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레시피 Slow Recipe - 천천히 걷고 싶은 당신에게
휘황 글.그림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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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제목을봤을때는 요리책인줄 알았다.
이 책은 휘황이라는 재일교포3세인 모델이자DJ로2003년부터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춘을 위한 네 가지 재료
free peace eco slow를 이야기하는데 이책은 그렇게 챕터 4개로 나누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아 물론 말랑말랑한 글과 함께 부드러운 사진도 덧붙여서.

읽다보면 소녀스러운 감성에 조금 오글거린다는 생각도 들고, 의외로 한국어 사용이 능수능란(?)하다는 생각도 들어 놀랍기도 하다. 어차피 책에서 소개하는 이런 일상들,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며 심신이 건강하고 따로 돈 들어갈 곳도 없는 업계에서 꽤 인정받는 프리랜서 아니고서야 그림의 떡이겠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한 시간 내외 정도 천천히 장을 넘겨가며 마치 이 삶을 잠시나마 내 것으로 만드는 기분도 꽤 괜찮다.

부록으로 들어있는 CD는 내 취향도 아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톤과도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잔잔한 음악과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오후에 즐기며 잠깐 일 때문에 골치아팠던 머리를 식힐정도로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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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운드 - 차우진 산문집
차우진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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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다 보니 음악 비평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할 자신은 없다. '지잡대'를 나온 주제에다 학위도 없고 4대 보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계속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아직도 하루치의 마감을 하고 그저 다음 달을 걱정하는 삶을 살지만, 어쨌든 내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다. (중략) 어쩄든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그저 지금을 응시하면서 좋았던 혹은 나빴던 과거는 서랍 안에 고이 처박아두고, 향수 따위에 발목 잡히거나 강박 같은 것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다. 나도 '21세기의 위대한 음악 비평집'을 쓰겠다는 강박을 버리겠다. 무엇보다, 음악이란 그저 인생의 사소한 엔터테인먼트이고 삶에는 음악보다 좋은 게 100만 개쯤은 더 있다. 그러니 어쨌든 살아남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자.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또한 우리 모두에게 럭키를.

 

서문 '청춘의 사운드, 혹은 당신에게 럭키를' 중에서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대중가요는 물론이고, 팝이나 재즈,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편인 나에게는 그렇다. 왠만한 영화에서는 어떻게든 그 영화만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편이지만, 음악은 그게 잘 안 된다. 공부하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음악 때문에 거슬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규칙을 유일하게 피해가는 것이 영화 OST. 그 영화의 내용과, 분위기와, 느낌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추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그래서 상당수 이 책에 나오는 노래 중 아예 모르거나, 제목만 알거나, 들어 봤어도 크게 임팩트가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제로였던 특정 노래에 대한 내 관심도가 이 책으로 인해 조금은 올라갔다는 것. 책을 읽는 동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싫었던 행동을 무심코 할 수 있게 된 것. 특정 대상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은 줄고, 호의가 늘었다는 것.

 

이 책은 음악 평론가가,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적은 수필집에 가깝다. 주관화의 객관화, 혹은 그냥 주관화에 머물렀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특정 가수는 절대 노래를 잘하지는 않지만, 매력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수의 프로필이 노래의 성공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소감에 영향을 주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나같은 사람들이 더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편안하게.

 

한 번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그 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노래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컴퓨터를 틀어 검색어 창에 누르고 클릭해서 음악을 들어보았는데, 역시, 얼마 안 되어 끄고 말았다. 꿈보다 해몽. 꼭 꿈을 꾸어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해설이 훨씬 더 재미있을 때도 있으니까.

 

학교가 있는 안산에서 몇 해를 보내는 동안, 나는 막연히 뭔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엇다. 이 학벌론 안 될 거야, 이 학점으론 안 될 거야, 이 집안으론 안 될 거야, 등등.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면서 세상이 어떻고 글이 어떻고 문학이 어쩌고 했던 얘기들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부끄러웠다. 그냥 토익이나 공부하고 말지.(중략) 한국의 중심이 서울이라는 건 영화 개봉일만 봐도 알 수 있던 떄였다. 하지만 서울은 늘 가깝고도 멀었다.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고, 그럼에도 너무나 절실하게 그 안에 있고 싶었다. 그 점에서 <송시>의 '전과자'가 웃으라는 말에 웃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와 닿았다. 물론 그게 오히려 그들을 타자화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했다. 게다가 미선이는 서울대 학생들의 밴드였고, 앨범에서 풍기는 감수성이 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애들의 흉내 내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편 재수 없엇다. 그러나 닮고 싶었다. 부러웠다. 음악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고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부러웠으며 동시에 이상한 박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게 질투였는지 동경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둘이 대충 아무렇게나 뒤섞였을 것이다.

특정 음악이나 음악가가 한 시대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압도적인 하나'를 기필코 찾아내 그걸 신화적인 위치에 놓고 싶어 한다. 21세기의 비평가와 언론들, 음악 팬들이 펫샵보이즈를 이곳으로 불러오는 맥락도 그렇다. 하지만 언제나 이것은 오만이고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내가 1980년대를 학생운동이나 롤라장이 아니라 너덜해진 니코보코 운동화의 뒤축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80년대의 사운드는 펫샵보이즈이기도 하고 런던보이즈이기도 하고 김완선이나 어떤 날일 수도 있다. 의미는 동일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자의적이고 경험적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언어보다는 파편화된 언어가 더 중요할 것이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홍대앞이든 변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변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떠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좋았던 시절은 다 지나가지만, 누군가에겐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일 것이다.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납득할 수 없게 된다. 조금 쓸쓸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장혁의 <스무살>. 책 때문에 처음 알았는데 좋다.

 

*아이유가 부른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아이유 정말 좋아하고 김창완 노래의 리메이크도 좋았지만 정말 이 노래만큼은 가을방학 원곡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아이유가 부르면서 지나치게 매끄럽고 뽀송뽀송해져서, 원곡의 투박하고 성긴, 탁한 그 맛이 없어진 느낌. 맑고 고운 목소리가 오히려 상상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니.

 

*맨 마지막, 에필로그와 별도로 음악 비평과 비평가에 대한 글을 덧붙인 것도 재미있었다. 종종 음악 비평의 쓸모없음과 직면하면서 무기력해지는 자신과, 순수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암묵적인 이분법, 거기에서도 같은 대중문화에 속했다고 생각되는 영화 평론과 비교될때 상대적으로 비평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이 벌어지는 공적 공간 자체가 드물다는 현실, 음악 자체로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학적인 관점의 해석이 요구되며, 본질적으로 모호한 음악이기에, 거기에 대한 해석조차도 애매하다고 느껴지는 사실, 지금의 음악 비평가는 음악 산업 안에서 약소한 권위에 기댄 홍보 담당자가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는 자괴감.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저런 음반을 다 사고 들어볼 정도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느껴지는데, 사실상 현실은 그보다 너무나 팍팍해 놀랐다. 음원시장 자체가 얼어붙어 있고 상당히 치우침이 심한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예전부터 들렸기에, 그 음악 산업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일생이 고단할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냉정하게 본다면 비평이란 어쩌면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빛이 없는 우주 공간에는 그림자가 없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비평하는 대상이 없거나, 부실하거나, 힘이 없다면, 그 분야의 평론가들은 더 무기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매우 자주, 어쩌면 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란 그 장르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고민하고,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으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슬펐고,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

 

*책 뒷면을 보니 1쇄 발행 후 보름만에 2쇄를 발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이 작가에게는 사랑하는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음악 평론가의 길을 꿋꿋히 가게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이 다음에 쓸 책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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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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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

이게 무슨 뜻일까? 제목만 들어서는 거리의 아이들과 같은 느낌인데?

 

부제: 천재들의 식탁.

동서고금의 천재들이 먹었던 음식이란 말인가?

 

책 표지의 설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속에는 먹을 것들이 풍성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대식가로, 그들은 종종 향연을 벌이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요리들을 앞에 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음식을 탐하는 먹보들이었다. 그건 단순히 식욕의 차원을 넘어 그들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누구는 훌륭한 레시피집을 남겼고 또 누구는 후세의 전기를 통하여 그 왕성한 식욕 상이 전해졌다. 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라블레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 책은 과거에 쓰여진 책을 읽는 것과 미지의 요리가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인생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한 평론가에 의해 쓰여진 실험보고서이다.

 

 

여기까지 보면 이 책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수아 라블레라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먹는 것에 대한 다양한 묘사로 요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천재들은 직접적으로 라블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 혹은 숭배나 찬탄으로 한 가지 이상의 일화가 있는 사람들로 그런 면에서 과연 라블레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평론가로, 음식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하는 사람이며, 실험보고서라는 것은 이 책의 예술가들이 그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방식으로 저자 스스로 맛을 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한 책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대가인 사람들이라면 특정 부분에 대한 자기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방법론이 있기 마련이며, 요리에도 예외는 없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본인만의 취향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다케미쓰 도루의 버섯 파스타 정도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정도일 것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서 저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다. 아마도 전문 요리사의 솜씨와 전문 사진 작가의 기술과 전문 편집자의 능력, 삼박자가 모두 맞았다고 생각되는데, 반면에 글은 또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은 몇 번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어떤 장은 한 번을 읽기에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책이<예술신초>라는 곳에 1년 정도 연재된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각 글마다 농밀함의 편차가 들쑥날쑥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저자가 책 뒤편에서 밝혔듯이 전적으로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개인의 취향이 크게 작용하여 연재된 음식 중 상당수가 돼지고기 요리였으며, 이 책만 하더라도 절반 정도의 예술가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라서, 일본 국민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 많다는 것. 즉, 상당히 편향되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다행이게도, 이 책을 읽은 바로 직후에 일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이라는 것과, 제한된 예산이라는 두 가지 제한 조건 속에서 효과적으로 메뉴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 덕분이었다는 사실. 물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겠지만, 쉽게 오기 힘든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미리 읽었던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음식들 덕에 먹고 싶은 요리를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만족했다는 것.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아오야마 뇌병원의 원장인 모키치는 환자를 봐야 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니 자연히 식사는 배달시켜 먹는 일이 많았고 음식은 당연히 '장어요리'였다. 심한 경우엔 내리 나흘을 장어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업무에서 해방되어 외식을 할 대도 역시 장어를 먹는다. 하지만 고급 요정은 아들의 상견례 자리 말고는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모키치는 병원 근방에 있는 미야마스자카를 내려가 도겐자카를 오르는 그 중간에 있는 하나비시라는 아주 소박한 장어 집을 즐겨 찾았는데 이 점포는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중략) 이윽고, 일본이 영미 열강과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면 느긋하게 장어집에서 가바야키(장어 꼬치구이)를 먹기는 힘들 테고 장어가 없으면 시를 지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가인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모키치가 즉흥적으로 대량의 통조림을 구입한 이유가 그런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학자다운 예방 차원에서 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일기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신중한 모키치는 시내에서 아직 장어를 사다 먹을 수 있는 동안에는 통조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중략) 모키치는 2년 후에 도쿄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때에도 대량의 통조림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장어 통조림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중략) 전자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니 찬밥과 통조림 속의 장어를 덥히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오차즈케처럼 뭔가 따뜻한 국물을 끼얹는 것이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아마도 차갑게 식은 밥에 장어 통조림만으로 밥을 먹는 건 너무도 비참해 역시 우유를 부어서 먹었나보다. 당연히 이 때의 우유는 따뜻하게 데운 것이어야만 한다. (중략)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늦게까지 진찰실에 틀어박혀 있던 모키치에게는 이 방법은 너무도 간편하면서도 장어를 먹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삽화를 통해 판단해 본 결과 모키치는 결코 미식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장어는 어느 강에서 나는 천연 장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양식 장어가 나돌 무렵에는 그걸로라도 만족하며 소박하게 기뻐하고 통조림이라고 해서 업신여긴 적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장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그것들을 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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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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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둘 다 김연수 작가의 책이고, 원래 나왔던 책의 10년 후, '+'를 붙여서 다시 나온 책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나중에 나온 책만 읽었더랬다.

 

처음 나왔던 책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 10년을 다룬 책이 다시 나왔다는 것은 많은 청춘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는 뜻이 아닐까? 당시 청춘들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닌 나이가 되었을 테고, 나도 몇 년 뒤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닐 테지만, 어쨌든 청춘의 끝무렵에 부지런히 두 책을, 출간된 순서를 바꾸어 읽었다. 순서대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김연수라는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을 테고, 또 나중에 나온 책이 먼저 나온 책의 일부를 소개한 뒤, 그에 대한 뒷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소감은, 기대에는 좀 못 미친다는 생각? 내가 이미 청춘의 한 복판을 지나 청춘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10년 후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서인지, 전체적인 책이 색깔로 비유하자면 채도가 낮다는 느낌이다. 10년 후에 나온 청춘의 문장들이 마치 청록색의 느낌이라면, 이 책은 회갈색 같다는 느낌? 뚜렷하게 남는 문장도, 무릎을 탁 치고 싶은 구절도 없다. 힘들었던 시간이었겠지만, 그 시간에 대한 서술은 희미하여 당시에 분위기나 저자의 심정이 솔직히 잘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청춘의 문장들'에서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도, '청춘'과 아귀가 딱 맞지 않고 약간 헐거운 문짝 같다는 느낌이다. 비슷한 책으로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이 있는데, 작가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편지의 내용과 소개되는 작품들이 잘 맞물려 공지영이 소개하는 그 책들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거나, 읽지 않아도 공지영이 인용한 몇 몇 문장들은 강하게 내 마음에 살아 있다. 좀 더 강렬한 책을 원했던 나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책이었다. 굳이 작가의 '청춘'을 이야기하면서 '문장'을 인용할 때는, 그 문장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점도가 있어야 하며, 당시 작가의 삶과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할 텐데, '청춘'과 '문장'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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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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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안에 시를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가르쳐 드리죠. 먼저 주제를 정하세요. 사랑도 좋고, 눈물도 좋고, 이별도 좋아요. 고등어도 좋고 햄버거도 좋고 샐비어도 좋아요. 우린 어떤 것이든 시로 쓸 수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쓰세요. 고등어를 먹는 저녁은 행복하다고 쓰세요. 그런 것도 시라는 걸 말씀드립니다(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다음 줄에는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방금 쓴 문장 말고 다르게 고등어에 대해서 써보세요. 그게 무엇이든 썼다면 그 밑에 다시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다르게 계속 고등어에 대해서 쓰는 일, 그게 바로 시랍니다.

 

어린 시절, 고향의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줄지어 서 있던 가로수들이 생각납니다. 김천역에서 옛 시청이 있던 자리까지는 은행나무를, 그 너머로 아랫장터까지는 히말라야시다를 심어놓았죠. 그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죠. 오르막을 다 오르면 학교가 나왔습니다. 학교 앞에 서면 마치 국경에 선 것처럼 히말라야시다들이 서 있는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 히말라야시다들 위로 사람의 얼굴을 닮은 금오산이 멀리 보였는데, 그래서 그건 마치 큰바위얼굴을 연상시켰는데, 어린 내게 어떤 포부가 있었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생겼을 겁니다.

 

매년 시월이 되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는 <기적의 주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 축제는 식민지 시절 앙골라에서 끌려온 한 노예가 리마 근처 파차카밀리아 대농장의 오두막 벽에 그린 그리스도 그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리마에 가서 행렬의 맨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행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검은 그리스도거든요.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노예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경우든 흑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기자가 "닌텐도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코다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청춘의 가장 큰 고민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춘에 대한 무관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누구 하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으며, 젊을 때는 젊음을 모른다더니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랄 떄가 있어요. 언젠가 필리핀의 마닐라 뒷골목을 지나가는데 제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여름밤, 우리 동네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포르투갈의 리스본 거리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제과점 속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 집 뉴욕제과점과 거의 비슷했어요. 언젠가 연해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올려다본 밤하늘은 일곱 살 떄의 밤하늘 그대로였구요. 그런 식으로 이 지구 어딘가에, 아니 어쩌면 이 우주 어딘가에 제가 살아온 삶이 그대로 저장된 것은 아닐까요? 별이 뜨는 것을 볼 떄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가뭇없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구란 이토록 크고, 우주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게 아닐까요? 인류의 기억 전부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책에 실린 시들은 2009년 11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13개월 동안 내가 읽은 것들이다. <한국일보>에서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때는 고사할 생각이었다.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시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엇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무모한 자신감은 전적으로 그저 좋아서 매 순간 시를 노트에 적던 이십대 초반의 서너 해 덕분이었다. 그 시간들은 잘해봐야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을 뿐,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전적으로 무용한 시간으로 느껴졌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이지만 어쩌면 그로부터 십몇 년이 지나서 13개월 동안 시를 읽기 위해서 보낸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좋아서 읽는 그 모든 책들은 무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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