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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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안에 시를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가르쳐 드리죠. 먼저 주제를 정하세요. 사랑도 좋고, 눈물도 좋고, 이별도 좋아요. 고등어도 좋고 햄버거도 좋고 샐비어도 좋아요. 우린 어떤 것이든 시로 쓸 수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쓰세요. 고등어를 먹는 저녁은 행복하다고 쓰세요. 그런 것도 시라는 걸 말씀드립니다(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다음 줄에는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방금 쓴 문장 말고 다르게 고등어에 대해서 써보세요. 그게 무엇이든 썼다면 그 밑에 다시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다르게 계속 고등어에 대해서 쓰는 일, 그게 바로 시랍니다.

 

어린 시절, 고향의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줄지어 서 있던 가로수들이 생각납니다. 김천역에서 옛 시청이 있던 자리까지는 은행나무를, 그 너머로 아랫장터까지는 히말라야시다를 심어놓았죠. 그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죠. 오르막을 다 오르면 학교가 나왔습니다. 학교 앞에 서면 마치 국경에 선 것처럼 히말라야시다들이 서 있는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 히말라야시다들 위로 사람의 얼굴을 닮은 금오산이 멀리 보였는데, 그래서 그건 마치 큰바위얼굴을 연상시켰는데, 어린 내게 어떤 포부가 있었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생겼을 겁니다.

 

매년 시월이 되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는 <기적의 주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 축제는 식민지 시절 앙골라에서 끌려온 한 노예가 리마 근처 파차카밀리아 대농장의 오두막 벽에 그린 그리스도 그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리마에 가서 행렬의 맨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행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검은 그리스도거든요.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노예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경우든 흑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기자가 "닌텐도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코다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청춘의 가장 큰 고민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춘에 대한 무관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누구 하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으며, 젊을 때는 젊음을 모른다더니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랄 떄가 있어요. 언젠가 필리핀의 마닐라 뒷골목을 지나가는데 제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여름밤, 우리 동네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포르투갈의 리스본 거리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제과점 속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 집 뉴욕제과점과 거의 비슷했어요. 언젠가 연해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올려다본 밤하늘은 일곱 살 떄의 밤하늘 그대로였구요. 그런 식으로 이 지구 어딘가에, 아니 어쩌면 이 우주 어딘가에 제가 살아온 삶이 그대로 저장된 것은 아닐까요? 별이 뜨는 것을 볼 떄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가뭇없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구란 이토록 크고, 우주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게 아닐까요? 인류의 기억 전부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책에 실린 시들은 2009년 11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13개월 동안 내가 읽은 것들이다. <한국일보>에서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때는 고사할 생각이었다.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시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엇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무모한 자신감은 전적으로 그저 좋아서 매 순간 시를 노트에 적던 이십대 초반의 서너 해 덕분이었다. 그 시간들은 잘해봐야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을 뿐,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전적으로 무용한 시간으로 느껴졌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이지만 어쩌면 그로부터 십몇 년이 지나서 13개월 동안 시를 읽기 위해서 보낸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좋아서 읽는 그 모든 책들은 무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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