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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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2013년에 개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최소 2번 이상 읽은 것은 확실하다.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영화도 봤는데 1970년대에 개봉한 영화이니 영화관에서 본 것은 아니고 DVD로 봤다. 그게 2009년인데 알라딘에 정보가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었다. 그때 쓴 리뷰에 보면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던 고전인데 그때는 주인공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내용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리뷰를 쓸 당시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약간은 이해가 된다고 썼다. 위대하다는 것은 반어적인 표현일지, 사랑 하나 밖에 몰랐던 순수했던 개츠비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는 표현일지 잘 모르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중학교 때에는 세계 명작이고 고전이라니까 읽었는데 당시에는 뭐 이런 내용이 있어?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서는 최소한 그의 순정에는 마음 아파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감은 했던 것이다. 확실히 개츠비의 사랑에는 20대의 마음에 어느 정도 불을 지를만한(?) 부분이 있으니까. 올해가 2019년이니 정확히 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를 접한 지 10년이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2013년에 개봉한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도 보았고. 그러고 보니 중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하는 그 사이에 고등학교 때에도 개츠비를 한 번 이상은 분명히 읽었을 테니 최소한 나에게 개츠비는 5년 주기로 접하는 존재이고 10년 주기로 개츠비를 대하는 내 생각이 크게 바뀌는 것 같다.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그러니까 ‘위대한’은 반어적인 표현이다는 생각은 어쩌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접했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 전영택의 ‘화수분’ 때문에 굳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왠지 그때는 그런 반어적인 표현이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20대가 되고 난 후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불법행위도,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것도 감수했던 개츠비가 위대해 보였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을 해냈으니까. 수단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랑 자체는 숭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은 개츠비, 그는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받는 사람, 그 주변의 인물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 속 세계에서는 개츠비가 중심이고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니까. 물론 그 시절에 내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나는 정말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알았더라면 속을 끓이지 않아도 되었을 일에 지나치게 마음 아파했었다. 지금 개츠비를 읽으면 이제 다른 것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온다. 자신의 한계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무능했던 닉의 탄식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은 톰이, 순간의 감정에 허우적대다가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리를 잡으려고 발버둥쳤을 데이지가 조금은 어른거리며 보이는 것 같다.
개츠비는 정말로 데이지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결혼 전 자신을 숭배했던 남자가 남편의 외도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 크게 성공해서 돌아와 자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순간이 있다. 데이지는 분명히 톰을 사랑했었던 게 맞고 내 생각에는 아마도 결혼 이후 데이지가 정말로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한때 개츠비를 사랑한 적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건 이미 지나간 추억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그 당시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톰과의 사이에서 결혼 생활을 하며 딸까지 낳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쪽이 데이지에게는 더 선택하고 싶고 결정하고 싶은 사랑에 가까울까. 답은 비교적 명확하지 않은가.
데이지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개츠비를 뒤로 하고 안정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톰을 선택했다. 현재까지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톰의 외도 전까지는. 톰의 외도는 이 결혼 생활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부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추락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개츠비를 선택할 것도 고민했다. 개츠비는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고, 또 어마어마한 부가 있으니까 지금의 위치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와의 사랑은 톰의 외도만큼이나 자신의 결혼 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데이지가 톰과 불륜 관계에 있던 머틀을 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그 죄를 뒤집어쓰고, 개츠비가 머틀과 불륜 관계였고 머틀을 죽인 당사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윌슨이 개츠비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각각의 불륜의 상대자와 불륜 대상자의 배우자까지 전부 죽어버린 상황이다. 데이지와 톰의 결혼에 균열을 가했던 망치질은 사라졌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어쩌면 심각하게 지속되었을지도 모르는 수군거림과 추문이 나타날 가능성도 영영 땅에 묻혔다. 그러니까 톰과 데이지 사이에 이미 생긴 균열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더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모로 욕이 나오는 결말이다.
이 당시 미국은 대공황 직전 흥청망청하던 1920년대이다. 1920년대의 한복판에서 개츠비처럼 데이지처럼 사치를 즐겼던 작가는 후에 대공황이 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 대한 한 조각의 슬픔을 이야기했고, 소설의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래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리라는 전진에 대한 희망을 당연하게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시대의 걸작으로 남게 된 셈이다. 우리가 1920년대의 미국을 이야기할 때 아마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책은 바로 이 책일 것이다.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어떠했던 시간이라고 정의가 될 것인지. 개츠비의 몰락만큼이나,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만큼이나, 예상하지 못한 깜짝 놀랄 만한 일로 마무리가 되고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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