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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현생을 살고 있는 난,전생은 무엇이었고 미래에는 어떤 생을 살아갈까? 삶과 죽음을 너머 그 다음 세계를 우린 환생이라 한다. 과연 '환생'이라는 세상은 있을까? 존재할까.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 생이라 할 수 있을까. 난 딱히 정해진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 밑바닥엔 불교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본다. 다른 어느 곳보다 다른 종교보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곳은 절이고 불교이다. 그렇다고 불교에 대하여 무척 깊게 빠져 든다거나 불자라고 할 수는 없는 그저 옆에서 구경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신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조금씩 섭렵하는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환생'에 대하여,자신의 전생을 보았다는 죽음 직전의 이브라힘을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기자인 케이가 그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자신을 다섯 살 때 버렸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두 이야기는 하나의 실로 꼬여 나간다. 이브라힘은 그를 보자마자 알아본다. 전생에서 케이가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병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환생 속에서 내가 나왔다.그렇게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다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과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 까지 이야기들이 전개되면서 신의 존재와 환생 그렇다면 현생의 나는 어떤 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답을 하듯 그는 자신의 생모이며 무당인 '어머니'의 생과 만나면서 풀어 나간다.
객관적 사실을 좇는 기자인 그가 전생의 이야기와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이브라힘이 말하는 전생과 환생의 이야기는 그가 죽음직전에 경험한 꿈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그가 본 전생일까.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 무당인 어머니의 존재와 무용을 하던 어머니가 신을 모시게 된 사연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가 병원복도에서 이브라힘을 알 칸디 병원에서 만나던 순간은 '내 안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을 때였지요.' 그가 이브라힘을 만나던 그 순간은 전생과 현생의 수많은 생명들이 이브라힘에게 접신한다고 할까 그런 순간이었다는 것이다.그러니 그가 전생에서 이브라힘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그들은 환생하여 현생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예수' 때문이었다. '젊은 목수였습니다. 초라한 여인의 아들이었고,남루한 유랑자였습니다.' 예수 또한 삶의 유랑자였던 것이다. 그가 전생을 삶을 마감하고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 존재로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라고 이브라힘은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나 삶의 유랑자였고 우리의 삶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연결되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이 끝일까? 라는 물음을 갖게 만든다. 죽음이 정말 끝일까? 자신을 버려야했던 생모는 왜 무당이 되었고 다시 죽음의 그 시간속으로 간 어머니는 그럼 생이 끝이 난 것일까? 한국전쟁으로 인한 과거 때문에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신을 받아 들여야 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버려야 했지만 기필코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이브라힘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전생과 환생을 오가던 그 시간 속에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 들이게 된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에는 '강희'라는 아픔을 간직한 신딸이 존재한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 가시고 굿을 하면서 어머니의 말을 그에게 전한다. 어머니도 아니고 그녀도 아닌 굿을 하는 순간의 말들,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뜻하지 않게 길닦이를 하자는 친정엄마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그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순간을 나 또한 생생이 느껴서일까,섬득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때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무녀,그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 순간 비로소 난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 아버지의 세상으로 돌아가셨다고 믿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환생이라고 해야할까.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리우어져요. 시간과 공간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쌍생아지요.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어요.길어야 백년이죠.조금씩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에 갇혀 있는 존재예요. 그 말은,공간에 갇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그러니까 죽음 이후에 이무것도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갇힌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염원이 생기는 거예요. 닫힌 곳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염원,누구를 위한 염원일까? 현생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한 염원일까 아님 현생을 떠나 환생의 길을 가고 있는 영혼을 위한 염원일까. '나의 기도는 당신을 용서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동시에 내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신안에 있는 상처를 씻기 위한 것일까.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지만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면 생의 끝으로 아는데 정말 전생과 현생 그리고 환생이라는 생의 중첩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죽음을 앞에 두면 수많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그것이 타인의 죽음이라고 해도. 흔히 죽음은 추억만 님긴다고 한다. 사람의 빈자리는 사람이 채우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무언가의 '줄'에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환생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염원'이라는 기도를 통하여 누군가 어떤 존재에게 무수히 빌고는 한다. 무엇을 위해 빌까. 은연중에 모든 생을 다 받아 들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내 앞에 갑자기 다가온다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받아 들이질 못한다. 케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그랬다. 하지만 전생을 보았다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수많은 죽음을 직면하게 되고 '씻김굿' 및 샤머니즘과 당면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보듬어 안게 되면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현생인 삶을 사랑하게 되는 유랑자가 된다. 삶이란 것도 생각해보면 힘들지만 죽음이란 뒤돌아보면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현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