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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즐거운 제국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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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은 물처럼 존재한다.불행은 해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을 뜯어먹는다.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    브레히트의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중에서

<제국>을 읽기 전에 '제국 논쟁'을 접했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2차 저작이나 논쟁은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하다.딸기를 먹는 것은 쉽지만 딸기 케이크 레서피를 읽는 것은 어려운 것 처럼.<진보평론>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국 논쟁'을 다 따라가는 것은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책이 번역된 후 국내외 세계 체제론자 또는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범좌파의 '제국' 비판과 자율주의자들의 반비판이 이어졌다.그러나 국내에서 '제국 논쟁'은 정점을 지난 듯 하다.인터넷 한 구석에서는 '제국 논쟁'의 잔불마저 꺼져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글들도 가끔 찾을 수 있다.

일단 <제국>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국 논쟁>을 먼저 읽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제국> 자체도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거기에 주요 개념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비판의 전체적 맥락까지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제국 논쟁>은 머리털 밑 신경세포를 괴롭히는 일이다.

선행과정이 좀 지저분해졌지만 <제국>을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물론 내용과 개념을 이 잡듯이 이해하려고 달려든다면 또 다른 편두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적당히 넘겨가면서 보는 유연성도 필요하다.<제국>을 읽는게 무슨 수학 정석의 미적분의 공식을 적어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들은 있다.사회과학적 관심과 상상력,그리고 졸음을 이겨낼 정도의 끈기말이다.

<제국>으로 들어가자.도대체 <제국>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들고 다녔더니 회사차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가 그런다. "어..제국...음..무슨 대하 무협 소설인가 본데 "..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네그리는 제국의 기본 가설을 이렇게 말한다."주권이 단일한 지배 논리하에 통합된 일련의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를 띠어 왔다는 것.이러한 새로운 전지구적 주권 형태를 제국 이라고 부른다"

네그리는 맑시즘을 주권개념으로 이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어쨋거나 쉽게 생각해서 '제국'은 세계화된 어떤 힘이다.과연 이런게 있을까 하고 싶을때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끌고 가자.전지구적 주권형태가 없다라는 것도 '제국 비판' 의 하나인데 그걸 물고 늘어지면 진도 안나간다.<제국>이란 것이 아주 독특한 것은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세상은 거대한 어항이고 그 어항은 물로 가득차 있다.우리들은 물고기인셈이다.제국의 바깥이 없다는 것은 이 체제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제국>의 범주안에 포섭된다는 것이다.이것도 이해 안된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네그리가 드는 예를 보자면 수많은 국제적인 NGO들도 결국엔 <제국>을 땡실 땡실하게 만들어주는 개량적 제도들일 뿐이다.좀 더 나가면 네그리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구분도 없고 남과 북의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적 이행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기존 좌파들의 전략에 대한 네그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적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 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국지적 저항전략은 적을 잘못확인하고 그래서 적을 감춘다.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계이다.

이미 할 비판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가득차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비판은 수첩 속에 적어 놓고 계속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도를 빼야한다.

아..한편에서는 상식적으로(특히 반미정서가 높은 우리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인데) 미국이 제국 아니냐고 말한다.그러나 이들은 단호히 어느 특정 국민국가도 제국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제국으로의 이행은 근대적 주권의 황혼기에 나타난다.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하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 하는 지배장치이다.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에서 몇 가지로 구분됐던 국가의 색깔들은 제국적인 전지구적 무지개 속에서 합쳐지고 섞일 것이다.미국은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미국의 연방헌법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예외성은 '제국'적 속성(제국주의적이 아닌)을 지닌다.네그리는 로마제국의 권력체계를 인용한다.미국은 출발선상에서 공화주의적 마키아벨리 전통과 연결된다.특히 폴리비우스의 제국적 로마 모델을 따른다.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3원분립은 팽창성을 특징으로 한다.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제국이 땅덩어리가 있는 국민국가적 상상력은 벗어난 일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과연 그것의 현실성은 떼어놓고 보면 말이다.)

네그리는 <제국>을 기획하기 위해 선배 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스피노자,마키아벨리,맑스,푸코,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주 언급된다.그중 가장 먼저 꼽아야 사람은 스피노자이다.그는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을 차용한다.그리고 다음으로 푸코의 '생체정치학'은 인용한다.푸코는 '훈육사회'와 '통제사회'를 구분하였다.<제국>의 이행은 통제사회로의 이행선상에 있다.제국의 지배대상은 사회생활 전체이며 따라서 제국은 전형적인 생체 권력 형태를 나타낸다.개인들에 대한 사회의 통제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속에서 그리고 신체와 함께 이루어지기도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국>은 닫힌 체계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물고문같은 것이다.그러나 <제국>기획은 그게 목적이 아니다.탈출구가 있고 전복의 가능성이 훨씬 많이 열려있다.네그리와 하트는 그래서 <제국>을 더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어디에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제국> 그 자체가 스스로를 붕괴시킬 답을 안고 있다.제국은 제국 자신이 지닌 일반법칙에 의거해서만 그리고 제국이 제공하는과정들이 지닌 현재의 한계들을 넘어 그 과정들을 밀어붙일 때에만 효과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지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 제국과 만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열나게 인용하는 연구도 있는 반면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배격하는 것도 있으니 흔히 말하는 유럽 형이상학의 족보들이다.데카르트,칸트,헤겔...특히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단절하라고 말한다.천천히 읽어보면 어렵지 않다.근대 권력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면 탈근대주의적 기획은 비변증법적이어야한다는 논리가 된다.바바(탈식민주의 호미 바바이다)의 일차적 공격대상은 이분법적 분할이다.전체 탈식민주의 계획은 식민주의적 세계관이 근거하고 있는 이분법적 분할에 대한 거부에 의해 규정된다.세계를 둘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대립 진영들(중심 대 주변,제 1세계대 제 3세계)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셀 수 없는 부분적이고 이동적인 차이들에 의해 항상 규정되고 있다.세계를 이분법적 분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바바는 또한 총체성 이론들과 사회적 주체들의 정체성 동질성 볼질주의에 관한 이론들을 거부하게 된다..바바의 분석을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일관되게 이러한 다양한 적대자들을 열결시키는 유령은 헤겔의 변증법이다.즉 서로 대립하는 본질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일관된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도입부에 <제국>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그리고 <제국>으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 근대를 분석한다.(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네그리는 근대성의 두가지 양식이 있다고 말한다.혁명과 반혁명이다.유럽 르네상스기는 신이라는 초월성을 거세한 혁명의 시간이었다.그러나 이내 반혁명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승리한다.르네상스가 종교전쟁,사회전쟁으로 마감했던 것처럼.그러나 반혁명이 성공했다고 모든게 끝이 아니다.내전은 근대성 개념속에 흡수되어 끊임없이 내적인 위기를 조성한다.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를 들고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이다.계몽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수많은 주체들을 훈육시킬 수 있는 선험적 장치를 구축함으로써 중세 문화의 절대적 이원론을 재생산하지 않고 내재성 관념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애국하는 '국민국가'의 화려한 등장하여 질서와 명령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한다.19세기-20세기에와서 근대적 주권의 국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내전을 가져왔다.국민들은 갈등 상태의 계급 주체들의 신비화로서 혹은 대역으로 제시되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제국주의와 제국은 완전히 다르다) 국민국가는 계급 투쟁과 계급 투쟁의 전복 효과들을 해소하고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필요로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자본주의적 정복의 역사적 새로움을 비자본주의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으로 본다.자본주의적 재생산 및 축적의 핵심은 반드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함의하고 있다.자본은 달리 행동할 수 없다.자본주의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국주의의 해악과 대결할 수 없다.

어찌 어찌하여 식민주의도 제국주의도 마감하고 있는 시점이 중요하다.여기서 한참 기다린 '제국'이 나오는 것이다.

<제국>이 안과 밖이 없는 체제라면 도대체 누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생산 경제에서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생산양식과 노동 주체의 변화에 촛점을 맞춘다.전통적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더이상 혁명 주체가 될 수 없다.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다.그리고 '다중'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유출된다.Mutitude는 사전적으로 특정 지배장치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고 소통하면서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이들의 저항은 근본적으로 도주,탈주,유목주의를 표방한다.<제국> 하에서 다중은  아무런 매게 없이 <제국>과 면하기 때문에 더 폭발력을 갖는다.다중이 갖는 요구는 크게 전지구적 시민권,사회적 임금권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생산수단의 재전유는 지식,정보,소통,그리고 정서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통제하는 것이다.이를 통해 다중은 자기통제 및 자율적인 자기 생산을 가능케한다.궁극적으로 다중은 제국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다르게 움직이는 기계(기계가 공장 기계가 아니다.)를 발명하는 것이다.(짧게 쓰려고 했는데 결국 또 길어졌다.ㅜㅜ 인용이 많다보니 ㅜㅜ)

<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듯 하다.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쉽게 <제국 비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정환/정성진 논쟁 부터해서 등등등) <제국>의 역자이자 국내 자율주의 전도사인 전남대 윤수종 교수 역시 책 말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단다. 그들이 제국으로의 이행을 강조하다보니까 근대적인 성격의 잔존에 대해서 과소평가한 점, 그리고 이행 경향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완전히 다른 사회로 넘어간 것 같이 설명한 점 등을 지적한다.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책 <제국>이 유럽적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저자들의 한계설정,그리고 시대의 추이를 미루어보는 예언적 성격 등을 고려한다면 그 부분만 물고 늘어지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변혁 투쟁 역시 그 변화에 따라서 변화해야한다.적들이 대포 쏘고 있는데 돌도끼들고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자본의 입체적 압박에 숨을 못쉬고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있던 시점이어서 이 책<제국>이 더욱 반갑다.물론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인식차이,개념의 모호성,실천적 구성력의 부재,과도한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도 머릿 속을 빙빙 돈다.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낙관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잠시 즐거운 꿈일지라도 말이다.)

천천히 위리는 전지구적 잔치를 위해 도착하고 있는 아주 맛있는 많은 요리 접시들처럼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오는 기증품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상이 꽉차고 있다.축제를 준비하자!   

p.s)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간혹 등장하는 문학적인 표현들이 감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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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 시공 로고스 총서 30 시공 로고스 총서 30
게오르그 리히트하임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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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문예이론이 많이 비난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문예의 정치에의 복속 때문이었다. 이것만을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우선 제쳐놓고, 레닌 이후 60년대까지 맑스주의 문예이론이 정치에 복속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레닌 이후 60년대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예이론가인 루카치는, 정치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또 후에는 다시 번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다른 맑스주의 문예이론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루카치 사상을 통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당대 정치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리히트하임의 이 얇은 책은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유려한 번역으로 놀라게 하는 이종인 선생의 번역과 긴요한 역주도 좋다. 다만 이렇게 얇은 책이니만큼, 루카치 '사상' 그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루카치 사상의 정치적 배경을 이해한다는 의도로 읽는다면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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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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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우츠키와 파네쾨크의 논쟁
중요한 것은 기존의 국가기구(부르조아지와 수천가지의 끈으로 묶여 있고 타성과 습관에 철저히 물들어있는)가 살아 남을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어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혁명은 새로운 계급이 기존의 국가기구의 도움을 받아서 명령하고 통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급이 기존의 기구를 타도하고 새로운 기구의 도움으로 명령하고 통치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다. -142쪽

사회주의 하에서는 보다 많은 '원시적' 민주주의가 불가피하게 남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문명화된 사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중은 선거와 선출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하에서 만인은 통치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곧이어 그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144쪽

기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주장한 것에 대한, 레닌의 분노. 개량주의 vs 혁명주의,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지는 의미, 부르주아적 국가의 폐지로서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사멸로서의 공산주의.
파리 꼬뮌의 '민주주의'의 혁명성.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 엘리트(관리)는 복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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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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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가 제기한 문제
어떠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다가올 미래 공산주의로의 발전이라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그 근원을 두고 있고, 자본주의로부터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자본주의가 낳았던 사회적 힘의 작용의 결과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는 그가 하나의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다든가, 아니면 알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단순히 추측에 몰두한다든가 하는 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를 자연과학도가 새로운 생물학적 변화의 발전을 다루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즉 생물학적 변화가 어디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연유했으며 그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106쪽

2.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이스의 공화정이 이루었던 민주주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즉 노예주를 위한 자유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조건때문에 근대의 임금노예들은 너무나도 기아와 빈곤으로 압살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나 정치를 귀찮게 여기게 된다.' 일상적으로 평화로운 사건들의 전개과정 속에서 대다수 대중은 정치와 공화국에의 참여에서 배제되어 있다. (...) 공산주의로 향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착취자들의 반동적인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이외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109쪽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면, 개별적인 개인(individual persons)의 영역에 대한 지나친 월권의 가능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그 우러권을 금지할 필요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째로, 이것 때문에 억압을 위한 그 어떤 특수한 기구나 장치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이것은 근대사회의 문명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길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을 뜯어 말리거나 여인네가 폭행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간닿나고 기꺼이 무장한 인민 자신에 의해서 수행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사회적 교류의 규칙을 위반하면서 일어나는 월권의 사회적인 근본원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것이며, 그들의 빈곤과 궁핍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주된 원인의 제거와 더불어서 월권도 불가피하게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빨리 어떠한 방식의 승리가 올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사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의 사멸과 더불어서 국가 또한 사멸해 갈 것이다.-113쪽

4.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
현재로서는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발전이 진행될 것인가와, 얼마나 빨리 노동의 분업에서 깨쳐 나오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을 없애고, 노동을 '삶의 제일 욕구'로 전환시키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며, 알 수도 없는 것이다. (...)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최고로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고 사회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뤄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119쪽

회계(accounting)와 통제(control)-이것은 최초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순탄한 노동'과 적절한 기능을 위하 필요한 주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무장된 노동자로 구성된 국가의 고용원(雇庸員)으로 전환된다. 모든 시민들은 전국적인 단일 '신디케이트'의 고용원이나 노동자가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란 그들이 동등하게 일해야 하며, 적절한 양의 노동을 분담해야 하고, 동등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부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회계와 통제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아주 단순화되며,-글자를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가 수행할 수 있는-즉 사칙연산만을 알면 관리하고 기록할 수 있는, 또한 그것에 상응하는 적당한 수입을 받는 극단에 가까운 단순작업으로 환원된다.-124-125쪽

국가의 주요한 기능이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회계나 통제작업으로 되면, 국가는 더이상 '정치국가'가 아니게 되며 "(국가의-역자주)공공기능은 정치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단순히 행정적인 기능만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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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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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에어푸르트(Erfurt)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
엥겔스는 민주집중제를 부르조아나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 그중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관료적인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의 중앙집권제란 개념은, '코뮌'과 구(區)들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자발적인 방위를 하면서, 모든 관료적인 습성과 상부로부터의 '명령하달식'을 완전히 제거한 광범위한 지방자치제를 전혀 배제하지 않고 있다.-93쪽

6. 민주주의의 극복에 대한 엥겔스의 입장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대중의 한 분류가 여타 다른 부류에 대하여 권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체 이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104쪽

국가, 즉 인민일반에 대한 모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이자 모든 폭력의 사용체인 국가의 폐지를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라는 원리가 준수되지 않는 사회체계의 도래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며, 따라서 인민일반에 대한 폭력과 한 사람이 타자에게 그리고 대중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왜냐하면 인민은 폭력과 복종없이도 사회적 살므이 기본적인 조건들을 준수하는 데 곧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에-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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