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읽는다 - 두레신서 33
루이 알튀세르 외 지음, 김진엽 옮김 / 두레 / 1991년 3월
절판


우리가 가장 경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경제적 대상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로의 부주의한 역행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만약 경제적 대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가 하나의 비경제적인 구조에 의해 외부에서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점이다. 구조는 그 현상의 외견(aspect)과 형태 및 관계들을 수정하는 경제적 현상들의 외부에 있는 본질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현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부재한 하나의 원인으로서 현상들에 대해 효과를 미치는 경제적 현상들의 외부에 있는 본질도 아니다. 구조의 '환유적 인과성' 속에서 그 효과들에 대한 원인의 부재는 경제적 현상들과 관련하여 구조가 갖는 외재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조가 하나의 구조로서 그 효과들 속에서 갖는 내재성의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효과들이 구조의 외부에 있지 않으며, 구조에 의하여 특징을 각인받는 하나의 미리 존재하는 대상, 요소 또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조가 그 효과들 속에 내재하고, 스피노자적인 의미를 따르자면 효과들 속에 내재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이며, 구조의 전체적 실존(existence)은 그 효과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 고유한 요소들의 독자적인 결합에 불과한 구조는 결코 그 효과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239-240쪽

올해에 본격적으로 알튀세 공부에 착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올해 가을쯤이면? 가을까지는 레닌과 마오까지), 내 공부는 결국 알튀세로 집중된다. 구조와 주체에 대한 해결 없이는 한발작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린 사회주의 닫힌 사회주의 - 역비의책 29
안토니 라이트 지음 / 역사비평사 / 199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은이가 안토니 라이트, 현 영국 노동당 소속의 하원의원(2007년 2월 현재)이다. (똑같은 이름의 의원이 2명 있는데, Dr Tony Wright가 바로 지은이) 정작 이 의원의 홈페이지(www.tonywright.labour.co.uk/)에 가보면 이 책의 원저 Socialisms: Theories and Practices는 나오지도 않는다. 물론 실제 쓴 것은 사실인데, 그 만큼 '주저'는 아니라는 것.

그래도 그럭저럭 읽을만하다. 한국어 문장도 안되는 문장도 많고, 오타도 수두룩하지만...;;

어쨌든 저자는 '맑스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주의도 많다는 것을 다양한 흐름을 좇으면서 보여준다. 각각에 대해서 심오한 분석과 접근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다른 사회주의가 어떤 논점 때문에 분리되었는지 (혁명이냐 개량이냐, 조직이냐 자율이냐 등)를 살펴본다.

서구 사회주의 입장에서, 특히 '민주사회주의'라는 책을 끝까지 읽어도 결국 그것의 구체적인 특성을 잡아낼 수는 없는 그 입장에서 서술하였기는 했지만, 이는 책의 말미에 가서야 조금 등장 할 뿐이다. 소련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서술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사회주의'의 길로!라고 주장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민주사회주의'라는 입장에서의 비판이기는 하지만, 새겨두어야 할 대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맑스주의자들은 왜 pt가 혁명적이면서도, 왜 그들은 지금 혁명적이 아닌지, 왜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면서도, 왜 망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맑스의 사유 곳곳에 드러나는 헤겔적 사유와 결별해야 한다고 이미 주장된 바이지만, 이를 통해 '진정한 맑스'를 정제하는 일이 아니라, 맑스 또한 정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실천적 입장을 견지하였고, 그 시대의 사상가/활동가 였음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시대의 정세에 대한 대응과 새로운 이론적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현재 모든 이론가/활동가들은 이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한번 더 적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라 > 알튀세르를 위하여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게, 1993

(괄호 속 숫자는 쪽수이고 강조는 원문, [] 표시는 인용자가 한 것.)

 

오랜만에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고 싶어졌다. 가능한 독서목록에서, 그저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온갖 철학자들의 사변도 아니고, 언젠가부터 좀처럼 잘 읽히지 않는 문학 작품들을 제하고 나니 떠오른 것이 자서전이라는 장르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었던 “소설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에서 가르쳤던 교수의 주장도 결국 모든 소설 역시 자서전이라는 큰 틀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그때의 교재가 <꽃을 잃고 나는 쓴다>라는 한국단편소설을 엮은 책이었다.) 그래서 동네 도서관의 전기 코너에서 얼쩡거리다가 결국 잡은 책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가 쓴 자서전이라니, 철학책도 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문학에 몰두하지도 못하는 그런 와중에 꽤 그럴 듯한 절충이지 않은가? 라고 위로하면서.

 

 그럼 알튀세르는 어떤 사람이었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페리 앤더슨 같은 사람은 그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계보라기보다는 소련의 전통에 위치시키기도 한다는데, 그는 아마 맑스주의 역사상 누구보다도 ‘비교조적인’ 맑스주의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했던 것처럼 맑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철학이라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쓴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이론은 그야말로 Dia-Mat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끔찍한 철학을 넘어서, 오히려 맑스주의의 공백과 한계를 가장 극단까지 몰고 간 노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62세 되던 해에 자기 아내를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했으며, 그 이후 프랑스에서 그 이름은 엄청난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론까지도 금기시되었다.(언뜻 들은 얘기로는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제자 발리바르는 프랑스에서 국가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네덜란드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력을 잠시만 보아도 왠만한 소설 주인공 뺨치는 굴곡 많은 인생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 책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자신이 아내 엘렌느를 죽였던 바로 그 날의 기억을 기록하는 데에 할애된다. 그리고 그는 법원으로부터 면소판결(형법에서 구분하는 바처럼 정신착란 또는 강제에 의해 행위를 저지른 경우 범인의 무책임 상태를 이유로)을 받는데, 이로 인해 그는 ‘죽은 목숨’(lebenstodt), 즉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고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으나, 광기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푸코의 표현대로 ‘저술이 없는’ 자”이자 실종자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철학자, 역시 정신분석에 관한 여러 글들을 남겼던 이 인물에게는 어떤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역시 가족 얘기를 해야만 한다. 모계 쪽의 베르제 일가와 부계 쪽의 알튀세르 일가는 알제리의 어느 삼림 지방에서 서로 알게 된다. 베르제 일가에는 알튀세르의 어머니가 될 뤼시엔느와 여동생 줄리에트가 있고, 알튀세르 일가에는 역시 아버지가 될 맏아들 샤를르와 루이가 있었다. 뤼시엔느는 조용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루이와 함께 어울려 사랑에 빠지게 되고, 집안에서는 뤼시엔느와 루이를 약혼시켰다. 그러다가 1차 대전에 각각 포병대와 공군으로 징집된 이들 형제 중 루이가 전사한다. 그리고 아버지 샤를르는  뤼시엔느에게 자신이 루이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청혼한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는 후에 알튀세르에게 “상처처럼 피 흘리며 수난받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사후에 형성했다고 한다.(49) 그녀를 그녀의 수난과 남편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 어린 알튀세르는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바로 그녀가 사랑했던 원래의 인물 ‘루이’로 지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이름을 무척 혐오했다고 밝히는데 그 이름 Louis는 동일한 발음의 oui(‘예’라는 긍정의 표현)를 연상시키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oui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름은 lui(그 남자라는 표현)라는 익명의 제삼자를 암시하기도 하며, 물론 그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죽은 삼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인격이 박탈당했음을 느끼게 된다.

 

 이후에는 어린 시절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쭉 서술된다. 사업 수완은 좋았지만 매우 엄격하고, 아들에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말뚝과 쇠꼬챙이에 찔려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 관한 그의 ‘환상들’, 자살에 대한 갑작스런 충동, 영원한 아이나 다름없던 어머니. 누이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감... 특히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어머니가 지닌 병적인 공포는 내 육체와 자유를 지배했고 억눌렀다....아이들과 그토록 어울리고 싶어했던 나에게...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64) 그리고 청소년기에 그는 쟈끄(jacques)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하고 꿈꿨다고 말한다. 이 ㅈ 발음은 jet(정자의 사출)을 연상시켰으며, 깊은 아 발음은 ‘아버지의 이름’인 샤를르의 아와 같으며, 끄는 끄(queue 꼬리라는 뜻으로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기도 함)를 의미하고, 외할아버지가 들려준 농민봉기의 이름도 쟈끄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죽은 자의 이름(67)을 갖게 되었고, 어떤 ‘아버지의 이름’을 갖기를 원했던 것 같다.(이런 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그 자신 역시 남성적인 ‘힘’을 원했던 니체와 닮은 점이 아닐까? 문외한이라서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알튀세르의 후기의 생각들은 명시적으로 준거하지는 않지만 어떤 니체적 영감과 깊은 관련을 갖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둘러싼 양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며, 어머니를 유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어머니를 유혹해야 했다.”(69) 그리고 그가 간절히 원한 것 또한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었다.(가령 나중에 그는 어떤 명철한 여자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떡해서든 스스로를 파괴하길 원한다는 거예요.”) 그는 자기 분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삶에서 단지 하나의 인위적 존재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또 내가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사랑하고자 했고 또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한 사람들, 그로부터 차용한 인위적 수단과 사기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서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죽은 자였다.”(105) “나는 과장의 의지, 말하자면 편집증적인 의지와 자멸적인 의지가 하나의 동일한 의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113)


 이어서 고등사범을 다니기 이전의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다. 신체가 입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몸의 여러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회고, 그리고 역시 그 근육을 다루는 것의 일종으로 외국어에 대한 재능,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와 자신이 동일시했던 선생님 이야기 등등. 그리고 그는 당시의 카톨릭학생운동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결과 육체노동, 그리고 침묵에 바쳐진 수도승들의 삶”을 동경했으며, 그럼으로써 익명성 속으로 사라지길 바랬다고 쓴다. 10장에서는 포로 생활의 일화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바람은 이 생활 가운데서 어느 정도는 채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노동을 하는 것이 무척 마음 편했으며 농부들인 내 동료들과 우애를 나누며 함께 지내는 것이 특히 행복했다.”(118) 그는 포로 생활들을 통해 “인위적 술수 및 기만적 술책”이 그것을 사용하는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죄의식을 다스리는 경우, 즉 그가 자유로울 경우 그것은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후에 알튀세르가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프로이트의 발견을 상당히 앞지른 유일한 인물, 즉 마키아벨리가 규정지었던 규칙들에 나는 다가갔던 것이다.”(120) 또한 그 경험은 가족, 그에 말에 따르면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중 가장 끔직하고 가장 지독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그 가족”(121)의 세계로부터 떨어짐으로써 느끼는 행복을 가르쳐주었다. 로베르 포새르와 그람시, 레닌 이후 확립된 ‘기계’로서의 국가(그렇기 때문에 국가‘장치’이다. 아다시피 기계의 가장 큰 특징은 ‘자동성’이다)의 관념. 이 가족이라는 장치는 무엇을 하는가. 바로 “어린아이에게 그가 사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든 높은 가치들, 즉 절대적인 모든 권력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튀세르 말마따나 인류의 3대 나르시스트적 상처(갈릴레이의 상처, 다윈의 상처, 무의식의 상처) 이후 더 치명적인 네 번째 상처는 성스러움, 권력과 종교의 장소 자체인 가족이 된다. 물론 교훈만 있었던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언제나 [모든 종류의] 예비품을 마련해 두고자 하는 강박관념...모든 지출은 깎아 내리고 반면에 저축에 저축을 더해 가는 그 강박관념”(123)을 추가로 얻게 된다. 아마 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고, 또한 혼자 있지 않기 위해 친구들, 심지어 여자들도 예비하게 된 습관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마 글을 쓰던 당시에는 자신이 예전과 다름을 느끼고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 나는 지출과 위험이 없는, 즉 돌발사건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돌발사건과 지출(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지출: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은 삶 전체의 일부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그 궁극적 진리에서, 그리고 하이데거가 너무나 잘 표현했듯이 삶이라는 그 ‘사건’Ereignis에서, 즉 삶의 출현과 그 귀결에 있어서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내가 깨닫게 된 것 같다.”(124)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바로 포로생활의 탈출을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다.(여기서 어떤 이들은 김기덕의 영화 <빈집>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포로가 탈출한 것을 확인하면 독일군은 상당히 넓은 지역의 군대와 헌병대에 경보를 울려 거의 확실하게 체포에 성공했기에 그가 생각한 탈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선 자신이 수용소에서 사라져버려 탈출했다고 믿게 한 다음, 3~4주의 경계태세 후에 진짜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출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 즉 숨어버리는 것 그 안에 머무르면서 탈출하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도 후에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같은 책에서 그가 공산당에 계속 남아있는 일을 비판한 예를 들면서 랑시에르가 이 일을 알았더라면 여러 생각을 했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입학하고 수용소 생활로 인해 6년만에 다시 고등사범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에 그는 거의 평생동안 고등사범에서 머물게 되는데 그는 이 곳을 “어머니의 품과 같은 진짜 둥지”(187)라고 표현하는데, 거기서 그는 철학에 관한 작업을 지속함과 동시에 엘렌느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알튀세르를 만날 당시에 이미 뛰어난 공산당의 투사였다. 엘렌느는 특별히 이론적으로 정통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경험에 관해서라면 매우 뛰어났고(지나가는 길에 잠시 라캉이 등장하는데, 그는 언젠가 엘렌느에게 “당신은 매우 훌륭한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경험들은 알튀세르에게 현실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엘렌느의 관계는 흔히 이야기하는 바처럼 ‘평탄한’ 것은 아니었으며,(그는 엘렌느의 묵인 아래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울증과 과대망상증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무능하지 않나 하는 두려움(가령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를 출간한 뒤에 찾아왔던 심각한 우울증)과, 전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인 과대망상증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다.(그가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와 프로이트가 강조한 정서의 양가성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이론적 확인이다) 알튀세르의 기벽과 잦은 정신적 어려움에 대한 엘렌느의 고통에 관해서는 다음의 통렬한 구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너무나 자랑스럽게,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엘렌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폐쇄된 고독에서 진정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가 침대에서건 어디서건 뭐든지 얘기 좀 해요! 라고 내게 되풀이할 때 그녀의 고통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얘기 좀 하라는 것은 곧 자신이 고독하게 혼자 버려진 채 영원히 끔찍하고 고약한 여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게 뭐든지 얘기 좀 하라는 것, 그 말이 단순히 내게 모든 것을 달라는 것일 때, 즉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당신의 시선과 삶 속에서 진정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 불안을 막아낼 만한 것을 달라, 우리 사랑이 그저 지나가는 한순간일 뿐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에는 이미 이 손상된 이 사랑으로는 부족하리라는 그 불안을 막아낼 만한 것을 달라는 의미일 때, 이 고통에 찬 요구에 이 세상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160)


 그 다음 얘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울텐데, 그의 철학에 관한 이력, 당시에 철학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시 복귀한 학업에서 알튀세르는 바슐라르의 지도 하에 헤겔에서의 내용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철학에 관한 자신의 독서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나온다.

“철학 서적에 대한 나의 지식은 오히려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데카르트와 말레브랑슈는 잘 알고 있었으나, 스피노자는 조금 알고 있었을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소피스트들,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전혀 몰랐다. 또한 플라톤과 파스칼은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칸트는 전혀, 헤겔은 약간, 그리고 마르크스는 몇몇 부분만을 상세히 읽었을 뿐이다.”(190)

그는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배웠다고 말한다.(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에 나오는 표현대로라면 耳學이 될 것이다) 그는 또한 그것을 하나의 시추작업에 비유한다.(이 비유를 따온 책도 있다. 문성원의 <철학의 시추>) 그러나 아마 이러한 언급에서의 ‘약간’, ‘조금’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가령 그는 당시 프랑스에 헤겔을 알린 알렉산드르 코제브(라캉 역시 이 헤겔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그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지젝의 헤겔 이해 역시 코제브의 헤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런지?)의 글을 모두 읽어 보았으며 그가 헤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임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고 일축한다. 대신 <정신현상학>을 번역한 장 이폴리트를 높이 평가한다. 좀 길지만 알튀세르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으면 이러하다.

“그[코제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는 투쟁과 역사의 종말을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그 역사에 대해 그는 어이없게도 관료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역사, 즉 계급투쟁의 역사는 끝났으나 역사는 계속 진행되는데 단지 거기서는 일상적인 사물의 관리(administration)(생-시몽 만세!)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철학자로서의 자기 욕망과 고위 관료라는 직업적 조건[코제브는 재무부 고위직을 맡고 있던 러시아 출신 망명자였다]을 결합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헤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완벽한 무지는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코제브가 이 정도로 자신의 청중들, 즉 라캉과 바타이유, 크노 및 다른 수많은 이들을 현혹시킬 수 있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헤겔 자신의 책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202)

또한 당시에 활동했던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가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사르트르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철학소설가”일뿐이고, 사르트르와 더불어 프랑스에 현상학을 소개한(여기서 레비나스의 몫이 빠져있다는 것은 이채로운데) 메를로 퐁티는 그와는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닌 철학자였지만, 결국 유심론이라는 프랑스적 전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서술된다. “메를로는 진짜 위대한 철학자로, 데리다라는 거인이 나오기 전 프랑스의 마지막 철학자였으나,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주는 바가 없었다.”(204) 아마 이 현상학자들, 또한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평가절하된 것은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구조주의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론적 반인간주의(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실천적 인간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그리 이해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강단철학자들의 이름도 언급된다. 라베송, 베르그송, 르키에, 그리고 최근에 페르디낭 알키에, 마르시알 게루 등 숱한 유심론적 주석가들. 요컨대,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그가 쓴 것처럼 철학에서도 정치에서도 스승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그의 친구 자크 마르탱을 통해 알게된 두명의 사상가 쟝 카바이예스, 조르주 캉길렘 같은 비범한 인물도 있었지만 말이다.

다소 산발적인 서술이 계속되지만 흥미있는 에피소드는 “편지는 언제나 제자리에 도착한다”라는 라캉의 테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반대에 관한 얘기다. 즉 그는 “편지는 제자리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유물론적 테제를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라캉은 족히 10분간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리고 라캉은 “알튀세르는 이론가이지 실천가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알튀세르는 시인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제일원리와 마찬가지로 ‘실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분석 과정에서 어떠한 미세한 효과들일지라도 무의식과의 관련 하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라캉도 옳았지만 자신도 옳았다고 덧붙인다. 그 논쟁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은 철학적 입장에서, 그리고 라캉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발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실 그가 좀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인데, 철학과 정신분석 간의 쟁점에 관한 어떤 것을 암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분석에 관한 한 알튀세르의 태도는 미묘하다. 본인이 오랜 시간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라캉 등의 이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피분석자(요즘 식으로 말하면 분석주체, 이 책에서는 역전이가 반대-전위로 번역되어 있는 것 같다)의 한 사람으로서 정신분석에 관한 비판적인 태도가 책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그의 유고집 중 <정신분석 논집>이 번역된다면 그 사정을 파악하기 용이하겠지만 이는 국역된 알튀세르의 글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프로이트와 라캉’의 논문(<아미엥서의 주장>에 수록)에서의 정신분석에 관한 긍정적 태도와는 달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나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 같은 논문(<알튀세르와 라캉>에 수록)에서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에 관한 강한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사실 이것에 관해 다루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인데, 아마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말한 것처럼 하버마스-푸코의 모더니티 논쟁의 배후에는 훨씬 더 심오한 논쟁, 바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런지? (관심있는 독자들은 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진태원씨와 홍준기씨의 논쟁들(<라깡의 재탄생>과 <철학사상> 16집에 수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진태원씨의 논문은 연작 논문이므로 조만간 ‘알튀세르의 유령들2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학에 관한 자신의 입장과 정치에 관한 입장들이 전개된다. 육체에 대한 열광(그가 각각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그것을 찾은 것은 바로 스피노자-“누구도 아직 신체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규정하지 못했다”-와 맑스였다)을 통한 맑스주의에의 입문, 철학을 뒤흔들어놓고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으로서 기원, 목적, 진리보다 더욱 근본적인 ‘실천’이라는 범주, 그리고 자신이 근 30년간 보존해오고 있는 사유 즉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간략한 설명, 공산당의 많은 과오들과 광범위한 대중운동에 관한 희망-그 유명한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위,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의 우위의 정식으로 요약되는-등등.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들이고, 내가 당장 쓸 역량도 되지 않아 여기서 다루기는 어렵고 만약 가능하다면 다른 기회를 빌려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은 그의 다른 책 <철학에 대하여>의 내용과 상당히 겹치기에, 가능하면 <철학과 맑스주의> 등과 읽으면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스케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막바지에 가면 다시 엘렌느에 관한 회상으로 돌아간다.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우발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한 ‘과잉결정’이 존재했다. 며칠 전부터 급격히 심해진 그의 우울증, 상태의 악화 때문에 그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엘렌느가 그것을 만류한 점, 몇 주간 계속되었던 이 부부의 두문불출, 엘렌느가 계속해서 자살 충동을 내비쳤으며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던 점,... 어느 날 침대 위에서 엘렌느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던 도중 그는 불현듯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가 그녀의 자살을 도왔던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정신병에 시달렸던 그의 불안, 여성에 관한 두려움-이런 표현이 감히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탓이었을까? 아니 일단 그것이 교살이기는 했을까? 어떤 의사의 말처럼 목에는 급소가 많기에, 어쩌면 교살이 아니라 마사지 도중의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송기형 교수가 쓴 한국어판 해설에서처럼 그의 생애를 단순히 하나의 스캔들로 바라본다거나, 잡담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 그리고 발리바르가 말한 것처럼 알튀세르의 책들은 읽어보지도 않고 단지 자서전의 단편적인 사실들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프랑스 국내외의 언론들은 그 엄청난 사건 이후 온갖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그를 아내를 죽인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철학자로 매장한 일이 있다. 거기에는 이미 철학=광기, 공산주의=범죄 등의 등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을 하나의 자기 해명으로서 내놓는다. 물론 이것은 구차한 자기변명의 차원은 아니다.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이 책은 자신의 고통받은 삶에 대한 드문 고백이며, 하나의 비극적 문학작품일 것이고, 현대를 가로지르는 온갖 역사적 정세에 대한 비평이자 자신이 몸담았던 그 격렬한 운동과 철학에 대한 애도이자 해체, 희망의 표현이다.

글쎄, 그렇다고 해도 죽은지는 15년이 지났고 그가 사고했던 맑스주의는 한물 간 것처럼 보이고, 그가 밥벌이했던 철학, 이론에서의 계급 투쟁이자 과학에 대해서는 정치를, 정치에 대해서는 과학을 표상했던 바로 그 '철학' 역시 마찬가지로 찬밥 신세로 보이는 때에 알튀세르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용을 갖춰 답하긴 이른 것 같아도 그의 유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고,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는 현실은 그에 대한 그야말로 공정한 애도와 극복으로서의 계승을 요구한다. 자율주의와 라캉주의라는 여러가지 좌익적 운동의 난립과 유행 속에서 알튀세르주의는 수상쩍게 억압된 것, 하나의 증상. 계속해서 회귀하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하나의 대중운동이라는 영원히 낡지 않는 표상으로서. 이 유령은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린 사회주의 닫힌 사회주의 - 역비의책 29
안토니 라이트 지음 / 역사비평사 / 1997년 3월
장바구니담기


"각 민족의 문화적 특성은 각 민족의 사회주의를 낙인찍는다"는 바우어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바우어가 지적하고자 했던 함의 중의 하나는, 상이한 민족적 전통들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고유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민족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내부에서 1914년 이전의 논쟁에 기여하도록 의도됐던 주장은 그 이후에 더욱 긴급한 실천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64쪽

소련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는 종종 주장되듯이 바로 그 사회라는 관점에서는 적합하지만, 이러한 점이 소련식 사회주의를 전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으며, 민주사회주의자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어떠한 가치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세계는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들로 가득 차 있다. 단일한 전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관점에서 보면 이론적 해체의 과정을 나타내주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항상 다양성에 의해서 해체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오랜 동안 이러한 다양성이 공식 공산주의와 공식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적대적 블록으로 압축되고, 더구나 냉전에 의해 이러한 압축이 더욱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은 그것을 지탱해온 여러 전통과 함께 다시 나타나고 있다.-68쪽

계속 떠올리는 것은 1920-40년대까지 조선의 조합주의 운동.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얼마만큼 진전되었는가. 역시 나는 문학보다는 역사학이나 문화학 쪽으로 가고 있는듯; ㅋ 뭐 어때!
어쨌든 사회주의의 다양한 전통들은 아직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맑스'에 집중하는 이유는, 역시 '소련'에 대해서, 그 실패에서부터 우리는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내전 맑스 엥겔스 에센스 3
칼 마르크스 지음, 안효상 옮김, 최갑수 해제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옮긴이의 말(안효상)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가 가져다 준 여러 가지 의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츰 드러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가라는 관제 고지의 점령을 통한 이행의 불가능성이다. 이는 도구로서의 국가라는 관념의 일면성을 보여 주며, 이에 따라 집권을 지향하는 조직으로서의 당 개념을 재고하도록 만든다.

󰡔프랑스 내전󰡕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위와 같은 판단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형태 혹은 사람들의 유대 관계를 기획하는 데 이론적, 역사적 준거점이 된다는 점에 있다. (8~9)

「공산당 선언」에서 pt독재혁명은 bg혁명과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동일성은 맑스가 역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추상화와 단순화. 맑스가 앞으로 일어날 pt혁명이 bg혁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은, 그가 다른 혁명과정들을 비교하는데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는 항상 두 개의 혁명을 비교하며 그 공통적 ‘형식’과 그 ‘내용’의 상이함에 주목한다. (그의 “프랑스 혁명 3부작”모두에 해당되는 사항) 옮긴이는 결국 국가권력(기구)의 pt계급 독재가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파악한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또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pt계급 독재가 역사상 실현된 예가 바로 이 ‘프랑스 내전’ 또는 파리 꼬뮌이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예이다. (그렇다면 옮긴이가 말하는 ‘현존 사회주의’붕괴는 어떠한 예인가? 공산당 독재라는 의미에서 ‘당’이라는 매개(또는 pt와 구분되는 ‘주체’)의 실패? 이는 이제 ‘레닌’의 실패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옮긴이는 이를 의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옮긴이의 말이 책의 ‘앞’에 있다.)

(맑스는) 혁명적 대중 운동 속에서 실천적 진보를 보았고, 이러한 시도에 근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가 긴급한 정세 속에서 씌어졌음에도 풍부한 이론적 함의를 담고 있는 󰡔내전󰡕이다.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맑스(주의)의 지향은 ‘정치 경제학 비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론적, 현실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는 정치 혁명과 구분되는 사회 혁명의 과정인데, 이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라는 정치 혁명과 달리 자본과 국가 장치의 동시적 변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집권을 위한 당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정치 형태는 관념의 고안물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리 꼬뮌이었다. “꼬민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10)

결국 옮긴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당’이라는 매개/주체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pt 독재가 요구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파리 꼬뮌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파리 꼬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결국은 bg세력에 의해서 처참하게 학살당하지 않았는가? 파리 꼬뮌 또한 pt의 국가 기구의 전복과 장악이지 않는가? 비록 ‘당’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파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인구와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이렇게 그리스 아테네식 ‘도시 공산주의’만이 ‘노동자 통제’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인가? 파리 꼬뮌은 무엇인가?

2. 칼 맑스의 󰡔프랑스 내전󰡕 독일어 제3판 서설 -F. Engels

1870년 7월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처음부터 프로이센 육군이 프랑스를 제압하였고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동시에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피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선거를 마치고 28일 시청 앞 광장에 20만의 시민을 동원하여 코뮌 성립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29일 집행위원회 아래 군사 ·재정 ·식량 ·노동 ·교환 ·교육 ·외교 ·사법 ·보안의 9위원회가 성립되고 시민생활의 자주관리체계가 정비되었다. 90명의 코뮌의원의 성분은 자유직업자 ·중산시민이 대부분이고 노동자는 20명이었다.

블랑키스트 ·프루동파(派) ·자코뱅 당원 등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의 폐지 및 인민에 의한 국민군의 설치, 집세의 미지불분의 일시연기, 관리봉급의 최고액 결정, 종교 ·재산의 국유화, 공장주가 방기(放棄)한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코뮌이 지상 최초의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려고 분주한 틈에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은 5월 21일 맥마흔의 지휘하에 파리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피의 1주일’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파리코뮌’)

꼬뮌은 처음부터 곧바로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자 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낡은 국가 기구로는 더 이상 관리해 나갈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노동자 계급은 방금 전취한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반대하여 이용되어 온 모든 낡은 억압 기구를 제거해야 하며 (27)

그럼 그 제거하고 난 후 어떻게 ‘통치’ 즉 유한재화를 분배, 필수 생산물들을 생산할 것인가? 어떠한 조직이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즉답은 없다. 대신 국가 관료에 의한 민중의 지배가 아니었다는 것만 다시 강조한다.

국가 및 국가 기관이 사회의 종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때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 불가피했는데, 이것을 반대하여 꼬뮌은 확실한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첫째로, 꼬뮌은 행정, 사법, 교육의 모든 직책들을 관계자들이 보통 선거에 의거해서 선출하여 임명하고 게다가 이 관계자들에게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둘째로, 꼬뮌은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공무원에게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정도의 임금을 지불하였다. (28)

선거. 선거. 또 선거들. 그만큼 토의할 수 있는가. 그만한 정보를 모든 유권자에게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고대의 추첨에 의한 공무원직이 보다 pt적이지 않을까. 계급으로서의 pt가 진정 존재한다면.

실제로는 국가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 기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는 민주 공화제에서도 군주제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가는 기껏해야 하나의 악에 불과하며, 계급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악을 물려받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꼬뮌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성장한 한 세대가 모든 국가 폐물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될 수 있는 한 국가의 최악의 측면을 감소시킬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빠리 꼬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다. (29~30)

결국 파리 꼬뮌 또한 그 ‘악’을 안고 갔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앞의 옮긴이의 주장은 엥겔스의 주장에 전면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끝끝내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파리 꼬뮌은 어땠는가? 우리는 이를 알기 위해서, 파리 꼬뮌의 동시대인이자 당대 뛰어난 역사학자, 철학자, 공산주의 운동가인 맑스의 해석에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

맑스는 프랑스 내전 또한 계급투쟁의 일환이라고 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 내부장관 (임시 수상)인 띠에르가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를 하였는가를 보인다. 실상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로이센 침공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갇힌 직후, 공화국을 선포한 티에르 일당은 공화국 시작부터 프로이센의 프랑스 침공에서 자신은 방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넉 달동안 투항하지 않았던 것은 이 혼란기를 빌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부의 전유자들은, 공화국의 폭력적 전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 비용을 부의 생산자들의 어깨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엄청난 몰락은 토지와 자본의 이 애국적 대표자들에게 박차를 가하여, 외국 정복자가 지켜보고 비호하는 가운데 대외 전쟁에 내전을, 노예 소유주들의 반란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8)

맑스는 집요하게 띠에르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파리 꼬뮌까지 얼마나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했는지를 밝힌다. 이는

띠에르, 이 난쟁이 기형아는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매혹해 왔으니, 이는 그가 부르주아지 자신의 계급적 부패의 가장 완성된 정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60)

2

언제나 대칭적으로 (정-반-합의 연쇄인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파악하기 좋아하는 맑스는 (예를 들어 bg 혁명과 pt 혁명) 1849년 6월 혁명 때 부르주아가 pt를 과격하게 진압하던 것과 달리 파리 꼬뮌 하에서는 부르주아의 시위를 평화롭게 용인하였다는 것을 보인다.

3

의회제 공화국이 최소한 그 지배 계급의 여러 부분들을 분리시킨 국가 형태라면, 이와는 반대로 루이 보나빠르뜨를 대통령으로 하는 의회제 공화국은 이 계급과 그들의 듬성듬성한 대오 외부에 살고 있는 사회 전체 사이에 심연을 만들었다. 이전의 정부 아래에서 저 계급의 내적 분열이 여전히 국가 권력에 부과했던 제한은 그들의 단결에 의해 이제 사그라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이 연합한 유산 계급은 이제 국가 권력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국민적인 전쟁 도구로서 무자비하고 뻔뻔스럽게 사용하였다. (83-84)

제정은 부르주아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노동자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가지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제도이다.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복귀하는 사태는 맑스가 계속 언급하는 로마사에서 볼 때, 카이사르 시기이다. 이 때 로마는 더 이상 과두정치가 기능하지 못하여 뛰어난 인물로 권력을 집중시킬 필요성이 있었다고도 서술된다. 그런데, 당대 프랑스는 왜 제정으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을까. 루이 보나빠르뜨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농민을 기만하여 그들을 주된 지지세력으로 업고 대통령이 당선한 이후, 그가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은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서술된다.

어쨌든 pt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bg는 연합하였고 이러한 제정에 대한 직접적 대립물로서 꼬뮌이 등장한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가 2월 혁명을 수행할 때의 “사회 공화국”이라는 구호는 계급 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폐지해야하는 공화국에 대한 모호한 열망을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꼬뮌은 이러한 공화국의 현실적인(positive) 형태였다. (85)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0-91)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는 것이 중요하다. 맑스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독일 이데올로기」나 「공산주의 선언」에서도 나타나듯이 명확한 정치형태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의 투쟁과정 속에서 역사의 진보 속에서 마침내 발견되어야 할 정치 형태였고, 이것을 맑스는 마침내 ‘꼬뮌’을 통해서 본다. (구체적으로는 최갑수 선생의 ‘해제’를 참조할 것)

이러한 ‘꼬뮌’에 대해 bg정부는 ‘민족’이라는 경계를 벗어던지고 연합하여 계급 투쟁으로 나아간다.

낡은 사회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인 노력은 민족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계급투쟁을 연기하기 위한 것이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타오르자마자 내팽개쳐지는 정부의 순전한 사기임이 증명되고 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국민적 제복으로 가장할 수 없다. 국민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하나가 된다! (122)

해제 「빠리 꼬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민주주의」 -최갑수

사실 맑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은 당대사로, 맑스가 입각한 조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당시의 정세와 제한된 정보에 의해 상당부분 ‘구성’되어 소개될 수밖에 없다. 또 당대인의 입장에서 당대인 독자에게 당대적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많다. 이를 잘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 최갑수 선생의 해제이다. 프랑스 혁명시기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의 자세한 설명이 명쾌하다.

결국 맑스가 말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행했는지 또는 행하려 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꼬뮌‘이 취한 조치들을 “노동자 계급을 위한 조처들”, “노동자 계급을 위한, 그러나 주로 중간 계급을 위한 조처들”, “일반적인 조처들”, “공안을 위한 조처들”, “재정 조처들”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론느 제빵공의 야간 작업 금지, 자본가들이 폐쇄한 작업장을 노동자 협동 조합에 맡긴다는 계획, 공창(公娼)제의 폐지, 교육의 세속화 조치, 실질적인 무료 의무 교육제, 임차인과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과 약속 어음에 관한 조치, 징병제의 폐지, 도박의 금지, 정교 분리, 기요띤의 소각, 정치범의 석방, 군국주의의 상징인 방돔(Vendome)광장 원주의 파괴, 헝가리 출신의 ’제1 인터‘ 회원인 레오 프랑켈(Leo Frankel)의 ’꼬뮌‘ 의원 선출 유효화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외에도 꼬뮌 공무원의 연봉이 6,000프랑을 넘을 수 없게 한 연봉 상한제, 꼬뮌의 연합을 통한 국가의 재조직안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155)

이들이 생산 수단과 경제 운용의 주체로 상정했던 것은 중앙 집권화된 국가 아니라 ‘조합’과 ‘노동조합’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자신이었다. (.....) 그 전망에 따르면, 국가-꼬뮌의 도움을 받아 사회 작업장이 확산되면 고용-피고용 관계와 착취가 사라지고 궁극적으로는 동업 조합과 노동조합의 권력이 정치권력을, 곧 ‘사무르이 관리’가 ‘인간의 통치’를 대체할 것이었다. 그 법령은 단기간이나마 적용되었고, 일부의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 하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노동 협동 조합식의 사회주의가 빠리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분명 그들에게 전통적인 요소들이 지배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사회주의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으며 그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1848년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의 예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172-173)

또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3층의 이데올로기적인 중층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꼬뮌군’에 의한 정서적 공감대는 더욱 커져 1층에 해당하는 애국주의는 사실상 ‘빠리 꼬뮌’의 이념상의 토대를 이루며 그 위에 자꼬뱅적이고 블랑끼주의적인 혁명주의라는 2층이 놓이고 꼭대기인 3층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끌어안았던 사회주의가 자리하였던 것이다. 이 세 층은 그 경계선에서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서 같이 호흡하였던 ‘꼬뮌’의 투사들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 이념의 세게에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빠리 꼬뮌’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165)

이러한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특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되고, ‘현실 사회주의’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당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 대부분 비판적, 비난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맑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생각했던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빠리 꼬뮌’은 맑스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 곧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는 동시에 맑스는 그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인식과 원리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경험을 의미했는가 하면, ‘꼬뮌’은 그가 자본주의가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가는 단계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도기의 특징들을 생전에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74)

󰡔내전󰡕의 다음의 구절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윤곽을 제시해 준다. “고뮌은 의회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 기구여야 했다. 이제까지 중앙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책임이 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꼬뮌의 관리로 전환되었다. 다른 모든 행정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뮌 의원들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직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공직은 중앙 정부의 앞잡이들의 사유 재산이기를 중지하였다. 시 행정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국가에 의해 행사된 발의권 전체가 꼬뮌의 수중에 놓였다.” “꼬뮌의 첫 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 옛 정부의 물리적 강제력의 도구인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한 꼬뮌은 ...... 억압의 정신적 강제력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 모든 교육 기관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이 제거되었다. ...... 사법 공무원들은 ...... 모든 정부에 대한 자신의 굴종을 은폐하는 데 불과하였던 저 외견상의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 그들도 앞으로는 선출되고 책임이 있고 해임될 수 있게 되었다. (190-191)

󰡔내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일종의 ‘문화 혁명’을 예시하는 대목이다. 직접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꼬뮌이 빠리에서 이루었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 시체 공시장에는 더 이상 시체가 없었으며, 야간 도둑도 없었고, 절도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848년 2월의 날들 이래로 빠리의 거리는 처음으로 안전했는데,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그들[진정한 빠리의 여성들]은 고대의 여성들처럼 영웅적이고 고결하고 헌신적이었다. 일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를 흘리는 빠리는-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느라고, 식인귀들이 자신의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자신의 역사적 창의성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는 단지 ‘빠리 꼬뮌’에 바치는 헌사만은 아니리라. 실제 목격자들은 꼬뮌기의 빠리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활력과 부산거림 그리고 즐거움의 도가니였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192)

사실상 인민이 조직되고 집단적으로 행동할 때만이 민주 정치는 가능하다는 교훈을 󰡔내전󰡕은 주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 관료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권을 상실하고 기껏해야 국가 행위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현대의 대중에게 ‘빠리 꼬뮌’은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가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194)

또 최갑수 선생은 레닌에 의해서 재해석된 ‘당 지도하의 pt독재’는 pt독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에게 그들 생애의 처음에서 끝까지 그리고 예외 없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rule)', 즉 노동자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즉각적인 혁명 이후의 시기의 노동자 국가의 확립, 그 이상도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Harl Draper의 말을 인용한다. 사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의 역할이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혁명 과정 즉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까지만 활약하고 그 이후에는 노동자 계급에 의해 맡겨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들은 역사과정을 지켜보다가 파리 꼬뮌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일까? 결국 문제는 ’정도‘의 문제이지만, 누구도 그 시대에는 그 정도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당이 언제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언제까지 혁명에 관여해야 하는가. pt또한 권력을 잡으면 pt의 ’상층부‘가 당으로 변화하지 않는가?

하지만 ‘꼬뮌’이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고 해서 이들이 ‘꼬뮌’의 다수였다는 말은 아니다. 맑스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소수였고, 그러기에 맑스는 󰡔내전󰡕에서 농민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꼬뮌’에 노동자 계급적 속성을 부여했을까? 그것은 혁명 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적 역할이요, 헤게모니였다. 즉 그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노동자 계급에게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이끄는 혁명을 뜻했다. (186)

결국 그러하다면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의 ‘공산주의자’ 또는 당을 설정한다면 이는 ‘당 혁명’ 또는 ‘공산주의’자‘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인 러시아 혁명과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결국 빠리 꼬뮌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과 대결하는 bg계급을 이겨내지 못했고, 이것이 빠리에만 국한된 소규모 혁명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외부와 연계되서 전국적, 전세계적 혁명이 일어날 때만이, 이 혁명은 영속적일 수 있다. 그리고 빠리 꼬뮌은 단기간이었다. 장기 혁명으로서 ‘당’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혁명세대 이후의 세대들은 회귀하지 않을 것인가? 권력의 달콤함과 권태와 게으름의 유혹이라는 쌍방향으로의 이끌림이라는 욕망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소규모 집단의 연대로 인한 조합이 해결일까?

내 의문은 많이 늦었지만, 다시 맑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그리고 차근차근히 내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서의 공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전에 지젝을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들이, 이제야 다시 울린다. 그렇지만, 아직 나는 맑스를 더 읽어볼 생각이다. 그런 후에야 후대의 사상가들을 접할 것이다. 아직은 젊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야 할 시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2-15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꼬뮌에 관한 책을 찾고 있었던 중인데..호호 감사합니다.

기인 2007-02-1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ㅎㅎ 어제 헌책방 갔었는데, 가면 80년대 번역된 일본사람들이 쓴 책들 꽤 있던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