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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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삶다운 것인지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것으로 얼마나 많은,값진 것들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지 월든에서 몸소 체험을 하듯 이년여간의 오두막 생활로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누군가에는 ’로망’ 이고 누군가에게는 ’꿈에 그리는 전원생활’ 이 될지 모른다. 도시에 길들여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땅을 밟고 땅을 일구며 자연의 일부처럼 살아가기를 원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도시에 있는듯 하면서도 요즘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종종 들려주는 도시에서 얻지 못하는 여유나 자연은 내겐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직은 아이들을 핑계로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간이 나면 늘 자연과 함께 하려 뒷산이라도 오르는 생활을 하려 하지만 한시간여 하루에 내게 여유를 부린다는 것도 어찌보면 사치로 보여질때가 있다. 자연이란 것이 눈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고 가만히 귀 기울여야 비로소 내게 온다. 

눈을 낮추어야 보이는 꽃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뒷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겐 그냥 뒷산이던 것이 눈을 낮추고 자연을 들여다 보면서 ’새로운 세상’ 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자연의 소리뿐만이 아니라 철마다 피는 야생화와 나무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들이 보고 싶어 시간이 나면 혼자서라도 뒷산을 오르거나 들길을 걷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들을 모두 고스란히 사진에 담아 감상하다 보면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동안 보고 자란 삭막한 시간들은 모두 덧없이 느껴져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런 나를 ’가지 않는 길’ 로 인도하기엔 아직 멀었다.

이 소설은 프루스트의 ’가지 않는 길’ 처럼 누구나 그런 생활을 하기엔 어렵다. 하지만 정말 인생에서 한번 정도는 도전하고  체험해 보고 싶은 아주 값지고 멋진 생활을 누리지 않았나 싶다. 나무와 야생화가 무성하고 새들이 많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손수 짓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문명과 경작으로도 그는 누구보다 더 행복하고 값진 것들을 누리며 자연을 즐겼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밤마다 들려오는 부엉이소리 개구리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동물들과 야생적인 생활이지만 그 어느때보다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 준 혜택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철마다 변하는 오두막 주변의 풍경과 동물 식물들에 대한 표현도 정말 세세하면서도 풍성한 감성이 녹아 있어 대단하다. 많은 독서량과 풍부한 자연이 준 혜택이 아닐까 하면서 마치 월든의 호숫가 오두막에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문명과는 떨어져 조금은 불편할지 모르지만 한달이라도 그렇게 살아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한자리 낀듯한 느낌을 받으며 읽다보니 봄비가 내린 후 초록이 짙어진 숲으로 들어가 봄비를 머금은 후 피어난 야생화와 나무들 그리고 바람과 새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은 자연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일 터, ’내가 2년 동안의 경험에서 배운 것은, 첫째로는 이처럼 높은 위도에서도 사람이 필요한 식량을 얻는 데에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적은 노력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사람이 동물처럼 단순한 식사를 하더라도 체력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이기심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속에 있는 것만으로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요즘은 암등 큰 병을 가진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듣고 매체를 통해 보았다. 숲은 자연치유를 자신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넉넉하게 나누어 주어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쳐 주는 듯 하다. 뒷산이라도 산행을 다녀온날은 맑은 공기에 샤워를 하고 나온것처럼 개운하다. 야생화나 들꽃 이름모를 버섯하나를 발견하고 나온날은 정말 기분이 좋다. 소로우만큼은 아니어도. 그가 21세기적 삶과 생각을 가지고 살지 않았나싶다. 그는 로빈후드적 삶을 살면서 월든의 자연을 세세하게 묘사한 것은 에세이라기 보다는 환경다큐를 연상케 하면서도 독서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생각들이 깃들어져 있어 사색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이다. ’내 모든 살림도구가 풀밭 위에 나와 집시의 봇짐처럼 한 무더기로 쌓이고, 내 삼각 탁자가 책과 펜과 잉크가 그냥 놓인 채로 소나무와 호두나무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마루 청소를 하기 위해 얼마안되는 가재도구를 햇빛을 쏘이기 위해 밖에 내 놓은 것을 보며 미소가 절로 나왔다. 참 여유로운 풍경이다. 어느 누가 자신이 모든것을 버리고 이런 생활에 당당히 발을 벗고 나설 수 있겠는가.

숲과 자연 야생화와 나무 호수 새소리 바람소리등을 좋아하는 난 언제일지 모르지만 먼 미래의 삶을 19세기 소로우의 삶에서 찾듯 대리만족을 하며 읽었다. ’ 나의 집은 언덕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커다란 숲이 바로 거기에서 끝나고 있었으며, 집 주위에는 한창때의 리기다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호수까지의 거리는 30미터쯤 되었으며 집에서 호수로 가는 길은 언덕을 내려가는 작은 오솔길로 되어 있었다. 집 앞의 뜰에는 딸기와 검은딸기, 보릿대국화, 물레나물,미역취, 떡갈나무의 관목, 샌드벚나무,월귤나무와 감자콩등이 자라고 있었다.’ 정말 그가 그려 놓은 대로 보면 ’그림 속 언덕위의 집’ 이다. 자연을 내 안에 들여 놓기 위해서는 자주 자연과 함께 하며 그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 시간이 늘어나다보면 자연은 내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무엇으로도 얻지 못하는 값진 것을 얻은것처럼 행복감을 그 속에 느낄 수도 있고 그런 생활이 삶이 될 수도 있다. 돈이 많아서 부자보다는 자연을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담은 사람이 정말 부럽다. 그 속에 있으면 사람은 모두가 평등해지고 자연앞에 평범해진다. 그가 누린 ’혼자만의 세상’ 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나무들처럼 빽빽한 글자들과 표현, 그리고 그의 생각들이 말해준다. 19세기에 21세기적 철학을 지닌 그의 2년여간의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의 삶은 환경과 자연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겐 큰 공감을 줄 책이며 내겐 감동이었다. 그로인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꿈의 로망이 ’월든’ 에 고스란히 담겨진듯 내 안에 담겨지게 되어 기쁘다. 지금보다 십여년 더 내 삶이 깊어지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빽빽한 글자와 딱딱해서 조금 읽다 지칠 수 있는데 참고 읽다보면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 어찌보면 잇속을 따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자연은 개발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누릴때 비로소 우리것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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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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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할지 스스로 '인간 교과서' 가 되기로 자처한 모리 교수, 그에게 육체란 그저 맑은 영혼을 감싸고 있는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단단한 것일까.루게릭 병,흔하지 않은 병이지만 최근의 영화에서도 보여지고 매체를 통해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며 생소하던 병은 낯설지는 않지만 그사람의 최후를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 주위의 친근했던 사람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곁을 떠나는 일이 종종 발생을 하여 슬픔에 잠긴 일이 다른때보다 많았다. 그들중에는 스스로 삶을 비관하여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얼마전에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처럼 자신이 나서는 길이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나섰다고 뜻하지 않게 선택된 사람도 있고 자신안에 숨어 있는 병을 발견하지 못하여 갑자기 병에 지고 만 사람도 있다. 슬픔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기에 갑자기 닥친 유와 무의 사이에서 한동안 방황을 하기도 하고 무의 존재를 믿지 못하던 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준비하지는 못한다. 그런 반면에 어쩌면 자신의 남은 시간들을 자로 재듯 하루하루 지워 나가며 자신의 육체에서 영혼이 서서히 빠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무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또 그런 일을 옆에서 지켜 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며 안타까움일지 내 아버지가 큰 병을 얻고 나니 새삼스러워졌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 한사람이 한동안 차지한 공간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한다. 그런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듯 제자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모리 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연함은 가슴을 적신다. 하루하루 앞만 보고 달리던 미치에게 서서히 몸이 굳어가면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모리교수와의 만남은 그 자신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암과의 사투에도 가족과 함께 하지 않고 멀리하고 있는 동생과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그가 모리교수와는 어떻게 작별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점점 자신의 육체를 병에게 점멸당하면서도 '영혼' 을 잃지 않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라.' 모리교수는 그랬다. 자신이 육체가 서서히 굳어가면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인정해 나감으로 좀더 자신의 마지막을 편하게 보낼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면서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라.'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모두를 용서하고 동생과 화해를 하라는 충고를 해준 모리, '너무 늦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를 바랬던 노교수 모리는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같다.비록 병에 육체를 빼앗기기기는 했지만 그의 정신은 마지막까지 온전히 지킨듯 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최후에 남길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창한 것이 아닌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 그보다 더한 것들이 있겠지만 사소한 것들도 하지 못하고 마음에 쌓아두고 우린 어쩌면 스스로 벽을 만들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벽을 허물기에는 한평생이 걸릴수도 있고 단시간에 허물어지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만든 벽에 갇혀 나약하게 살기 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라는 말처럼 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베풀며 산다는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나이 드는 것은 단순히 쇠락만은 아니네.그것은 성장이야. 그것은 곧 죽게 되리라는 부정적인 사실 그 이상이야.' 왜 그 마지막 순간에 깨달아야 하나. 마지막까지도 깨달지 못하는 이도 있겠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선 모리교수가 전해주는 말들은 모두가 주옥같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것 또한 '자네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 이라며 베품을 강조한 노교수, 인간은 늙고 병들고 쇠락해지면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듯 보살핌을 원한다. 그런 그의 곁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깨우친 미치는 노교수의 말을 빌어 '사랑은 살아있는 방법.' 이라고 전해준다.

'테드. 이 병이 내 영혼을 두드려대고 있어요.하지만 내 영혼을 잡아먹진 못할 거예요. 내 몸은 잡아먹겠지만, 내 영혼은 '절대로' 잡아먹지 못해요.' 병이 서서히 발끝부터 가슴까지 그리고 언어까지 잠식해 들어와도 그의 영혼은 결코 지배하질 못했다. 강인한 정신력,영혼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언가 놓치고 있다면 지금 뒤돌아 보고 자신안에 있는 사랑을 베풀라는 노교수의 말이 가슴에 맺힌다. 사랑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음을 쓸 때가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 노교수의 울림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버지 때문일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보면 제일 험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 모르는 그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 안에서 춤을 추었던 노교수는 어찌보면 자신안에 있던 마지막 '사랑의 알맹이' 까지 모두 빼내어 이 책에 고스란히 남겨 놓지 않았나싶다. 삶이 힘들때 슬픔이 모두 나의 것처럼 느껴질때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 의문이 들 때 읽는 다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죽음은 내겐 더 열심히 살아가라는, 삶의 길목에 등불을 밝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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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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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것 자체가 바로 계단을 오르는 일이니까.’
삶이나 인생에서 정답이 있을까.정답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삶일 듯 하다. 어느 길로 가나 자신이 가는 것이 길이다라는 말처럼 자신이 개척한 삶에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때론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얻을 수 있고 큰나큰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 누가 어떤 길로 가서 성공을 했다고 반드시 그 길이 모두의 길이 아니듯이 한걸음도 떼기 전부터 성공을 부르짖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모든 걸음은 한걸음으로 시작하여 정상까지 올를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삶의 선물이 되는 이유, 올해 초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작은아버지를 잃었다. 작년 여름에 친정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폐암판정이 나고 그동안 아버지께 살갑지 않게 했던 작은아버지는 그소식에 부쩍 외로워 하시고 슬퍼하시며 그동안 형에게 못한 정을 쏟듯 오며가며 시골집에 자주 들르곤 하셨다. 난 그런 작은아버지의 외로움을 막닥뜨리게 되었다. 슬쩍 마음 한켠에 감추고 계시던 속정을 내게 쏟아 내며 울적해 하셨던 작은아버지는 겸사겸사 명절전에 형님을 찾아뵈야겠다며 서둘러 눈길을 나서시다 교통사고를 당해 그자리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일로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병은 더 깊어졌다. 쉬쉬 하며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던 병이 깊어져 우리 자식들은 좌불안석이었는데 당행히 아버지는 그 뒤로 일어나셨지만 예전만 못하시다. 하지만 중상을 입고 고통을 당하지 않고 돌아가신것으로 우린 만족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일도 슬픈데 작은아버지의 일은 더욱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를 더 돌아보게 되었고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한번 더 부모님 살아 계실때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친척분들도 아버지를 한번 더 뵈러 오시게 되었고 따듯하게 챙기게 되었다. 고통에 한동안 힘들어 하셨던 아버지는 큰 일을 겪고 나신 후 달관을 하듯 아픔을 들어내지 않으신다. 작은 일에도 크게 웃으시며 우리를 맞이하기도 하신다. 슬픔이 가져다 준 감사한 일처럼 그렇게 우린 또 하나의 슬픔을 준비하고 있지만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보다는 삯일줄을 알게 된 것 같다.

아버진 동생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내가 찍어다 보여드린 디카 속 사진들로만 그날의 모든 일들을 보시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동생을 잘 보내드린듯 ’좋은데 갔나보다.’ 하시는 말씀으로 일축하셨다. 동생의 사고소식을 듣고 쓰러져 응급실에 계실때 물어보니 당신도 갑자기 그렇게 최후를 맞을까 두려웠던 모양이셨다. ’두려움’ 우린 지금도 날마다 그 두려움이 언제 닥쳐 올지 걱정하고 있다. 평생 인생의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소유’ 의 삶처럼 땅을 일구며 식구들 배 곯지 않는 것으로 만족을 하며 사셨던 아버지는 마지막 그날까지 농사를 지으시겠다며 지금도 날마다 밭으로 나가 농작물을 일구신다. 며칠전에는 감기까지 걸리셔서 무척 힘들어 하고 계시다.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기꺼이 받아 들이는 그 낮은 자세가 괜히 목울대를 콱 붙잡는듯 속울음을 울어야 하는 마음,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늘 웃고 큰소리 내고 내 거짓된 행동처럼 부모님께 보여지는 모습이 가끔은 싫지만 고통을 감내하고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떤 일도 참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인생이란 슬픈것만은 아니란다... 슬픔이 없다면 기쁨을 갈망하지 않을 터이고, 기쁨을 찾으려 애를 쓰거나, 기쁜 일이 닥쳤을때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 같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쁨이나 슬픔이 늘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지. 또 그 둘 중 하나가 자주 우리 여행의 동반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항상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쁨과 슬픔이나 행복과 불행도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내 인생에는 왜 늘 슬픈 일만 있을까.’ 혹은 ’나는 왜 늘 불행한 일만 있지.’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 얼마나 많은 기쁜 일들이 혹은 행복한 일들이 우리의 하루하루를 지나쳐 갔을까.세 잎 클로버의 말은 행복이다. 수많은 행복속에 감추어진 네잎 클로버,행운을 찾기 위하여 우린 늘 우리 곁에 있는 행복을 놓치고 만다.그처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지기에,불행이 더 크게 느껴지기에 행복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절망 뒤엔 무지개처럼 ’희망’ 이란 쌍생아가 있으니. 비 온 뒤에 더 맑은 날을 만날 수 있듯이 슬픔과 불행의 터널을 지나다 보면 강인해질 수 있다. ’강인함은 노력과 고통의 선물이다.’ 라는 말처럼.

’역경을 통해 얻은 강인함은 역경에 다시 부닥쳤을 때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오.’
큰딸이 중학생이었을때는 공부좀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고 녀석은 잘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 자신감을 잃었는지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시험’ 소리만 들어도 속이 좋지 않은 현상을 나타내며 자괴심에 빠져 스스로 혼란에 빠진 듯 했다. 잘하던 과목들도 자신감을 잃고 그런 딸을 보며 늘 하는 말이지만 ’첫 술부터 배부르려 하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가라’ 했다. 모든 일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정상을 밟을 수는 없듯이 조금 노력했다고 모든 공부를 다한듯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며 ’인생도 그렇고 공부도 마라톤이다.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 공부인데 지금부터 눌러 앉아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자신과의 마라톤이라 생각해.’ 했지만 녀석에겐 그런 충고도 그저 배부른 엄마의 잔소리 쯤으로 들렸었던가 보다. 하지만 모자라던 과목에 포기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것만으로 반은 이룬것이라 했더니 좋았는지 더 열심히 그 과목에 매달리고 있고 그런 모습을 보여줘 고맙기도 하다. 늘 정상에 있을 때는 오르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몰랐고 내려가는 길은 단숨이라는 것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시작부터 힘들게 고지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정상의 길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정상에 더 오래도록 머물 수 있으며 하산길은 쉽게 내려갈 수도 있다. 녀석이 힘든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의 노력이 미래의 어느날에는 꼭 강인함으로 자리하여 단단한 결실을 맺기를 바랄 뿐이다.’인생이란 올라가야 할 수많은 언덕과 산을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단다. 아마 우리 마음과 정신의 어느 한쪽에선 올라가는 것이 내려가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게다.’ 

’인생이란 한 번에 한 걸음씩 걸어가는 여행이란다.’
늙은 매가 제레미라는 손자에게 들려 준 이야기중에 석수장이들이 몇 대를 거듭하며 산 정상까지 향하는 계단을 만든 이야기 중에 ’그래도 계속 가라.’ 라는 말은 삶이 힘들고 슬프고 불행하다고 포기하기 보다는 역경을 거듭하며 일어나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절망을 지나 희망이란 절망의 동반자를 만날 수 있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을 하듯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한걸음 한걸음 노력을 하다 보면 무언가 얻을 수 있는것이 인생이라는 말인듯 하다. 내 아버지의 삶을 엿보아도 아버지의 인생에서 크게 성공이나 행복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사건이나 일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불행한 삶을 사셨다고는 말할 수 없듯이 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거짓없이 하루하루 노력하는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고맙다. 암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안고 계시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올해 농사도 지으시겠다는 희망찬 의지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한걸음 한걸음 고통과 싸우다 보면 좀더 천천히 ’마지막’ 이란 것과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 을 나 또한 가져본다. 이 책은 절망하고 싶을 때 어디에선가 날 우연히 기다리고 있을 ’희망’ 을 가져다 준 책이다. 늙은 매의 말처럼 절망도 우리 안에 있고 희망도 우리 안에 있다. 그래도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뜬 다는 희망이 있기에 삶은 살 만 하고 오늘을 지탱하고 내일을 기다리지 않나 싶다. 양지만 걸을 수 없는 삶, ’그래도 계속 가라’ 라는 말처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자신안의 희망을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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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숨김없이 남김없이
김태용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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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하고 싶은 말을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워 나가는 것라고 생각했다.'
정말 독특한 책이다. 이야기가 이어나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없었던듯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시작되기도 하는 말들의 유희, 작가의 생각을 따라 가다보면 내 생각은 수면위를 둥둥 떠나니고 있는 부유물처럼 감이 갑히지 않는다.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언어로 어떻게 탑을 정교하게 쌓을 수 있을지 몇 번 쌓았다 허물고 다시 쌓기를 하면서 자신안에 있던 모든것들을 쏟아 내 놓는 것처럼 그의 생각속을 따라가다 보면 혼돈속의 질서가 보인다. 

자신안에 있던 모든것들을 지워 나가면 무엇이 남겨질까. '시작도 끝도 없는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장단에 맞춰 들려주었다. 들려주다가 먼저 잠든 것은 언제나 뭐였다.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언제나 뭐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끝을 맺지 못했다.'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들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서사처럼 줄줄 그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쏟아져 나와 강을 이룬다. 어디가 물의 근원인지 분간이 안되듯 그가 쏟아내는 흐름을 따라 가다 보면 재밌는 말장난처럼 늘어나는 말의 탑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의 형식속에서 소설의 틀을 깬 서사같기도 하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 는 어느정도 이야기를 갖추어 끝없는 이야기의 서사에 빠지는 소설이라면 <숨김없이 남김없이>는 김태용 작가의 말속에 갇혀 배를 어디에 대야 할지 모르는 난감함처럼 방황하다 지치다 겨우 나룻터를 발견하고도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해봐야지 알 수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을까.나름 재밌다. '감정에 급체한 미차가 언어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구역질하며 내뱉었다. 기름지고 부유물이 잔뜩 껴 있는 언어의 쪼가리들이 그녀의 욕체에 무질서하게 꽂혔다.' 그가 들어가사는 집주인 미파, 미친 노파가 끓여내는 한가지 음식 카레향처럼 그가 뱉어내는 언어의 쪼가리들은 독특한 향을 풍기며 구미를 당긴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서사에 가깝고 언어의 사실적인 표현들이 '숨김없이 남김없이 표현이 되어 작가를 주목하게 만든다.그가 다음에 쏟아낼 언어의 사실은 어떨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실 이런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어쩜 '인내' 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중간에서 포기할 수도 있고 처음부터 갈피를 잡히 못하다가 손을 놓고 말기도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언어의 실험적 표현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듯 하여 참신하면서도 거침없이 자신을 들어낼 수 있는 언어의 힘에 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뭐는 나를 낳아준 여성의 뜻에 따라 나를 뭐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다. 나의 이름은 뭐다. 뭐 말고는 인간을 만난 적이 없던 나는 모든 인간의 이름이 뭐인 줄로만 알았다. 뭐가 나에게 부르면 나 역시 뭐를 뭐라고 불렀다.' 이 소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읽으며 무척이나 생각했던 부분들을 표현해 준것처럼 그냥 작가는 '뭐' 라고 받아 들이라고 하는 듯 하다. 그의 독특한 언어의 유희에 한참 재밌었던 '숨김없이 남김없이.' 언제 기회가 된다면 천천히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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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니치 코드
엔리케 호벤 지음, 유혜경 옮김 / 해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진실을 발견하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가장 값진 보물이지.'
<보이니치 필사본> 언젠가 서프라이즈에서 본 듯한 현존의 책으로 600여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약초학,천문학,생물학,우주론,약학,처방전 등이 있으나 난해한 그림과 글씨로 해석이 되지 않고 있는 책이다. 소설은 물리학 박사이며 천체물리학자가 써서인지 과학사를 읽는 듯하다. 사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실제같은 소설로 천동설과 지동설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기념비적인 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의 죽음이 방광염이 아닌 누군가에 의한 타살,즉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한 살인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와 함께 천문학자들의 수학적 비밀을 담고 있다고 추정하면서 창조론과 진화론이 얽혀 있기도 하다.

예수회 소속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는 젊은 신부 엑토르와 그와 '보이니치 필사본' 의 암호를 풀기 위하여 같은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천문학자 존과 멕시코에 사는 암호해석가 후아나는 보이니치 필사본의 암호를 풀기 위하여 함께 뭉친다. 엑토르가 있던 수도원의 카르멜로 원장이 건네준 비밀의 열쇠와 같은 지하실의 정체와 수도원을 비워주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그들이 '보이니치 필사본' 의 암호를 찾아 나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천문학의 역사가 펼쳐서 더욱 사실감을 준다. 천문학에 관심이 없는 이가 읽는다면 좀 따분하기도 하고 지루할 수 있을 만큼 소설적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천문학적 지식을 펼쳐 놓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언제 이런 소설을 접할 수 있으랴 끝까지 읽다보면 정말 흥미롭고 재밌다.

소설은 매니아가 있다면 한사람이라도 매달릴것 같은 이미지를 부각시키듯 엑토르 신부의 수업에 열중하는 딱 한사람 시몬, 그가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다량으로 검색해 낸 자료들은 필사본과 그 시대의 천문학자들 이야기며 오래된 수도원과 성의 고古의 이야기와 현재의 인터넷을 이용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의견을 나눈다든지 메신저를 통한 현재의 이야기가 결합되어 예전의 것은 감추고 숨겨져 비밀인것이 많았지만 현재는 인터넷만 연결하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이 비교되기도 한다. 구시대의 사람처럼 수도원 원장들은 아날로그적이지만 젊은 신부인 엑토르는 디카와 인터넷을 주로 이용을 하는 점에서도 대비를 이룬다.

고등학교 시절 인문지리에서 접했던 천동설 지동설이며 메르카토르나 연금술 천문학자들의 이야기는 내겐 잊혀져 가는 지식이었는데 지루하지 않고 모험적인 신부인 엑토르를 따라 다니다 보니 재밌게 다가왔다. 존과 후아나의 사랑이 연결될까 했는데 후아나의 욕심이 화를 자초했는지 그녀의 죽음은 의외이기는 했지만 정보의 바다를 누비는 빠른 시대에도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두 된다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고 스페인의 오래된 수도원및 고성과 이탈리아의 가보고 싶은 유물들이 나와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든듯 하다. <보이니치 필사본> 에 담긴 진실이 무엇인지 그 진실이 밝혀진다면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진실을 발견되지 않아 더 흥미로운 이야기 '보이니치 코드' 이다. 

'후아나, 필사본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너무 깊이 빠진 보이니치 암호 풀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바꾼 여인 후아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오래된 역사를 먼지로 바꾸려 했던 여인의 욕심처럼 너무 과한 것은 화를 자초할 뿐이며 풀리지 않아 더 진가가 있는 '보이니치 필사본' 처럼 숨겨져 있던 역사의 뒷이야기들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멋지게 '보이니치 코드' 로 탄생한 이 소설은 수수께끼속 수수께끼를 접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편의 서프라이즈를 본 듯하기도 하고 간만의 지적 유희를 즐긴듯 하기도 한 소설은 흥미위주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더 습득한듯 하여 맛있게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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