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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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고전을 만화로 그린 전집이 있었다. 우리 집에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수많은 전집 중 첫번째 권이 제인 에어 두번째 권이 폭풍의 언덕 세번째 권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자주 놀러가던 친구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전집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가 바로 폭풍의 언덕이었다. 주인공 캐서린이 참 예쁘게 그려지기도 했고, 자손들이 나오는 뒷이야기가 상당부분 잘리고 마치 후일담처럼 편집되어 있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은 두 남녀의 애절하고 소름끼치는 러브스토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어린 소년소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는 딱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캐서린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나에게 미인의 고유명사처럼 여겨졌고, 나중에 캐서린 제타 존스라는 여배우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단 한번 읽었을 뿐인데도 히스클리프라는 이름도 완전히 기억에 남았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히스 꽃은 이 책의 무대인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인 것 같은데, 나중에 청소년기에 역시 청소년 문학을 읽으며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툭하면 히스 꽃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건 꼭 우리나라의 진달래나 제비꽃같은 꽃이로구나라고 생각했고, 그때마다 언덕에 핀 히스꽃과 같을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야생화와 같은 남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한 이름이었구나. 척박한 곳에서도 싹을 틔우고 일부러 돌보지 않아도 꽃을 피우는 것처럼.
사실 이 소설은 이미지가 중요하다. 내용만 봐서는 대체 막장드라마와 다를게 뭐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데, 사실 현대의 모든 막장드라마는 그리스로마시대의 비극부터 셰익스피어로 이어지는 문학의 플롯에 기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창조해내는 하나의 세계일텐데, 드러시크로스와 비교되는 워더링 하이츠, 딸인 캐서린과 대조되는 어머니 캐서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애증의 관계를 죽어서야 끊어낼 수 있었던,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것 같은 히스클리프. 실제로 브론테 가족이 살았던 요크셔 지방을 배경으로 했기에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세계가 고스란히 독자를 흔들어낼수 있는 것이다. 작중 화자인 록우드는 다소 김칫국을 마시는 듯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착한 유모의 소망대로 혹시 린튼 히스클리프 부인과 내가 어울리게 되어 런던의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그녀에겐 동화 속 세계보다도 더욱 로맨틱한 꿈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르지!’

천만의 말씀이다. 캐서린이 원한 것은 시끄러운 헌던의 분위기도 아니었고 로맨틱한 동화도 아니었다. 작가도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테고. 사랑의 건강하고 밝고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부분은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 다 걷어내고 남은, 병적이고 어둡고 파괴적이고 잔인한 면을 극한까지 보여준다. 이 절절한 사랑에 록우드와 같은 소심쟁이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처럼 묘사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온정 밖에서 잠시라도 머무는 것을 못견뎌하는 허세쟁이는 이러한 이야기 밖에서 머무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

무덤을 찾아보았더니, 벌판에서 가까운 언덕배기 위로 비석 세 개가 이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것은 회색이었고 히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에드거 린튼의 것만 비석 밑의 잔디와 이끼 때문에 어울려 보였다. 히스클리프 것은 여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나는 포근한 하늘 아래 그 비석들 둘레를 어슬렁거렸다.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들을 지켜보고, 풀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렇게 조용한 땅속에 잠든 사람들을 보고 어느 누가 편히 쉬지 못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에드거도 모든 방황과 절망이 끝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에 끼어들 자격이 주어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에드거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남의 시선도 당시의 윤리도 사회적 가치도 던지고 오로지 그들 자신에게 몰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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