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양말 - 양말이 88켤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무튼 시리즈 18
구달 지음 / 제철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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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속담에 이런 표현이 있다.

'천성은 문으로 내쫓으면 창문으로 들어온다'는.


22쪽에 나온 말이다.


그래, 천성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천성은 본래 타고난 성품이나 성격을 의미한다. 앞에 있는 천은 하늘 천. 그러니까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영어로는 nature. 자연 그 자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양말은 사실 나에게는 실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예쁜 양말을 보면, 특히 여행지에서 보면 사오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사온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양말이니까.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렇지만 알베르 카뮈처럼 흰 양말을 깔끔하게 신은 사람, 아니면 캐나다 총리처럼 양말에 메세지를 담아 신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디테일에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누구나 호감을 갖는 것은 쉬운 일 아닌가. 그렇지만, 내 천성으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양말은 결국 막 신는 사람이고, 양말을 신지 않는 상태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게 편하니까... 


아무튼 시리즈를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나의 천성으로는 상상을 하기 어려웠던 삶을 한 자락씩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편협한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사소한 것에서부터 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편협한 어른이 되는 것 아닌가. 양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양말이 아닌 다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이들은 상관없이 내가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도 삶의 재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재미있는 삶이 결국 삶의 본질이 아닌가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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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리커버 에디션)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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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를 틈틈이 읽고 있던 중 아무튼 양말 을 읽다가 거기에 등장한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는 책을 소개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제목도 독특하고, 내용도 궁금해서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읽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여우와 신포도'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어서 다소 민망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부분을 읽다 보면 겉으로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추구하지만 속으로는 우아하게 사치하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없기에, 어떻게든 우리는 만족하며 사는 법을 알아야 하기에, 작가의 생각이 억지라도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몇 구절은 분명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부는 악하고 빈은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드러나는 부분이 그랬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특히 그랬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비행기 맨 앞의 퍼스트 클래스에는 진하게 화장을 하고 붉게 립스틱을 바른, 머리에서 발끝까지 베르사체로 친친 감은 부인들이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비행기 단골 고객으로서 마일리지 회원권을 지닌 콤비 차림의 신사들이 자리하고서, 여승무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여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어느 정도나마 교양 있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오직 이코노미 클래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고풍적인 의미에서 '우아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비행기 앞부분의 승객들처럼 상스럽지는 않다.(p212~213)



이런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면 그래도 재미있는 부분은 많다. 개인적으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고 하면 모 연예프로에 나오는 한 연예인이 생각나는데, 한때 최고의 부와 명성이 있었던 그가 지금은 빚을 열심히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치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도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연어 머리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대접하는 장면이었는데, 그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현실적으로 잘 응용한 예가 아닌가 싶다. 


영국 사회 형태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신분제도가 존재하지만 누구나 신분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고 또 오로지 돈에 의해 신분이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는 행동과 언어인데 이 두 가지는 배워 익힐 수 있다. 마거릿 대처의 젊은 시절 언동은 훗날 보수당에서 정권을 잡았을 때와 사뭇 달랐다. 이를테면 노동계급 출신이라도 누구나 성인 오락실에 가는 대신 속보 경마장을 관람하는 등의 시민적인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서 중산층에 합류할 수 있다. 그리고 중산층에 기반을 둔 사람들은 어느 날 상류층의 생활 방식과 언어, 행동을 받아들여서 속보 경마 대신 갤럽 경마를 관람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국인들은 지배자의 민족이다. '지배자라는 것'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독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헝가리인들과 영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자기 극기', 비록 상상의 세계라 할지라도 '자기 세계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지배자이다.(p 50)


'복권 로타르'는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 불과 5년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반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신은 인간들을 벌하려는 경우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

역설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여기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실패를 성공의 비결로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가난한 망명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부유한 나비 채집가와 2류 서정 시인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어쩌면 본인을 위해서도 다행히 나보코프는 모든 것을 잃었다. 웅장한 승리와 처참한 실패는 종종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상실과 실패, 심지어는 이른바 불행이라는 것도 훗날 역경을 뚫고 모습을 나타내는 승리의 참된 전제 조건을 이룬다.

듣기 좋은 말로 행복을 이야기하는 진부한 감언이설을 뒤쫓는 사람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라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 무엇을 좇든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삶의 기복을 평가할 줄 알고 위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p 59)



책을 읽다가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 이 생각나는 부분도 있었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도가 지나쳐서, 베르사유의 정원에 작은 마을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농부의 아낙처럼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서, 젖소의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손수 빵을 굽고 버터와 치즈를 만들었다. 바스티유가 폭풍에 휩쓸린 날에도 세브르의 우유통과 자신의 가슴 모양을 본따 만든 우유 컵을 들고서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컵에 '왕비의 가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지나친 태도는, 대부분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잠시나마 부의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적인 소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 소원을 품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p 185)


그와 반대로 상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나 이따금 넘치는 풍요의 세계에 탐닉하는 경험은 아주 자극적일 수 있다. 다만 상반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고, 복권 사는 사람처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은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불행만을 가져올 뿐이다.(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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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순정만화 - 그때는 그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아무튼 시리즈 27
이마루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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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 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책의 소개에 나와 있는 유시진 작가의 쿨핫 때문이었다. 솔직히 순정만화 엄청 좋아하지 않았다. 꽃보다 남자의 경우도 흡입력은 인정했으나 설정은 비웃으며 읽었다. 그러던 나에게 그야말로 순정만화에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고 충격을 주고, 이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고까지 마음 먹게 했던 작품이 바로 쿨핫이었다. 왜 이 만화는 완결이 되지 않는 걸까, 한번씩 소식을 찾아보고 아쉬워하고 그랬는데, 이 작품에 대해 언급이 나온 순간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책은 읽어봐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역시나, 이 책에 나오는 상당수의 만화는 사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만화도 많았고, 이름만 들어본 만화도 많았다. 그래도 작가처럼 빌려온 만화책을 돌려보기도 했고, 친구 집에 놀러가서 만화 잡지를 읽은 경험은 아직도 있다. 지금도 기억난다. 윙크 동생 밍크가 태어났어요~라고 시작하는 만화 잡지 밍크의 TV 광고. 작가는 기억하시려나. 분명히 이 작가 분 나랑 비슷한 나이이실텐데.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고 비슷한 비유를 나에게 적용한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순정만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시절의 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만화 잡지의 세계에서 너무나 쉽게 웹툰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내 인생에서 만화를 즐긴 시간 중 나를 더 많이 웃고 울게 만든 시간의 절대 다수는 종이가 아니라 컴퓨터 스크린 앞이었다. 하지만 순정 만화는 컴퓨터 스크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이 세계는 절대 없어진 게 아니고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사춘기 메들리, 미생, 이끼, 유미의 세포들, 이태원 클라쓰를 보면 만화가의 위상은 견고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 진짜로 그렇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 혹시 중쇄를 찍자 라는 일본 드라마를 아시는 지 궁금하다. 만화가를 관리하는 편집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만화 출판사에 취직한 주인공이 편집자로서 성장해 가는 드라마이다. 중쇄를 찍는다는 것은 편집자에게도, 만화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나. 이 드라마 또한 일본 만화가 원작인데, 이 일본 드라마가 우리나라에 리메이크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리메이크 제목은 오늘의 웹툰. 우리나라는 출판 시장보다 웹툰 시장이 활발하니 이렇게 바뀐 거겠지. 매체의 차이일뿐 순정 만화는 이렇게나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손편지가 사라진다고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현재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는 작가님께 혹시라도 위로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 간만에 따뜻한 시간을 선물해 준 글에도 감사하다는 마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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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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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알라딘에서 미리보기가 생겼다. 아니 미리보기가 생긴 지는 좀 되었다.모든 책이 다 있는 것은 아니고 최근에 출판된 책들만, 그리고 대체로 목차나 머릿말 정도를 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최근 들어 그 미리보기가 구색만 맞추는 단계에서 대략 책 본문 내용의 20쪽 정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왜 바뀐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과 작가 사이의 어떤 합의 내지는 관행이 형성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어쨌든 확실한 것은 책을 구매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주말이면 서점에서 몇 시간이나 죽치고 있던 아이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심신이 지쳐서 온라인 서점으로만 주구장창 구매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오프라인 서점에 나가야만 가능한 점이 있었다. 책을 들어서 죽 훑어보기. 이 과정에서 책을 살 지 말 지 고민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온라인 서점이 오프라인 서점에 뒤진다고 생각한 부분이 어느 정도 보완이 된 셈이다.

 

특히 학술서나 교양서보다는 에세이를 구매할 지, 말 지를 고민할 때 이 미리보기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이게 그러니까... 영화로 치자면 예고편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어떤 영화는 예고편만 보고 예매했다가 욕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물론 반대의 의미로 뒤통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 우연히 본 영화가 너무 훌륭해서 감동했다가, 뒤늦게 예고편을 찾아보고 나서 아, 이 영화 관계자들 예고편 신경 좀 쓰지... 안타깝네...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책으로 비유하자면, 예고편이 재미있어서 구매했는데 본편도 재미있는 영화로 비유하면 될 것 같다. 5점 만점에 3.5는 나오는 오락영화 정도에 비유하면 될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 먹은 결정적인 부분은 미리보기에도 나오는 배추가 김치되는 에피소드이다. 내가 여태껏 보고 겪은 주사로는 역대급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던 중 이 부분을 미리보기로 보다가 너무 웃어서 눈치가 보였다. 그에 못지 않은 일화들로 책이 꽉꽉 차 있으니 혹시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웃기는 것은 확실하다고 추천하고 싶다. 역시, 나의 주사는 이불킥을 하고 싶어도 남의 주사는 재미있는 법이다.

 

보통 에세이가 정말 좋아지면, 그 에세이를 쓴 작가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하게 된다. 실제로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되고. 에세이란 작가의 민낯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 주는 장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그러니까 살짝 멀리서 떨어지면 재미있는 친구인데 단짝까지는 안 갔으면 하는... 아마도 술에 대한 태도 때문인 것 같다. 맨 정신에 못 할 말은 술 마신 상태에서도 하면 안 된다는 일부의 생각에 작가는 명확하게 반대 의견을 밝히고 있는데, 물론 이 작가의 경우에는 아마 귀여울 것 같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 지금까지 쌓아 온 내 나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취중진담이라는 말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요는... 술에 대한 태도가 다르더라도 이 책을 즐겁게 읽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술 한 잔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재미가 맞아맞아 하는 재미일지, 아니면 하하 이런 사람도 있네? 하는 쪽일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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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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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큰일이다, 허리를 삐끗 했다. 난 지금까지 허리 같은 거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아프지 않다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아프지 않다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지금 나는 나한테도 허리가 있었구나 하고 깊이 느끼고, 납작 엎드려서 계단 오를 때는 열네 살 아들의 등에 달라붙어 고려장 놀이를 한다. 그런데 축 늘어져 가슴이 두근두근 기쁜 건 망측한 어머니일까나.
그러나 아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만 고려장을 해 주고, 관객이 없으면 "으응, 업어 줘"하고 말해도 못 들은 척한다. 그 정도면 그나마 괜찮은데, "좋겠어, 허리 삐끗해서,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고. 어떻게 하면 허리 삐끗할 수 있어? 나도 좀 해 보게" 하고 퉁퉁댄다. 그럴 때는 정말 허리를 꺾어 주고 싶다. 효도도 남이 볼 때만 하는 놈.
입원했더니 동생은 "언니 팔자 좋네, 나도 입원하고 싶어. 요즘 전혀 사건이 없네. 생활의 변화가 필요해"하며 내 침대로 올라와 낮잠을 자고 돌아갔다.
가을다워졌다.
우리 집 개 모모코가 강아지를 낳았다. 얼굴은 시바견이고 몸은 닥스훈트인 모모코는 그 짧은 다리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하는 표정 탓에, 모든 사람에게 줄곧 조롱당해 왔는데, 강아지를 낳은 것만으로 또다시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들조차 "모모코를 좋아할 개가 있을까"하고 비관적이었기 때문에, 배가 커진 기색도 보이지 않던 모모코가 비 오는 날 강아지를 낳은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두더지 같은 세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별안간 어머니의 눈초리가 된 모모코. 모모코를 보러 온 친구는 그 모습을 보더니 큰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게 15년 전, 아들을 낳고 젖을 물리고 있는 나를 보고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거리던 옛 친구를 생각나게 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아지를 데려갈 사람에게는 모모코 보이지 마."라고 다들 말해서, 나는 또다시 상처 입었다.
그 어미의 추함을 알면서도 강아지를 데려가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소꿉장난을 하기 위해 절의 스님이 정성들여 키운 국화꽃을 훔치러 갔다고 한다.
아이의 얼굴 크기만 한 꽃을 꺾어든 순간 스님에게 목덜미를 눌린 다섯 살의 어머니는 "쉬가 나와요."라고 외쳤고 스님이 놀라서 손을 놓은 틈에 도망쳤다고 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 봐도 다섯 살 어머니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른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와 아들은 서른 살 차이가 나고 그 삼십 년의 역사가 아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긴타로아메같이 그 삼십 년 중의 어디를 잘라도 아들에게는 한결같은 얼굴로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다섯 살 아들을 보는 것으로 다섯 살의 나를 한 번 더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열세 살의 아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열세 살의 삶을 살 수 없다. 그가 남자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이 사십 대 여자인 어머니를 이해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리라. 나는 아들에게 몹시 거치적거리는 존재일 뿐.
요전에 심리학 책을 읽다가 '세상에 어른 따위는 없다. 단지 어른인 척하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접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아들이 "뭔데? 뭔데?" 하고 다가왔다.
나는 소리 내어 읽워 줬다.
아들은 "맞는 말이야. 뭐 뭐인 척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나쁜 사람이야"하고 말했다.
"예를 들면?" 하고 재촉했더니 "권력자. 그런 사람은 척하는 연기를 잘 할 뿐이야."라고 했다.
음, 제법 괜찮은데.
그러나 열세 살의 남자는 뭐 뭐인 척하는 것을 나보다 훨씬 더 잘한다.
공부하는 척하기,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하기, 불쌍한 척해서 동정심 유발하기.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아이 따위는 없다. 아이인 척하는 어른이 있을 뿐이다. 아이인 척하며아이의 권력을 휘두르지 마라. 나도 어머니인 척하는 거 힘드니까 말이야.
나도 열세 살의 소녀였던 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의 곡』을 반납하지 않고 탐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눈을 치켜뜨고 화냈다.
어머니는 내가 연애에 흥미를 갖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것은 딸을 가진 인류의 어머니 모두가 한결같이 갖고 있는 공포다.
아버지는 "눈이 찌부러진다"며 겁을 줬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내 눈은 난시와 근시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장녀인 나는, 내 뒤로 줄줄이 태어난 여동생을 돌보거나, 강으로 기거쥐를 빨러 가거나, 강에서 물을 떠오거나 하는, 가난한 집 아이라면 누구라도 하는 일을 똑같이 해야 했다.
기저귀의 응가를 물에 흘려보낼 때만큼은 왠지 상쾌하니 속이 후련했다. 응가는 둥실둥실 뜨거나 가루로 녹아서 흘러갔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의 노동을 하고 있자면, 한시라도 빨리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책을 읽고 싶었다.
어머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게을러 빠져서"하고 소리쳤다.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그처럼 나태한 쾌락이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책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책에 굶주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이 많은 집에는 새 책 살 돈이 모일 일이 없으므로, 나는 산길에서 근시와 난시를 입수한 후, 중학생이 되어서는 도서관에 틀어박였다. 중학생이 되자 아스팔트 길이 있는 중소 도시에 살면서 전철로 통학했고, 전철의 진동이 산길의 진동을 대신했다.
전철에서 책을 읽다 졸다 하면 꿈과 현실 사이로 활자가 흘러갔다. 일본 문학 전집도 세계 문학 전집도 연애 이야기로 가득했지만, 그렇게 훌륭한 전집을 읽고 있으면, 모파상이든, 안나 카레니나든 부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독서를 '게을러빠진 거'가 아니라 학력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 만큼 세상이 편안해져 갔던 거다. 동생들도 자라서 기저귀 안에 응가를 하는 일도 없어졌고, 손을 안 잡아 줘도 혼자서 종종거리며 걸었고, 물은 길러가지 않아도 수도꼭지를 비틀면 물이 나오게 됐고, 밭에서 김을 매지 않아도 채소 가게에서 당근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나는 도서관을 내 집 삼아 들락거렸다. 나에게 특별한 지적 향상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고, 뜀박질 같은 거는 하기 싫었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합하여 경기를 하는 것이 서툴렀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연애에 '가만히' 앉아서 포옥 몰입할 수 있는 것만큼 편한 것은 없다.
사실, 현실에서 연애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책 같은 거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확실하게 인생이란 것을 배운다.
책 속에서,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미지의 나라의 아가씨들과 메이지 시대의 꽁한 남자들이 나를 지나쳐 갔지만, 나는 그저 홀로, 나와 상대할 현실의 인간을 갖지 못한 채, 활자만을 눈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난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 아이도 낳고, 분주해지기는 했지만, 분주해도 나태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싶다. 책 같은 거 읽지 않아도 할 만한 일이 산처럼 많은데도 벌렁 드러누워 책을 읽고 싶다. 나태한 쾌락이 몸에 배어 버렸다.

나의 독서는 그저 심심풀이다. 나는 따분함을 못 참는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뱅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이 분주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심심풀이로 읽기 때문에 활자는 그저 배경 음악처럼 흘러갈 뿐, 교양으로도 지성으로도 남지 않는다. 오락이니까 그냥 시간을 떄우면 되는 거다. 내 안에 축적되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는 편식쟁이어서 씹어 삼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가까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기 쉬운 일본어를 써라,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쓰다니 자기가 모르는 거 눙치기 위한 거 아니냐'하고 비아냥거리기 십상이고, 때떄로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난해한 책을 찾아와서 '잠깐 잠깐 여기 이 부분을 내가 알기 쉽게 번역해 줄게'하고 난해한 말씀을 인정머리 없게 요약하고는 '인텔리는 역시 밥맛이야'하며 웃는 것으로 나 자신을 눙치고 기뻐하는 비열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달리 낙이 없다.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웃과 잘 사귀는 편도 아니고, PTA는 질색이다. 집을 꾸미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식가입네 하고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다.
현실 생활을 덮치는 것들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쓰러뜨리지 못하는 아들은 나를 쓰러뜨리고, 그러면 나는 휘청휘청 잠자리에 쓰러져서, 활자를 계속 삼키며, 오로지,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기분이 좋을 때는, 활자로부터 심원한 철학을 쬐끔 빌려와서 잠시 심원한 기분이 되어 보다가도 다음 날에는, 웃기고 있네 하며 그야말로 변덕을 부린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고,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꺄아 꺄아 기뻐할 수 있다면, 연애소설이든  『책의 잡지』든 헤밍웨이든 아무 차별도 구별도 두지 않는다.
눈물이 흐를 떄도 꺄아 꺄아 기뻐하고 있다.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생각을 논하는 사람에게도 꺄아 꺄아 기뻐하면서 화를 낸다.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그러나 몇 년 전, 흠칫한 적이 있다. '다치'라는 야생마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야생의 몽골말이 영국에서 고향인 몽골까지, 바다까지 건너서 오로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실로 감동적이 이야기였다. 나는 쉽게 우는 사람이므로, 벌써 눈물범벅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몽골말이 되어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기보다 정말로 몽골말이 되어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니 독서라는 게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페치카에 등을 밀어붙인, 콧물의 안데르센 아버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안데르센을 읽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재주가 없었던 혼란기의 일본 남자.
현실에는 없는 아름다운 세계의 문을 열고, 붉은 수수밥의 확보는 아내에게 맡긴 인간.
당신의 처는 아름답게 빛나며 러시아인과 빈틈없이 싸워서, 붉은 수수도 구하고 콩깻묵도 손에 넣으며 살아왔다.
마치 몽골말 같지 아니한가.

나는 자잘하게 그림이랑 글자를 조합해서 인쇄물을 만들고 그 대가를 받아서 먹고 산다. 내가 만든 책을 누가 사 줄지 전혀 짐작도 못한다.
책방에 가면 실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있고, 내 책은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동물 코너만 해도 나날이 새로운 책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출간된 지 몇 십 년이 넘는 롱셀러가 줄을 서고, 외국 그림책도 썩을 정도로 쌓여 있다. 이것들을 헤치고 또 헤쳐 나가며 밥을 먹고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치 10킬로그램들이 쌀 봉지를 쏟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인 속에서, 어떻게들 내가 생산한 한 알의 쌀을 골라내 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두려워서 그림책 코너에 못 간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은 비상시가 되면 불필요한 일이다.
그것 없이도 인간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 그것으로 O십 년이나 밥 먹고 살 수 있었다니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라기 보다 거의 매일 웃으며 지낸다. 때론 울기도 한다. 당연히 내일도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저금 같은 건 한 푼도 없다. 아니 있다. 슈퍼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1엔짜리 동전을 유리병에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치마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같은 겁나는 생각을 한다.
식은땀이 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뭐랄까, 한없이 유년으로 돌아가는 거다. 나도 자란 어릴 적 경험이 차차 거대해져서 이빨을 드러내는 거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는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려 줬다. 마당 끝에 만들어 놓은 유리 공예 작업장의 오렌지색 끈적거리는 불꽃,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 놓은 친구의 작품이 내가 몰랐던 세월을 나에게 가르쳐 줬다. 나의 10년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처럼 돌연 모습을 나타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나의 아들과 동갑인 친구 아들이 10년의 공백을 등 뒤로 하고 당당히 나타났다.
친구 남편이 돌아왔다.
"야아, 나이 먹는구나, 늙었네."하며 그는 웃었다.
유리의 불 상태를 살피면서 식사를 했다. 아들은 젓가락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섯 살 때 그 아이가 왼손잡이였지 하고 기억을 떠올렸다. 열다섯 살이 된 그의 왼손잡이는 이제 인격의 일부로서 자리가 잡혀 있었다. 나는 넋을 잃고 왼손으로 별빙어를 집어 올리는 그를 바라보았따.
"요코 씨 담배가 지나쳐, 끊지 그래." 친구가 말했다.
"참, 거기 바구니 안에 담배가 싫어지는 엿이 있었는데." 친구 남편은 창가의 바구니를 찾았다.
"아하하하, 녹아서 전부 들러붙었어."
"아하하, 그거 일 년 전 거예요."
"일 년이나 지났군."
부부는 녹아서 들러붙은 엿을 보고 같이 웃었다. 나는 가슴으로 따뜻한 바다가 흘러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엿이 녹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행복.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스물네 살의 자만에 찬 젊은 시절부터 이미 서서히 할머니가 되기 시작하는 거다. 아니 다섯 살 여자아이도 보고 있으면 팔십 먹은 그 아이의 영락한 말로가 비쳐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할머니는 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다.
어려서는 부모의 안색을 살피고(꽤나 말을 안 듣는 아이였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상대의 기분에 맞추고(별로 맞추지 않았지만), 애 낳고는 머리 가꿀 새도 없이 어머니 노릇을 하고(그랬다고 아이가 수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몇 십 년이다. 이제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아이가 성인이 되면, 평생에 딱 한 번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내 그림에 대한 주문도 없어졌을 테니 서툰 그림이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내 맘대로 그리고, 마음 내키면 SF 소설도 쓸 거다. SF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해서 어려울 것 같으면, 살인물이라도 써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차례차례 등장시켜 닥치는 대로 산산조각을 내 주는 거다. 나이 먹으면 먹을 것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된다고 하니, 하루가 걸리더라도 감자죽을 만들어 후우 후우 먹겠다. 돈이 없을 게 분명하니, 미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입이 험한 것은 나의 숙달된 무기니까 험한 입으로 "저 할망구 예쁜 데가 없어"하고 젊은 녀석들이 나를 싫어하게 만들 거다. 이런 것을 일러 깊은 배려심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죽으면 '아,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좋았을 걸'하고 주위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노망이 들면 어떠한 결의도 계획도 물거품,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딱 하나 내가 지금부터 유념할 것은, 물욕을 갖지 않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기는 것은 그것이 아주 적은 돈이든, 사소한 일용품이든 처리하기가 성가시다. 내가 죽으면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작은 종잇조각 하나, 팬티 하나 남기지 않고 '슈욱 하고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면 조옿겠다'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책 만드는 일이 좋으므로 앞으로 죽을 떄까지 몇 권쯤 더 만들고 싶다. 과감 무쌍하고 뻔뻔스럽게도, 아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넘어서고야 말리라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야심을 불태우다가 잠 못 드는 밤도 있다. 나와 나의 재능에 절망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말이다. 범인凡人이란 그런 거다.
고양이가 뒷다리의 털이 훌러덩 벗겨진 채 힘없이 돌아왔다. 11년이나 살면서 처음으로 싸움에 진 고양이는 초라한 꼴로 살금살금 들어와 방구석에서 붉게 부어오른 뒷다리를 핥았다.

의사는 비정한 리얼리스트의 눈으로 상처 부위를 가위로 자르며 "싸움에 약한 고양이는요, 뒷다리를 당해요."라고 했다.
"지금까지 싸워서 진 적 없어요. 벌써 11년이나 살았어요. 나이 탓일 거예요." 고양이의 세월 11년, 시즌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갓난 아기가 밤에 울어 대는 것 같은 으스스한 소리를 내고, 고작 암컷 한 마리 때문에 털을 곤두세우고, 고작 암컷 한 마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며 살아온 고양이다. 평소에는 고양이를 걷어차고 돌아다니는 나지만, 남이 내 고양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면 화가 난다.

이렇게 범인의 삶은 계속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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