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문학동네 시집 35
서동욱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품절


사라진 길 -책에 대해서

송도의 서경덕이 죽었을 때
그의 서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죽음은 마침표 박힌 기념비를 세우고 --화담집(花潭集)
늙은 혈관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던 링겔 줄 따라가면
그 먼 끝에 서 있는 저자(著者)의 비밀 도서관

수없는 가을 오후마다 바스라질 듯한 햇살이
넘기는 책장들 사이에 스며들었고 화담의 쌓여가는
나이와 추억들이 서가 속에 정성 들여 미로를 그렸다
배회하던 송도의 거리,
기생들과 술래잡기하던 날의
어지러운 발자국들, 우매한 삶의 이 모든 페이지마다
엿보며 키들거리던 이웃의 종년들

그는 사라졌고
그가 다니던 서가 속의 길들은 찾을 길 없네
죽음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미궁의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종이 속의 끝없는
길들은 얽힌 실타래 한 뭉치의 배회하는 문서에 불과한 것

상여가 나가고 뭇 선비들 틈에서 막
태어나는 어린 화담집은 알 길이 없지
시(詩)가 안 되던 날
자기 자신이 어떤 미로를 헤맸고 그 길목마다
일몰은 담벼락에 어떤 모습으로 몸을 기댔고
소란스런 악사(樂士)들과 박연 폭포와
늙은 몸 위에 기마형으로 올라타던 기생들이
목숨을 끊고 싶도록 지루한 가을과 봄을
어떻게 견디도록 해주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많은 서책 속의 길과
서책 밖의 길들 뒤에 도달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우연한 종착점인지를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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