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랑스 내전 ㅣ 맑스 엥겔스 에센스 3
칼 마르크스 지음, 안효상 옮김, 최갑수 해제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1. 옮긴이의 말(안효상)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가 가져다 준 여러 가지 의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츰 드러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가라는 관제 고지의 점령을 통한 이행의 불가능성이다. 이는 도구로서의 국가라는 관념의 일면성을 보여 주며, 이에 따라 집권을 지향하는 조직으로서의 당 개념을 재고하도록 만든다.
프랑스 내전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위와 같은 판단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형태 혹은 사람들의 유대 관계를 기획하는 데 이론적, 역사적 준거점이 된다는 점에 있다. (8~9)
「공산당 선언」에서 pt독재혁명은 bg혁명과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동일성은 맑스가 역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추상화와 단순화. 맑스가 앞으로 일어날 pt혁명이 bg혁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은, 그가 다른 혁명과정들을 비교하는데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는 항상 두 개의 혁명을 비교하며 그 공통적 ‘형식’과 그 ‘내용’의 상이함에 주목한다. (그의 “프랑스 혁명 3부작”모두에 해당되는 사항) 옮긴이는 결국 국가권력(기구)의 pt계급 독재가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파악한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또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pt계급 독재가 역사상 실현된 예가 바로 이 ‘프랑스 내전’ 또는 파리 꼬뮌이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예이다. (그렇다면 옮긴이가 말하는 ‘현존 사회주의’붕괴는 어떠한 예인가? 공산당 독재라는 의미에서 ‘당’이라는 매개(또는 pt와 구분되는 ‘주체’)의 실패? 이는 이제 ‘레닌’의 실패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옮긴이는 이를 의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옮긴이의 말이 책의 ‘앞’에 있다.)
(맑스는) 혁명적 대중 운동 속에서 실천적 진보를 보았고, 이러한 시도에 근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가 긴급한 정세 속에서 씌어졌음에도 풍부한 이론적 함의를 담고 있는 내전이다.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맑스(주의)의 지향은 ‘정치 경제학 비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론적, 현실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는 정치 혁명과 구분되는 사회 혁명의 과정인데, 이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라는 정치 혁명과 달리 자본과 국가 장치의 동시적 변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집권을 위한 당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정치 형태는 관념의 고안물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리 꼬뮌이었다. “꼬민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10)
결국 옮긴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당’이라는 매개/주체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pt 독재가 요구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파리 꼬뮌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파리 꼬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결국은 bg세력에 의해서 처참하게 학살당하지 않았는가? 파리 꼬뮌 또한 pt의 국가 기구의 전복과 장악이지 않는가? 비록 ‘당’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파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인구와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이렇게 그리스 아테네식 ‘도시 공산주의’만이 ‘노동자 통제’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인가? 파리 꼬뮌은 무엇인가?
2. 칼 맑스의 프랑스 내전 독일어 제3판 서설 -F. Engels
1870년 7월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처음부터 프로이센 육군이 프랑스를 제압하였고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동시에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피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선거를 마치고 28일 시청 앞 광장에 20만의 시민을 동원하여 코뮌 성립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29일 집행위원회 아래 군사 ·재정 ·식량 ·노동 ·교환 ·교육 ·외교 ·사법 ·보안의 9위원회가 성립되고 시민생활의 자주관리체계가 정비되었다. 90명의 코뮌의원의 성분은 자유직업자 ·중산시민이 대부분이고 노동자는 20명이었다.
블랑키스트 ·프루동파(派) ·자코뱅 당원 등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의 폐지 및 인민에 의한 국민군의 설치, 집세의 미지불분의 일시연기, 관리봉급의 최고액 결정, 종교 ·재산의 국유화, 공장주가 방기(放棄)한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코뮌이 지상 최초의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려고 분주한 틈에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은 5월 21일 맥마흔의 지휘하에 파리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피의 1주일’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파리코뮌’)
꼬뮌은 처음부터 곧바로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자 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낡은 국가 기구로는 더 이상 관리해 나갈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노동자 계급은 방금 전취한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반대하여 이용되어 온 모든 낡은 억압 기구를 제거해야 하며 (27)
그럼 그 제거하고 난 후 어떻게 ‘통치’ 즉 유한재화를 분배, 필수 생산물들을 생산할 것인가? 어떠한 조직이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즉답은 없다. 대신 국가 관료에 의한 민중의 지배가 아니었다는 것만 다시 강조한다.
국가 및 국가 기관이 사회의 종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때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 불가피했는데, 이것을 반대하여 꼬뮌은 확실한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첫째로, 꼬뮌은 행정, 사법, 교육의 모든 직책들을 관계자들이 보통 선거에 의거해서 선출하여 임명하고 게다가 이 관계자들에게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둘째로, 꼬뮌은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공무원에게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정도의 임금을 지불하였다. (28)
선거. 선거. 또 선거들. 그만큼 토의할 수 있는가. 그만한 정보를 모든 유권자에게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고대의 추첨에 의한 공무원직이 보다 pt적이지 않을까. 계급으로서의 pt가 진정 존재한다면.
실제로는 국가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 기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는 민주 공화제에서도 군주제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가는 기껏해야 하나의 악에 불과하며, 계급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악을 물려받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꼬뮌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성장한 한 세대가 모든 국가 폐물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될 수 있는 한 국가의 최악의 측면을 감소시킬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빠리 꼬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다. (29~30)
결국 파리 꼬뮌 또한 그 ‘악’을 안고 갔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앞의 옮긴이의 주장은 엥겔스의 주장에 전면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끝끝내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파리 꼬뮌은 어땠는가? 우리는 이를 알기 위해서, 파리 꼬뮌의 동시대인이자 당대 뛰어난 역사학자, 철학자, 공산주의 운동가인 맑스의 해석에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
맑스는 프랑스 내전 또한 계급투쟁의 일환이라고 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 내부장관 (임시 수상)인 띠에르가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를 하였는가를 보인다. 실상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로이센 침공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갇힌 직후, 공화국을 선포한 티에르 일당은 공화국 시작부터 프로이센의 프랑스 침공에서 자신은 방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넉 달동안 투항하지 않았던 것은 이 혼란기를 빌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부의 전유자들은, 공화국의 폭력적 전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 비용을 부의 생산자들의 어깨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엄청난 몰락은 토지와 자본의 이 애국적 대표자들에게 박차를 가하여, 외국 정복자가 지켜보고 비호하는 가운데 대외 전쟁에 내전을, 노예 소유주들의 반란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8)
맑스는 집요하게 띠에르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파리 꼬뮌까지 얼마나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했는지를 밝힌다. 이는
띠에르, 이 난쟁이 기형아는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매혹해 왔으니, 이는 그가 부르주아지 자신의 계급적 부패의 가장 완성된 정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60)
2
언제나 대칭적으로 (정-반-합의 연쇄인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파악하기 좋아하는 맑스는 (예를 들어 bg 혁명과 pt 혁명) 1849년 6월 혁명 때 부르주아가 pt를 과격하게 진압하던 것과 달리 파리 꼬뮌 하에서는 부르주아의 시위를 평화롭게 용인하였다는 것을 보인다.
3
의회제 공화국이 최소한 그 지배 계급의 여러 부분들을 분리시킨 국가 형태라면, 이와는 반대로 루이 보나빠르뜨를 대통령으로 하는 의회제 공화국은 이 계급과 그들의 듬성듬성한 대오 외부에 살고 있는 사회 전체 사이에 심연을 만들었다. 이전의 정부 아래에서 저 계급의 내적 분열이 여전히 국가 권력에 부과했던 제한은 그들의 단결에 의해 이제 사그라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이 연합한 유산 계급은 이제 국가 권력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국민적인 전쟁 도구로서 무자비하고 뻔뻔스럽게 사용하였다. (83-84)
제정은 부르주아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노동자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가지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제도이다.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복귀하는 사태는 맑스가 계속 언급하는 로마사에서 볼 때, 카이사르 시기이다. 이 때 로마는 더 이상 과두정치가 기능하지 못하여 뛰어난 인물로 권력을 집중시킬 필요성이 있었다고도 서술된다. 그런데, 당대 프랑스는 왜 제정으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을까. 루이 보나빠르뜨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농민을 기만하여 그들을 주된 지지세력으로 업고 대통령이 당선한 이후, 그가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은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서술된다.
어쨌든 pt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bg는 연합하였고 이러한 제정에 대한 직접적 대립물로서 꼬뮌이 등장한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가 2월 혁명을 수행할 때의 “사회 공화국”이라는 구호는 계급 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폐지해야하는 공화국에 대한 모호한 열망을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꼬뮌은 이러한 공화국의 현실적인(positive) 형태였다. (85)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0-91)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는 것이 중요하다. 맑스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독일 이데올로기」나 「공산주의 선언」에서도 나타나듯이 명확한 정치형태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의 투쟁과정 속에서 역사의 진보 속에서 마침내 발견되어야 할 정치 형태였고, 이것을 맑스는 마침내 ‘꼬뮌’을 통해서 본다. (구체적으로는 최갑수 선생의 ‘해제’를 참조할 것)
이러한 ‘꼬뮌’에 대해 bg정부는 ‘민족’이라는 경계를 벗어던지고 연합하여 계급 투쟁으로 나아간다.
낡은 사회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인 노력은 민족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계급투쟁을 연기하기 위한 것이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타오르자마자 내팽개쳐지는 정부의 순전한 사기임이 증명되고 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국민적 제복으로 가장할 수 없다. 국민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하나가 된다! (122)
해제 「빠리 꼬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민주주의」 -최갑수
사실 맑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은 당대사로, 맑스가 입각한 조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당시의 정세와 제한된 정보에 의해 상당부분 ‘구성’되어 소개될 수밖에 없다. 또 당대인의 입장에서 당대인 독자에게 당대적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많다. 이를 잘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 최갑수 선생의 해제이다. 프랑스 혁명시기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의 자세한 설명이 명쾌하다.
결국 맑스가 말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행했는지 또는 행하려 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꼬뮌‘이 취한 조치들을 “노동자 계급을 위한 조처들”, “노동자 계급을 위한, 그러나 주로 중간 계급을 위한 조처들”, “일반적인 조처들”, “공안을 위한 조처들”, “재정 조처들”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론느 제빵공의 야간 작업 금지, 자본가들이 폐쇄한 작업장을 노동자 협동 조합에 맡긴다는 계획, 공창(公娼)제의 폐지, 교육의 세속화 조치, 실질적인 무료 의무 교육제, 임차인과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과 약속 어음에 관한 조치, 징병제의 폐지, 도박의 금지, 정교 분리, 기요띤의 소각, 정치범의 석방, 군국주의의 상징인 방돔(Vendome)광장 원주의 파괴, 헝가리 출신의 ’제1 인터‘ 회원인 레오 프랑켈(Leo Frankel)의 ’꼬뮌‘ 의원 선출 유효화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외에도 꼬뮌 공무원의 연봉이 6,000프랑을 넘을 수 없게 한 연봉 상한제, 꼬뮌의 연합을 통한 국가의 재조직안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155)
이들이 생산 수단과 경제 운용의 주체로 상정했던 것은 중앙 집권화된 국가 아니라 ‘조합’과 ‘노동조합’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자신이었다. (.....) 그 전망에 따르면, 국가-꼬뮌의 도움을 받아 사회 작업장이 확산되면 고용-피고용 관계와 착취가 사라지고 궁극적으로는 동업 조합과 노동조합의 권력이 정치권력을, 곧 ‘사무르이 관리’가 ‘인간의 통치’를 대체할 것이었다. 그 법령은 단기간이나마 적용되었고, 일부의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 하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노동 협동 조합식의 사회주의가 빠리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분명 그들에게 전통적인 요소들이 지배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사회주의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으며 그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1848년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의 예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172-173)
또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3층의 이데올로기적인 중층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꼬뮌군’에 의한 정서적 공감대는 더욱 커져 1층에 해당하는 애국주의는 사실상 ‘빠리 꼬뮌’의 이념상의 토대를 이루며 그 위에 자꼬뱅적이고 블랑끼주의적인 혁명주의라는 2층이 놓이고 꼭대기인 3층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끌어안았던 사회주의가 자리하였던 것이다. 이 세 층은 그 경계선에서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서 같이 호흡하였던 ‘꼬뮌’의 투사들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 이념의 세게에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빠리 꼬뮌’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165)
이러한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특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되고, ‘현실 사회주의’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당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 대부분 비판적, 비난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맑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생각했던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빠리 꼬뮌’은 맑스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 곧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는 동시에 맑스는 그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인식과 원리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경험을 의미했는가 하면, ‘꼬뮌’은 그가 자본주의가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가는 단계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도기의 특징들을 생전에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74)
내전의 다음의 구절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윤곽을 제시해 준다. “고뮌은 의회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 기구여야 했다. 이제까지 중앙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책임이 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꼬뮌의 관리로 전환되었다. 다른 모든 행정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뮌 의원들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직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공직은 중앙 정부의 앞잡이들의 사유 재산이기를 중지하였다. 시 행정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국가에 의해 행사된 발의권 전체가 꼬뮌의 수중에 놓였다.” “꼬뮌의 첫 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 옛 정부의 물리적 강제력의 도구인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한 꼬뮌은 ...... 억압의 정신적 강제력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 모든 교육 기관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이 제거되었다. ...... 사법 공무원들은 ...... 모든 정부에 대한 자신의 굴종을 은폐하는 데 불과하였던 저 외견상의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 그들도 앞으로는 선출되고 책임이 있고 해임될 수 있게 되었다. (190-191)
내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일종의 ‘문화 혁명’을 예시하는 대목이다. 직접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꼬뮌이 빠리에서 이루었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 시체 공시장에는 더 이상 시체가 없었으며, 야간 도둑도 없었고, 절도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848년 2월의 날들 이래로 빠리의 거리는 처음으로 안전했는데,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그들[진정한 빠리의 여성들]은 고대의 여성들처럼 영웅적이고 고결하고 헌신적이었다. 일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를 흘리는 빠리는-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느라고, 식인귀들이 자신의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자신의 역사적 창의성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는 단지 ‘빠리 꼬뮌’에 바치는 헌사만은 아니리라. 실제 목격자들은 꼬뮌기의 빠리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활력과 부산거림 그리고 즐거움의 도가니였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192)
사실상 인민이 조직되고 집단적으로 행동할 때만이 민주 정치는 가능하다는 교훈을 내전은 주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 관료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권을 상실하고 기껏해야 국가 행위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현대의 대중에게 ‘빠리 꼬뮌’은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가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194)
또 최갑수 선생은 레닌에 의해서 재해석된 ‘당 지도하의 pt독재’는 pt독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에게 그들 생애의 처음에서 끝까지 그리고 예외 없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rule)', 즉 노동자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즉각적인 혁명 이후의 시기의 노동자 국가의 확립, 그 이상도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Harl Draper의 말을 인용한다. 사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의 역할이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혁명 과정 즉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까지만 활약하고 그 이후에는 노동자 계급에 의해 맡겨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들은 역사과정을 지켜보다가 파리 꼬뮌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일까? 결국 문제는 ’정도‘의 문제이지만, 누구도 그 시대에는 그 정도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당이 언제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언제까지 혁명에 관여해야 하는가. pt또한 권력을 잡으면 pt의 ’상층부‘가 당으로 변화하지 않는가?
하지만 ‘꼬뮌’이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고 해서 이들이 ‘꼬뮌’의 다수였다는 말은 아니다. 맑스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소수였고, 그러기에 맑스는 내전에서 농민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꼬뮌’에 노동자 계급적 속성을 부여했을까? 그것은 혁명 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적 역할이요, 헤게모니였다. 즉 그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노동자 계급에게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이끄는 혁명을 뜻했다. (186)
결국 그러하다면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의 ‘공산주의자’ 또는 당을 설정한다면 이는 ‘당 혁명’ 또는 ‘공산주의’자‘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인 러시아 혁명과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결국 빠리 꼬뮌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과 대결하는 bg계급을 이겨내지 못했고, 이것이 빠리에만 국한된 소규모 혁명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외부와 연계되서 전국적, 전세계적 혁명이 일어날 때만이, 이 혁명은 영속적일 수 있다. 그리고 빠리 꼬뮌은 단기간이었다. 장기 혁명으로서 ‘당’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혁명세대 이후의 세대들은 회귀하지 않을 것인가? 권력의 달콤함과 권태와 게으름의 유혹이라는 쌍방향으로의 이끌림이라는 욕망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소규모 집단의 연대로 인한 조합이 해결일까?
내 의문은 많이 늦었지만, 다시 맑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그리고 차근차근히 내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서의 공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전에 지젝을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들이, 이제야 다시 울린다. 그렇지만, 아직 나는 맑스를 더 읽어볼 생각이다. 그런 후에야 후대의 사상가들을 접할 것이다. 아직은 젊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