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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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만큼은 이런 저런 서평을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책.

 

눈으로는 즐겁고 마음으로는 편안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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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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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스무 살 시절에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네요. 원하는 학과에도 진학하지 못했고, 연애는 대부분 지지부진, 미친 듯이 시를 썼지만 읽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 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어'와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아져'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그 사이에는 우연과 운 같은 게 숨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쓰는 일 뿐이에요. 그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만 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에요.

 

예를 들어 정신과 환자의 불안이 있어요. 앞에 의사가 있잖아요? 상담하면 이 의사가 뭘 물어보겠죠? 대답해야만 하는데, 환자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정신병이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의사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실 의사는 원하는 게 업을 수도 잇어요. 그렇지만 환자 쪽에서는 먼저 그가 원하는 걸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당할 때 제대로 대답하는 게 맞는지 불안해지죠.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이에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 여기서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이죠. 연애 초기에는 누구나 이런 신경증 환자죠. 하지만 신경증 환자들만이 현대문학을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음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1988년에 교보문고에 처음 갔는데, 그떄는 교보문고에 있는 책을 다 읽을 것 같았어요. 고 3이었거든요.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면 거기 꽂힌 음악도 모두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땐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탐닉했죠. 심지어는 빈둥거림까지도 탐닉했어요. 중년이 되면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러다보면 점점 고전 쪽으로 관심이 기울게 돼 있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해요. 말하자면 아는 대로 행동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해야만 하죠.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그건 의도하지 않는 변화죠.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쓴 소설이 그렇게 작용해서 누군가를 바꿀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의 의도도, 독자의 의도도 전혀 아닐 거예요. 불가항력적인 우연한 사건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글로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만, 제 글은 누군가를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개 우리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요.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었다는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실들이 갑자기 의미심장해지는 순간이 찾아오죠. 낙화시절이라는 말이 시어가 되는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되고요. 하지만 그것 역시 순간의 깨달음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아요. 이 봄에 제가 진짜 배우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일순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게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뭘 아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잊어버린다는 것, 언제라도 잊지 않는 것들만이 내가 아는 것이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애쓰는 봄이랄까요. 언제 어떤 순간에도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실을 잘 몰라요. 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매 순간 까먹거든요. 대개의 경우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잊지 않기 위해서, 예컨대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글은 쓰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사실을 늘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작가의 딜레마입니다. 글 쓰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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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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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소설을 연재했을 시기에, 원래 연재하는 소설 말고 따로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깝다. 그러니까 실제로 연재하는 소설을 주중에 비유한다면, 작가가 연재와는 별개로 그 시절에 쓴 글들은 주말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저 그 당시 작가의 글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책으로 나왔다면 더 이상 '일요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이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글들은 작가에게 주말이 아닌 주중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감안한다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나치게 가볍다. 만약 이 글들을 책이 아닌 인터넷 상으로 접했더라면, 처음 이 내용들을 담고 있는 도구 그대로 접했더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SNS는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활자화되어 작가의 이름을 달고 책으로 나왔을 때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들은 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좀 막막하다고 말했었죠?

그때는 랩탑에서 글자 크기를 11포인트로 설정해 놓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 소설이 풀리면 10포인트로 다시 바꾼답니다.

소설이 막막할 때는 글자조차 흐리게 보이다가

자리를 잡아가면 그제야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

간사하게도 그 단계가 되면 11포인트이기 때문에 화면이 벌어지는 느낌이고 내용까지 산만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어떤 기회에 영화배우를 실제로 보게 되면 먼저 드는 생각,

'초점이 잘 맞은 것 같다.'

뭐랄까, 선명하게 보이는 거죠.

예쁘고 멋진 사람을 볼 때에는 뭔가 환하게 잘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요.

머릿속에 설정돼 있는 아름다움의 틀에 딱 맞아떨어지기 떄문에

흐트러지지 않은 선명함으로 찍혀나오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모호하고 흐리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보였던 거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니 작년에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었던 모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 중인 여배우의 실물을 처음 봤을때, 참 시원했다고. 마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나 경치를 보는 것 같았다는 그런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표현은 달라도 결국 비슷한 것을 느끼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간에 습관적으로 트위터에 접속.

거기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나도 곧바로 답글을 올렸거든요.

-아, 7년 전 타코마에서 본 공연의 감동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링고 스타만 남았군요.

그러자 사망설을 전한 분이 다시 답을 했어요.

-진심으로 슬퍼하시니 힌트를 드리겠는데요, 오늘이 며칠입니까.

 

며칠 지난 다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나는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곧바로 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그럴 때가 있어요.

소설 안에다 아는 것을 모조리 다 써놓고

퇴고를 하며 혼자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소설 쓸 때 방해가 되는 것들.

-술과 장미의 나날, 개콘과 하이킥, 영화, 당연히 책, 소풍 욕구, 타락 본능, 새련된 태타 등등.

거기에 '자랑'을 포함시켜야겠어요.

 

 

태타라는 단어가 있었구나. 찾아보니 아주 게으르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태하다는 것과 타성에 젖었다는 말을 합쳐놓은 정도의 말이 아닐까. '세련된'이라는 수식어도 참 잘 어울린다.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이거 아마도 산도르 마라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바람직한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는데, 최소한 꼬리를 물지는 못하더라도 저 앞에서 살랑거리는 꼬리의 끝자락은 보면서 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산도르 마라이의 책을 한 권이나마 읽은 게 스스로 대견했다.

 

오래전, 지원자와 청원자 과정에 있는 예비수녀님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지도 수녀님 말씀이,
-우린 생활조건이 단순해서 몸도 단순해요. 그래서 아프면 의사들이 진단내리기 쉽다고 해요.

 

 

생활도 단순하니 몸도 단순하고, 진단을 내리는 과정도 단순하구나. 말장난 같지만 당연한 일이다. 생활이 복잡하면 술, 담배, 과식, 카페인, 스트레스, 수면 부족... 온갖 병인들이 전부 뒤엉키는데 생활이 단순하면 이것 저것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요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단순하게 살 것을 부르짖는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올해부터는 더 단순해져야겠다. 


 

 이건 어떨까요. 「내가 살았던 집」의 구절인데.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꿈이 있다는 건 쉬어갈 의자를 하나 갖고 있는 일.

 

꿈=쉬어갈 의자. 보통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살기로 뛰거나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꿈이 있어서 쉬어갈 수 있다라... 그런데 맞는 것 같다.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 넌더리를 내게 되겠지.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이 있다면, 그 꿈은 그저 이 정도에 불과한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이고, 숨통을 트이게 할 것이고, 하늘을 바라다 보는 여유를 가져다 주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물을 두 번 보게 된다. 한 번은 내 눈으로, 또 한 번은 그 사람의 눈으로. 내 관점과 감각이 두 겹이 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관점과 취향이 점점 가까워진다.

 

 

두 겹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진다는 표현이 참 좋다.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지만, 또 다른 프레임으로도 세상을 기꺼이 바라볼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작가는 직업상 문자에 민감하죠.

현수막이나 포스터, 텔레비전 자막, 간판......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문자에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틀린 말이나 맞춤법이 거슬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구요.

물론, 재미있고 좋은 문자라면 가장 먼저 효험을 느끼겠죠.

 

뮤지션에게서 들은 얘기인데요.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 평소보다 템포가 좀 빠르게 느껴진대요.

어? 뭐가 문제지? 생각해보니 자신의 몸이 아직 덜 깨어난 거였다구요.

음악이 빨라진 게 아니라 내 몸이 느리게 깨어나는 중......

그렇군요. 뮤지션은 소리에 민감하군요. 당연한 일.

유리창의 무늬에 민감한 건......유리창닦이일까요?

 

나는 또 무엇에 민감할까.

무엇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어 행복과 슬픔과 사랑을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걸까.

 

 

나도 맞춤법을 인지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줄임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도 싫어한다. 그렇다면 나도 작가가 될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일까?

 

 

누가 말했냐에 따라 엄청나게 뜻이 달라져버리는 말이 있다. 나 소설 못 써요. 이 말이 농담으로 들렸으면 좋겠다. 가끔 내 인생이, 독선적이면서 내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과의 기나긴 문학 토론이 될 것 같은 우울한 생각이 든다.

 

 

아, 이 문단에서는 단 한 문장도 뺄 수가 없다. 단 한 문장도 보탤 필요가 없다.

 

 

시간을 좀 주세요.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배선이 엉켜 있어 생각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다 보니 그중에는 분명 이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도 있을 거예요.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선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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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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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실밖에는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를 즐길 수 없게 된다. 언젠가 저런 영화 같은 일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설렘과 희망이 사라진 로맨틱 코미디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내가 만드는 음악은 불안과 고통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력과는 무관하다. 고통을 잊기 위해 8월의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해 아파트 지하주타장을 달리며 만든 5집 앨범은 내가 만든 다섯 장의 앨범 중 가장 많은 것을 안겨다 준 앨범이 되었으며 반면 가장 사건이 없을 때 만든 4집은 그다지 많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결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창작자라면 창조는 천재성이 아닌 고통에서 더 많은 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좋은 작품을 내기가 힘들다. 인생의 굴곡이 험준할수록 작품에도 그만큼 진한 드라마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친구가 슬프고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와 좋은 일,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 중 어느 쪾이 더 크고 진한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마치 그 순간만큼은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인 것처럼 진심이 발동해 위로했던 경험을 누구나 몇 번씩은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다. 슬픔의 위로는 대단한 우정이 아니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게 믿을 수 없는 행운이 찾아왔다. 친구는 내게 실시간으로 일의 진행 상황을 전하다 마침내 대박을 알려왔는데, 거짓말처럼 일이 풀려가는 걸 보며 놀랍고 기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한 10%쯤의 질시의 감정 또한 커져가던 걸 난 또렷이 기억한다.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일이 잘 되어도 내 몫이 줄어들거나 나와 비교될 일 같은 건 없을 텐데도 내 맘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떄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 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자, 자신이 보통의 재능과 운명을 타고난 그야말로 보통의 존재라는 것도 알았고,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세월이 갈수록 나를 가려주던 백열등이 수명을 다해 가고 있음도 직시하게 된 지금.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나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생을 마친 후 만약 신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는 나를 가혹하게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 지친 나를 가엾이 여겨 쉬게 해줄 것인가. 만약 내게 주어질 천당이라는 게있다면 행불행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만한 공평함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천당일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쌀쌀맞고 냉정한 의사를 만나 더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한평생 삶에 대한 회고를 객관적으로, 그러나 따스한 시선으로 들어줄 수 있는 인격과 덕성의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진실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애란?

누군가의 필요의 일부가 되는 것.

그러다가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

나중에는 결론의 일부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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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물결이 치듯이 글을 계속계속 읽고 싶어지도록 잘 쓰는 사람들이 있다. 문장력이 뛰어나다거나 기가 막힌 어휘를 구사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투박하더라도 마음에 와닿게, 때로는 슬프기도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다. 그런 글을 읽으면 그 작가에 대해 막 알아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일종의 질투심이 들기도 하는데, 대개는 인생의 굴곡이 많고 아픔이 많았던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만약 좋은 글을 쓰는 대신에 나에게 이런 시련과 아픔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삶과, 평생동안 남의 글만 읽고 부러워하는 대신 평탄한 삶을 살게 되는 두 가지 선택 사항 중에서 고르라면 당연히 나는 후자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글쓴이는 스스로 가난했던 뮤지션이라고 밝히고 있다. 언니네 이발관은 꽤 알려지긴 했지만, 소위 떼돈을 벌어들이는 연예인은 아닐 것이다. 음악가로서의 삶은 아마도 고달프고도 힘들 것이고, 거기에다 이혼,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와 우울증등으로 인한 정신과 폐쇄병동 입원 등의 일화를 읽다 보면 이런 글을 쓰기까지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힘든 시기를 겪고 이제는 어느 정도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선 작가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작가가 책에서 말하듯이, 창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어느 정도 필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창작물을 향유하는 사람들, 그게 영화의 관객이 되었든,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이 되었든, 책의 독자가 되었든 간에, 그들도 똑같이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어야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사는 것 자체가 이런 저런 지리함과 멸렬함과 자기 비하와 부끄러움 등으로 여러 번 덧칠되고, 어쩌다 한번씩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이 오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즉, 감상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창작을 하는 사람만큼의 고통이 없어도, 그저 묵묵히 이 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정말 힘든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조금 더 견딜만 해지는 게 인생일 수도 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접했더라면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시기를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이 책은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 시기에 이 책을 접했더라면 마치 나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이 책이 반가웠겠지만, 지금의 나는 잘 읽다가도 중간중간 이 부분은 감정의 과잉 아니야? 혹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 혹은 이렇게 세상을 전부 타자화시킬 필요가 있나? 왜 일부러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한 동안은 이런 류의 책들만 골라서 읽었는데 요즘은 이런 류의 책들을 될 수 있으면 피하게 된다. 아니면 큰 마음 먹고 단기간에 집중해서 읽어버리든지. 책도 인간관계처럼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내 인생에서 한 때 이런 책들에 홀릭했던 적이 있다면, 지금은 이런 책이 아니라 다른 책에 또 홀릭할 시기인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을 주기로 좋아하는 책의 부류가 바뀌어가면서 자연스레 또 나의 관심사와 세계관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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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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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겉표지 뒷쪽, 작가의 설명의 첫 문구가 '자전거레이서'.

 

김훈은 소설 뿐 아니라 수필 '자전거 여행'으로도 유명하다.

 

'풍륜'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줄 정도로 자전거에 대한 애착이 큰 데, 단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도 요즘 작가들 중에서는 사소한 부분을 괜히 부풀리거나 스스로를 이슈화 만들려는 모습이 간혹 보여서 약간 거부감이 든 적도 있었다. 물론 김훈의 글을 보면 그가 허례허식이나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설명에 그 어떤 이력보다 제일 먼저 자전거를 타는 사람, 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는 그가 얼마나 소박하고 꾸밈없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떠올렸었다. 기자로, 작가로, 살고 있는 김훈이기에 그 직업에 대한 애환이 등장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제목을 잘 붙인 책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자를 낚기 쉬운 제목을 붙인 책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 것 같다. 김훈의 책이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절판 된 것을 보면 제목으로 인해 독자를 끌어들였다가 오히려 그 제목과 글의 내용의 불일치로 호감이 깎이게 된 것이 아주 조금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머리말에서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운명 사이에는 사소한 상호관련도 없다는 또 다른 운명도 보인다. 하루의 시간이 흘러서, 아침과 저녁의 냄새가 바뀌고 빛의 밀도가 성기어진다. 천지를 가득 메운 대낮의 빛들이 사위는 저녁에는 숲의 안쪽까지 잘 들여다보이고 숨쉬기가 편해진다. 빛이 성긴 저녁, 사물의 안쪽은 잘 드러나는데, 그때 대낮의 빛들은 모두 하늘로 불려 올라가 한강 어귀의 노을로 퍼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빛과 노을과 쥐와 새에게로 건너가지 못하고 마루에 주저앉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이제 묶는 조각글들은 이 물가에 살면서 내 영세한 생계를 버티어내기 위해 쓴 것들이다. 본래 그러한 것들을 향해 입을 벌려 지껄일 필요는 전혀 없을 터인데, 나는 일 삼아 지껄였고 지껄일수록 가난해졌으니 불쌍하다. 나여, 어째서 늙은 강물 옆에서 침묵하지 못하는가.

 

이 문맥만 놓고 보면, 밥벌이를 하기 위해 글을 썼고, 여기에 있는 글조차 다르지 않으며, 이제 늙은 자신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다. 글쎄, 젊은 작가가 패기넘치게 비록 배는 곯을지언정 나의 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모습과는 사뭇 대비되어 마음이 아프고 쓸쓸하다. 어디 김훈 뿐이랴. 대한민국 작가 중에 손 꼽히는 이 사람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누구나 다 지겹도록 밥벌이를 하면서 살 것이고,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하여, 김훈의 이 말은 오히려 수많은 우리 같은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조각글들 중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을 보면 이 책을 쓸 때의 김훈의 생각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라는 글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산 속의 무덤들은 여럿이 모여 있지만 그 모임은 군집일 뿐 소통은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개별적 행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들 혼자 죽어서 저 혼자만의 무덤을 이룬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갈 때, 세상의 질감은 완전히 바뀐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함께'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라는 실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둘'이란 그 '하나'의 중첩에 불과한 것인가. 새 두 마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풍경과 대치하고 있기보다는 새끼리 서로 대치하고 있다. 두 마리가 날아갈 때 '너'와 '나' 같은 인칭이 발생하고 비로소 언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발생한다. 세 마리는 '너'와 '나'와 '그'를 이룬다. 세 마리는 각자의 일인칭을 거느리면서 삼인칭의 공간을 날아간다. 세 마리가 날아갈 때, 언어는 더욱 교묘해지고 복잡해진다. 세 마리는 가장 편안한 세상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 마리가 날아갈 떄도 새들은 역시 한 마리씩 날아가고 있다. 세 마리가 이뤄 내는 세상 속에서 한 마리가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세 마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새 세 마리는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새들이다. 하나와 둘과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두에게 환영받을 만한 문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반가운 구절도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또 무서워하는 물건은 자동차다. 나는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10톤 트럭이나 탱크롤리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자동차 중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차는 서너 명씩 타게 되어 있는 승용차다. 시내에서 볼일 보러 다닐 때는 가까우면 걸어서 가고 세 정거장 이상 거리면 버스를 타고 간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을 잘 들여다보면 일상 속에 죽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며, 죽음과 일상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쾅 소리 한 번에 튕겨져 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마침내 죽을 것이고, 그가 죽는 과정에서 또한 남을 죽일 것이다. 겁 많은 사람들이 이 하찮은 삶을 그나마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자동차가 이처럼 늘어났으니 되도록이면 거리에 나가지 않아야겠다.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이라는 조각글의 일부이다.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교통사고에 대해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심해서 절대 나쁠 게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작가의 말대로 나는 겁이 많으니까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도 되겠지. 어쩌면 소소한 자신의 특성을 설명한 글일 수도 있고, 어쩌면 폭력과 광기를 의미하는 모든 것을 전부 거부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에는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에게는 전쟁가지도 문명의 질서와 규칙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허영심이 있다.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은 이 허영심을 법제화하고 있다.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를 엄격한 질서와 규율의 통제하에서 운영한다. [삼국지]의 세계에서는 기만, 술수, 뒤통수치기, 뒤에서 쏘기, 함정파기 같은 무질서와 야비함이 선명한 전술로써 작동된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라 [삼국지]에 가깝다. 국가의 기원이 폭력이라는 학설은 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렵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성이 있다. 제네바협정처럼, 문명개화된 허영의 규칙으로 전쟁의 과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규칙을 지켜가면서, 문명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접하면서 살육을 자행하자는 예절 바른 전쟁 규칙은 살육의 야만성을 정당화한다. 제네바협정은 추악한 위선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글은 <치욕>이었다.

 

나는 1948년생으로 올해 55살이다. 전쟁 때 유아기를 보냈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라나 박정희 유신 통치 밑에서 신문기자를 했고 전두환 시절에 엎드려 있었다.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운명에 나는 감사한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내가 체험한 시대의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다. 내가 지금의 신분과 역할로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일은 식은땀 난다. 나는 인간의 역사 속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치욕을 긍정한다. 치욕을 도려내버린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언어화된 이념일 것이고, 역사는 치욕과 더불어 비로소 온전할 터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상해와 중경에서 김구 선생을 모셨던 임정의 청년이었다. 그분은 김구 일행과 함께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동포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 비굴한 대다수의 동포들이 바로 민족과 국토와 언어를 보존한 힘이었다"라고. 그때, 나는 내 아버지의 늙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당대의 사람들이 친일과 반민족의 고통을 말할 때, '늙음'의 바탕 위에서 말해주기 바란다. 내 말은 그 '늙음'의 마음으로 친일과 반민족의 치욕을 뭉개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치욕으로써 긍정하자는 말이다. 치욕을 긍정하는 또 다른 치욕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또한 감당되어야 할 치욕인 것이다.

 

그 어떤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보다도,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 특히 가장 힘 없고 비참하며 보호받기 힘든 약자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철도 파업의 현장에서 쓴 <늙은 기자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다.

 

24시간 맞교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동제도이다. 24시간 맞교대는 하루나 이틀이라면 몰라도 그 직업을 생애로 삼아야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제도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자명함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진보이기 때문에 24시간 맞교대가 부당하고, 보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토록 분명하게도 부당한 것들의 부당함이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이념이라는 것이었을까.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는데, 이처럼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발전의 원리인 것인가.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가. 기어이 '본때'를 보여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절규하는 무수한 담론과 소설과 시와 음악이 있엇다. 결국 개선은 '본때'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의 성취 내용을 송고하면서 늙은 글쟁이는 비통했다. 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처럼 어려워야 하는가.

 

나는 학창시절 김지하나 신동엽 등 저항 시인의 시를 공부하며 자랐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미국의 한 유명 작가의 말을 사춘기 이전부터 깊이 새겼던 사람이라 늘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선망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의 물질적인 욕구에 초연하고, 늘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으며, 조용히 나의 할 일을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진실에 눈을 뜨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그래서 이 구절은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아마도 글쓰기가 밥벌이가 된다면, 이렇게 자신의 일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무력감에 빠지게 될까. 아무리 귀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직접 직업이 되면 그 당사자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허탈감을 안겨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작가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유일하게 작가가 이 글에서 긍정하는 것은 민중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백성들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수몰되지 않는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때는 석탄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 에너지였다. 지금 석탄산업은 완전히 저물어간다. 석탄산업이 저물어가자 많은 광부들은 탄광을 떠났고, 늙고 병들어서 떠날 수조차 없는 광부들은 산재병원에 입원했다. 김윤식 씨는 "자식들이 취직해서 좀 살만해지니까 죽을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진폐의 먼지로 그의 호흡에 실려 그의 허파속에 앙금으로 엉겨 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대박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카지노는 연일 불야성이다. 김윤식 씨의 큰 딸 김선명 씨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한다. 김선명 씨 뿐 아니라 이 카지노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지방 광부의 자녀들이다. 젊은이들은 카지노, 호텔로 변해버린 고향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김선명 씨는 "옛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양쪽 다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늙은 광부가 진폐로 쓰러져가고 인간의 삶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다치거나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가진 사람들의 내면에 끝끝내 망가질 수 없는 부분들은 여전히 온전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뿌리뽑히고 거덜난 삶 속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는 일은 늘 눈물겹다.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말없는 실천에 도달한 그들의 삶은 성자의 삶처럼 보였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허무함을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김훈의 책 [칼의 노래]에서 주인공 이순신도 그랬고, 수많은 백성들도 그랬다. 고통과 허무함을 인식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말없이 견뎌내는 것, 그게 김훈이 찾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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