미(관념)의 결합은 자의적이고 의미(시니피에)는 단지 음성(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상이한 음성의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의미는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일종의 '진공'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무(無)가 아니다. '존재와 무'(사르트르)는 거기에서 파생한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자의성이란 사람이 임의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성이란 말은 시니피앙의 선택이 전적으로 화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 그것이 언어공동체에서 확립되면 화자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소쉬르). 그렇다기보다 언어가 언어로서 존재할 때는 이미 '진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犬)라는 개념은 각 국어마다 음성이 다르기 때문에 개(犬)와 이누(일본어로 개- 기인)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만 해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면 개(犬)라는 개념이 원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개(犬)라는 개념 자체가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개념이 되자마자 '진공'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127면)

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고모리 요이치의 해설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글(책과 동일한 제목이고, 책의 절반 가량의 양을 차지한다.)에 대한 해설로, 잘 되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읽기'로 가득차 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을 비롯해서, 다케다 다이준, 나쓰메 소세키, 예수 등등을 읽어나간다. 이에 대해서 고모리 요이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 의미로서의 말이라면, 그 체계 속에 있는 이상 아무리 '주체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우리는 더욱 깊이 그 체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 체계에 수고적(受苦的)으로 지배되고 있는 결여로서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 결여를 과잉으로 만회하려고 하는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여를 만회하는 운동, 그것은 쓰인 것에 대하여 늘 뒤늦게 이루어지는 읽는 것일 따름이다. 읽는 것이란 결코 기원이나 근원에 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없는 이송과 양도를 되풀이하면서 사소한 편차를 만들어 내고 오로지 계속 변환하는 것이다. (256면)

읽는다는 것, 비평한다는 것의 의미. 아리송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러한가. 왜 읽는 것일까. 우리는. '차이'를 생성하기 위하여? 이는 다시 말하면 기존의 우리가 '던져진' 지배적 '상징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즉 '주체'로 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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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엥에서의 주장 입장총서 2
루이 알튀세르 지음 / 솔출판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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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다. 알튀세와 함께 자본론을 다시 한번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처럼) 자본주의적 착취를 직접 경험하거나 (노동자든 지식인이든 혁명적 투사들처럼)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도 혁명적 투사도 아닌 이들은 그들이 아무리 '박식'하다 하더라도('경제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들처럼), <<자본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선입견에 의해 크게 지배되고 있는 그들의 의식을 변혁시키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리고 그것의 교환관계들"(맑스)에 관한 이론을 제공한다는 것, <<자본론>>은 따라서 )'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 '추상적인'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본론>>은 '역사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상상하듯이 구체적인 역사와 경험적인 경제에 관한 저작이 아니라는 것.

'초과근무시간'에 대해 한마디 하기로 하자. 시간급 노동자들에 따르면, 이 시간들에 대해서는 '정상시간' 임금의 25%, 50%, 심지어는 100% 이상 지급된다고 한다. 현상적으로 그것들은 고용주에게 '비싸게 먹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들은 고용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본가로 하여금 매우 비싼 기계들을 24시간 내내 돌릴 수 있게 해주는데, 이 기계들은 현대의 기술이 쉴새 없이 시장에 내놓는 새롭고 훨씬 효과적인 기계들에 의해 가능한 한 빨리 소모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초과근무시간'은 고용주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선물'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물론 초과근무시간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추가적인 수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친다. '초과근무시간'은 그러므로 그 기만적인 외양아래, 노동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적 계급투쟁은 그 효과에 있어 제한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경향인 경제적 착취의 강화로의 경향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리듬, 직위의 제거, 임금의 하락, 상여금의 자의성 등에 대항하는)을 공격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투쟁은 정치적 계급투쟁이다. 정치적 계급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정치적 계급투쟁은 경제적 계급투쟁을 포괄한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이다.

단순한 경제투쟁에 대한 정치투쟁의 우위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전망도 가능하지 않다. '비정치적인' 단순한 경제투쟁은 경제주의로, 즉 계급협조로 이끌린다. 반면, 경제투쟁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정치투쟁의 우위는 주의주의로, 즉 모험주의로 이끌린다.

맑스는 거기에서(<<자본론>> 시초축적 부분-기인), 자본주의가 아주 조용하게.... 최초의 자본을 구성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두었다는 최초의 자본가의 저축에 의해 설명하는 부르조아적인 신비화를 폭로하고 있다. 맑스는, 사실 몇몇 '대부자'들 사이에 막대한 화폐가 '축적'된 이후에야 비로소 서방세계에 자본주의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축적은 몇 세기에 걸친 강탈과 원정과 도둑질과 약탈 그리고 전인민(예컨대 잉카인의 후예들과 황금광산이 풍부했던 전설적인 페루의 또다른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의 꾸밈 없는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이러한 맑스주의적 테제는 아직도 항상 분명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오늘날 자본주의가 '본국'들에서 상대적으로 학살 없이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은 항상 같은 방식의 도둑질과 약탈과 폭력과 학살들을 '주변부'라고 부르는 '제3세계'의 나라들, 즉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인들에 의한 학살들은 오늘날에도 역시 맑스가 제8장(시초축적 부분-기인) 자본주의의 먼 기원들에 관해 설명했던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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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3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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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 과거
노동 조합들은 본래, 적어도 노예보다는 조금 나은 계약 조건을 전취하기 위해 그러한 경쟁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한하려는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시도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노동 조합들의 즉각적인 목표는 일상적인 필요에만, 자본의 끊임없는 침해를 저지하는 방편에만, 한마디로 임금과 노동 시간에 문제에만 한정되었다. 노동 조합들의 이러한 활동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현재의 생산 제도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나라에 걸쳐 노동 조합들이 결성되고 그것들이 결합됨으로써 일반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한편, 노동 조합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세의 도시나 꼬뮌이 중간 계급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동 조합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유격전에 필요한 것이라면, 임금 노동과 자본 지배라는 체제 그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조직된 세력으로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138쪽

(c) 그 미래
본래의 목적은 물론이고, 노동 조합들은 이제 완전한 해방이라는 폭 넓은 이해 관계에 있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의 중심으로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노동 조합들은 이러한 방향을 향하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 전체의 전사이자 대표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면, 노동 조합들은 결사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대열에 끌어들여야 한다. 노동 조합들은, 예를 들면 예외적인 환경 때문에 무력화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처럼 매우 적은 대가를 지불받고 있는 업계의 이해를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 노동 조합들은, 자신들의 노력들이 편협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짓밟힌 수백만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세계 일반에 납득시켜야 한다.-139쪽

비평 세미나를 하면서 오늘 부닥쳤던 문제를 해결해 준다. 30년대 중반 조선공선당의 해체 이후에 자발적 노동자, 농민의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나는 이를 긍정적이라고 생각을 한다. 지식인들의 역할은 물론 긍정적인 것이지만, 진정한 역사의 주체는 민중들의 역동적인 힘이고 지식인은 이를 보조할 뿐이다. 그러나 그 전 조선의 운동은 지식인 중심성이 너무 강하게 노정했던 듯 하다.
30년대 중반 이후 비로서 자연발생적인 민중들의 움직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환경의 절박함을 들어내주며 동시에 민중들의 집단화와 발전의 맹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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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노동과 자본 맑스 엥겔스 에센스 2
칼 맑스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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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명확히 한 간결한 책자이다. 실제로 맑스는 이 글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신 라인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다.

'경제학은 상품 가격으로부터 출발하였으니, 이는 상품 가격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의 상품 가치, 즉 모든 가격 변동들이 설명되어야 하는 출발점이자 결국 모두 다시 귀착되어야 하는 것인 상품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라깡적인 개념을 들고오자면 결국 노동가치라는 것은 '누빔점'일 뿐이지 않은가. 실제 경제현상에서 가격은 기호들의 의미망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서로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맑스의 대답은 '아니다,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진동을 한다.'일 것이다. 크게 진동할 수는 있지만 중간에 고정된 점은 이론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고전경제학자는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을 못했다고 하면서 맑스는 분명히 '노동자들이 실제로 자본가에게 화폐를 대가로 판매하는 것은 자신들의 노동력이다'라고 해서 고전경제학자들이 노정한 노동 가치의 이중성을 푼다.

또 알게모르게 빠질 수 있는 화폐의 물신성을 경계한다.
'모자라는 공급이나 지나치게 증가한 수요 때문에 어떤 상품의 가격이 현저하게 상승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다른 상품의 가격은 그에 비례하여 하락한다. 왜냐하면 어떤 상품의 가격이란, 교환에서 그 상품을 대가로 제삼의 상품들이 주어지는 비율을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의) 변동들만이, 즉 자세히 살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황폐화를 수반하며 지진과도 같이 부르주아 사회를 그 근저로부터 흔들리게 만드는 이 변동들만이, 그 경과 속에서 생산 비용에 의해 가격을 결정한다. 이러한 무질서의 전체 운동이 부르주아 사회의 질서이다. 산업의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경과 속에서, 이러한 순환 운동 속에서, 경쟁은 말하자면 한 극단을 다른 극단으로 조정한다.'
사실 그러한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따스한 천사의 배려라기 보다는 무자비한 악마의 유희이다. 이에 휩쓸리며 자본가들과 그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조심스러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불덩이 위에 놓여진 작두를 타듯해야 하는 것이다.

'생산 비용에 의한 가격의 결정이란 어떤 상품의 제작에 요구되는 노동 시간에 의한 가격의 결정과 같은 것인데, 왜냐하면 생산 비용은 1. 원료와 도구의 마모로, 즉 그 제작에 어떤 총계의 노동일이 든, 따라서 어떤 총계의 노동 시간을 표현하는 그러한 산업 생산물로 구성되며, 2.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시간이 척도인 직접적 노동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의 무수히 많은 생산물들의 엄청난 거품들의 가격들도 과연 엄밀히 적용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알튀세가 말했듯이 맑스의 글은 엄정한 순수이론적인 저작으로 ‘추상적인’ 대상들을 바탕으로 한 저작이다.

'단순 노동력의 생산 비용은 노동자의 생존 비용과 번식 비용에 달한다. 이러한 생존 비용과 번식 비용의 가격이 임금을 형성한다. 이렇게 결정된 임금을 임금의 최소치라고 한다. 임금의 이러한 최소치는, 생산 비용에 의한 상품의 가격 결정 일반과 마찬가지로, 개별적 개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에 해당되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들,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전체의 임금은 그 변동 내부에서 이러한 최소치로 조정된다.'

'개인들이 생산하는 곳인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적 생산 관계들은 물질적 생산 수단들의, 생산력들의 변경 및 발전과 더불어 바뀌고 전화한다. 그 전체성 속에 있는 생산 관계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들, 사회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며, 게다가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하고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어떤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들의 그러한 총체들이며, 이 생산 관계들 각각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의 특수한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자본은 생활 수단들, 노동 도구들, 원료들로만, 물질적 생산물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교환 가치들로도 구성된다. 자본을 구성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상품들이다. 따라서 자본은 물질적 생산물들의 하나의 총계일 뿐만 아니라, 상품들이, 교환 가치들의, 사회적 크기들의 하나의 총계이다.'
'그러나 각각의 자본이 상품들의, 다시 말해 교환 가치들의 하나의 총계라 하더라도, 상품들의, 교환 가치들의 각각의 총계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품들의, 교환 가치들의 하나의 총계가 자본으로 되는가?
그것이 자립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즉 사회의 일부의 권력으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또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서 증식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노동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계급의 존립이 자본에게 필요한 전제이다.
직접적으로 산 노동에 대한 퇴적된, 과거의, 대상화된 노동의 지배가 퇴적된 노동을 비로소 자본으로 만든다.
자본의 요체는 퇴적된 노동이 산 노동에 새로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요체는 산 노동이 퇴적된 노동에게 그 퇴적된 노동의 교환 가치를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수단으로서 봉사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써서 없애는 것을 보상할 뿐만 아니라 퇴적된 노동이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그 퇴적된 노동에게 준다.'
즉 자본가에게 판매한 노동자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자본을 위해서는 재생산적으로 소비된 것이고,' '노동자를 위해서는 비생산적으로 소비된 것이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되면서만, 임금 노동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만 증대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증대시킴으로써만, 자신을 노예로 삼는 권력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증대는 프롤레타리아트,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증대이다.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약하는데, 이는 마치 고리 대금업자와 도락가가 서로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수는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눈에 띄는 임금 증가는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을 전제한다.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부, 사치, 사회적 욕구, 사회적 향유 등의 마찬가지로 급속한 성장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상승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도달할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와 비교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과 비교하면 하락한 것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잰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충족 대상들을 기준으로 재지 않는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맑스의 명확한 통찰이 빛난다.

'만일 자본이 급속히 팽창한다면 임금이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빨리 자본의 이윤은 상승한다. 노동자의 물질적 처지는 개선되었으나,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비용으로 지불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그를 자본가로부터 분리하는 사회적 틈은 넓어졌다.'
그렇다.

'자본가가 그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는 똑같은 노동 시간에 더 많이 제공해야 하는 의무, 한마디로 자신의 자본의 증식의 더 악화된 조건들말고는 없을 것이다.'
엥겔스가 재치있게 표현했듯이 크게 보아서 자본가 대 노동자의 대결 구도이지만 그 부대 안에서 또 전투가 이루어진다. 자본가들 끼리, 노동자들 끼리. 그 전투는 상품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잠시적인 휴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끊임없는 경쟁일 뿐이다. 물론 자본가 계층의 꽤 긴 서로간의 비밀스러운 협정은 있을 수 있다. 또 계급 의식에 눈 뜬 노동자들의 단결도 있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산업 전쟁''의 전투는 노동자 군대의 징집을 통해서가 아니라 퇴역을 통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사령관인 자본가들은 누가 가장 많은 산업 병사들을 떠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
'생산적 자본이 성장할수록 분업과 기계 적용은 더욱 더 확장된다. 분업과 기게 적용이 확대될수록, 그만큼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더 확장되며, 그들의 임금은 더욱더 수축한다.'

'맑스의 현실 비판은 소외의 극복에서' '엥겔스의 현실 비판은 경쟁의 지양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상태란 '쇠퇴하는 사회 상태에서는 누진적인 노동자들의 빈곤, 진보하는 상태에서는 복잡한 빈곤, 완성된 상태에서는 정체된 빈곤'이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동안에 새로 생산한 가치 가운데 일부는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는 서로 다르고,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하다. 노동자의 몫이 커지면 자본가의 몫이 작아지고, 자본가의 몫이 커지면 노동자의 몫이 작아진다.'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이를 쉽게 받아들일 비맑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 할터이다. 개별 자본가-노동자 즉 사업주 고용주 관계에서 그 개별 사업체가 다른 사업체의 경쟁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할 때 비로소 노동자는 고용될 수 있고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으니 이는 공생관계라고. 그러나 '개별 자본가-노동자'라는 것은 허구이다. 총체적 자본가-노동자 관계에서 고찰해야지만 전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전체에서 자본가들은 서로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지만 이윤이 창출되고, 결론적으로 이 경쟁에서 이기는 유일하고 본질적인 길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 수의 감소이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가능한 한 급속한 자본의 성장조차,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을 개선한다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부르주아의 이해 관계, 자본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철폐하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그 이전이나 이후나 반비례 관계에 있다.'

'맑스의 견해의 특징은 가치, 화폐, 상품, 자본 등의 개념을 하나의 '관계'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맑스는 '모든 사회의 생산 관계들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자본이란 가치이다. 그런데 가치라는 것의 실체는 "노동 생산물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 노동이 그것들 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결국 자본의 운동인 자기 증식 운동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노동을 두고 벌어지는 운동이다.
결국 맑스가 설명하려던 "자본"이 "자본 관계"라면, 이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이다. 맑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이 자본으로서 운동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자본이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기 위해선느 임금 노동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자본 관계를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게 되는 점을 두고 맑스는 종교의 세계에 비유하여 "물신 숭배적 성격"이라 했다.'

IMF이후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이를 IMF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IMF를 벗어난지 오래지만, 자본주의는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일자리가 점점 적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엄청난 수출을 하면서 내수가 없다고 계속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악순환에 빠질 뿐이다. 노동자들은 단결해서,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늘리는 경제적 투쟁과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행해야만 한다. 알튀세도 말했듯이 경제적 투쟁만으로는 그 효과를 제안받는다. 이는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경향인 경제적 착취의 강화로의 경향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를 공격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투쟁은 정치적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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