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사람들 - 1866, 애절한 죽음의 기록
이수광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천주교 박해라는 것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그리고 내고향 윗마을에는 그 시대쯤에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산 사람들의 마을이기에 친구들의 부모님세대나 그 윗시대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설마' 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을까 했는데 '해미읍성'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갔다가 문화해설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해미읍성 바로 앞에는 커다란 돌이 뉘어져 있다. 그곳에 사람을 곡물을 타작하듯이 내려쳐서 죽였다는 것이다.그런가하면 산 사람들을 논 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들어가게 하고는 생매장을 했다는 둠벙이야기를 할 때는...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움찍하면서 우리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그 뿐일까 정말 말로 하지 못할 이름없는 민초들의 죽음이,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야소쟁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은 참혹한 죽음으로 스러져 가야했다.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중에서 제일 많이 알고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정약용 형제들' 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많은 이야기로 다루어 지기도 했지만 많이 알려지기도 하고 우리가 쉽게 그리고 제일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 그리고 정조, 역사라는 것이 아이러니해서 만약에 정약용과 정약전이 강진과 흑산도도 천주교 때문에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자산어보> 며 정약용의 그 많은 책들을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고 '실학'이란 것이 발전하게 되었을까? 한편으로는 그들이 천주교라는 것으로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큰 수확물을 남겼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굵직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지만 그런 큰 인물들의 이야기보다는 정말 너무도 참혹하고 무참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선의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퍼져나갔고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단다.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면 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어가지 않아도 되었을터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그 시대는 천주교를 용납할 수 없었다. 조상을 모시지 않고 '야소'를 믿었던 그들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서학을 한다는 이유로 순교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어쩌면 죽음이 그들 믿음을 더욱 굳고 단단하게 해 준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내가 천주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는 느낌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믿음이 없다고 해도 믿음의 이유로 그렇게 민초들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것이 정말 끔찍하다. 어떻게 지금은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사형을 하고 우리 백성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신부들까지 그랬다는 것이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한 단면이기에 지금이라도 외면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눈과 귀를 가지기 위하여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읽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 주변의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다고 천주교 성지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은 성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가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죽음에 난 무관한듯 야생화 구경을 하고 자연을 구경했는데 신자분들은 정말 그 마음이 다른 얼굴로 와서 성지를 오셨다.괜히 무안한 생각,하지만 비록 역사는 그들을 버렸다고,죽음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내쳤지만 후세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젠 그들의 애절한 죽음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시대과 도래했다는 것을.시대가 바뀌었음을 본다. 역사란 늘 '만약에..' 라는 문구를 앞에 두고 보게 된다. 만약에 그 시대에 천주교 박해를 하지 않고 흥선대원군이 받아 들였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읽는내내 정말 이유도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라는 믿음의 이름으로 너무 가혹하게 죽어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져보며 정말 슬프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866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미 2천 명의 교우가 박해자의 칼날에 쓰러졌다.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죽임의 괴로움을 당한 교우가 8천여 명이라 하는데 이중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교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의 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스러져갔을까. 강산을 물들인 피의 바람이 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던 1866,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들의 믿음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느끼며 언제 기회가 되면 천주교 성지를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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