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수업 - 나이에 지지 않고 진짜 인생을 사는 법
가와기타 요시노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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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년,내가 이런 나이가 아닐 때는 그 느낌만을도 멋진 나이라고 생각을 했다. 연륜이 묻어 나면서 무언가 인생의 맛을 아는 나이가 아닐까 했는데 막상 내가 그 나이에 놓이게 되니 그런 막연한 생각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헤쳐나갈까,노후는 아이들 문제는 하는 난제들이 내 앞에 가로막고 있음을 느끼며 무언가 나도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가져보면서도 생각처럼 그 준비라는 것이 잘 되지 않는,머리속의 이론과 현실은 다른다는 그 괴리감에 씁쓸하면서도 어쩌지도 못하는 나이가 바로 중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나이는 과연 숫자에 불과할까.

요즘은 정말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고, 나 또한 동안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제 나이로 보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면 좋겠지만 왠지 나이값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것 같기도 하고 좀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면 '내가 그렇게 막 살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요즘은 의술의 발달로 그리고 본인들의 노력으로 꾸준한 운동을 한다든가 취미생활을 하며 나이보다 젊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 들어가고 있으면서 나이가 드는 것을 거부하듯 젊음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노년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내 부모님이나 주위를 둘러봐도 노년층이 증가했지만 정말 내 밥그릇 챙기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나 또한 혼자되신 친정엄마를 좀더 도와 드리고 맘을 두고 싶지만 그것은 언제나 마음 뿐이다. 점점 성장해 나가고 거금이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을 챙기다보면 우리의 노후마져 저당잡히는 것은 아닌지 늘 남편과 대화를 하다보면 '우리의 노후는?' 하는 물음에 부딪히게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직장에서만큼은 확실하게 나이를 따져서 내 몰기에 그 후의 긴 인생을 계획하고 즐길 여유를 찾는 다는 것은 글쎄.

 

점점 경제력도 중요하지만 함께 사는 남편과 공통의 분모인 한 두가지의 같은 취미가 있어야 함을 늘 느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여행과 산행을 한동안 즐겼지만 그것도 어찌하다보니 자꾸만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그 다름을 극복하는 시간동안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이제서 완전히 다르다는 인정하게 된 두사람이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이야기거리가 없을 듯 하여 함께 하는 공동의 시간을 가끔 만들어 나가곤 한다. 영화를 함께 보러 간다든지 가까운 곳을 여행하며 서로에게 맞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한사람이 즐기면 함께 즐겨주는 에티켓정도를 발휘하다보니 그 시간들이 추억이 되어 이젠 공통의 취미를 아니 공동의 추억을 공유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편한 친구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저 호기심 충족이나 스트레스 발산으로 끝나는 취미는 생명력이 없다네. 더불어 진화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취미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열정과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정말 함께 할 수 있는 아니면 근사치의 비슷한 취미가 있다면 함께 하는 동안 참 좋을 듯 하다. 한사람이 여행을 좋아한다면 한사람은 사진찍기를 좋아한다거나 취미로 갖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취미한 어려서는 꼭 어느 빈칸에 적어내야 하는 그런 모종의 남과 다른 것과 같은 것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자신이 정말 열정을 다할 수 있는, 그 속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부부 공통 관심사라면 더 좋을 수 있음을 가끔 느낀다. 그리고 그 취미가 진화할 수 있다면 정말 삶의 의미가 더할 듯 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식을 키우고 난 후의 우리 노후에 대한 경제력도 걱정이 되긴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고 현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함께 하면서도 어느 정도 서로 떨어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서로에게 맞는 무언가를 즐여햐 한다. 그런 면에서 예전에는 누군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공부를 하였기에 반항심에 더 하지 않았을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이가 들어서 하려고 하면 자신이 원하거나 '강제' 적인 것에서 멀어져서일까 더 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니가 들면 공부의 순수한 목적이 다시 살아난다. 즐기기 위한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나온 시간에는 '즐기기' 가 아닌 강제적인 타의에 의해 모든 것을 행했다면 지금부터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즐기기' 의한 것이라 열정의 배가 된다. 예전에는 '책 읽어라,공부해라' 소리가 싫었다면 지금은 자발적으로 독서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난 독서에 취미를 가지다보니 애서가로 장서가로의 또 다른 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세상에 헛되거나 쓸모없는 것은 없다. 얼핏 쓸모없이 생각되는 시간을 어떻게 생가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억지로 달려가서 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현재를 나 나름대로 즐기고 싶다. 미래 또한 지금 순간을 즐기다보면 그렇게 맞이하는 것 아닐까 한다.

 

인생의 정답은 없다.

대부분의 우리 나이나 남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제2의 직업' 을 선택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그동안은 누군가에게 얽매인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CEO가 되어 멋지게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현실에서는 이론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 직접적으로 많이 경험하게 되어 노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현실에 너무 안주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싶지는 않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돈을 모으기보다는 '어떻게 잘 쓸 것인가' 로 발상을 전환하는게 현명하다. 후회 없이 즐긴 뒤 인생의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날,예금 잔고도 '제로'가 되도록 미련없이 써 버리면 된다.' 예금 잔고가 제로가 되게 쓰는 그런 인생은 살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나이는 모으는 것 보다는 정말 어떻게 써야,어디에 써야 잘 썼다는 말을 들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나 젊을 때는 무모한 곳에도 써 보았지만 이젠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하는 인생의 정답은 없으니 어디에 써도 필요한 곳에 썼다면 괜찮겠지만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잘못 뚫린 구멍이 있다. 그렇다고 그곳으로 흘러 간 돈을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다. 인생공부를 했다하고 훌훌 털어 버려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중년이라고 해서 노후가 바로 앞에 닥쳐 왔다고 하여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취지로 읽었다. 결코 여유로운 나이가 아니지만 여유가 없다면 일부러라도 여유를 만들어야 하는,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김질 하며 자신이 인생이기에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식이나 그외 것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바로 주인'인 진짜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다. 오래 묵은 포도주가 더욱 풍부하고 깊은 맛이 나듯이 오래 묵어서 자신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빈티지가 되어 나이에 얽매여 타이안에 꽉 붙들린 인생이 아닌 좀더 느슨하게 풀어헤친 여유로움 속에서 가진만큼의 풍족함을 느끼며 더 많이 가지기 보다는 가진것을 어떻게 쓸까를 생각하며 사는 베짱이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떤가 생각을 해 본다. 평생 일만 하다가 자신이 모아 놓은 것도 사용하지 못하고 가는 개미보다는 여유를 즐길줄도 아는 개짱이가 되어야 할 듯 하다. 전반전을 쉼없이 달려 왔다면 후반전의 나를 위해 이제 조금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며 인생의 재미를 느껴볼 때라고 생각하며 정확은 인생의 정답은 아니지만 흐린 하늘에 한줄기 햇살처럼 '삶의 처방전' 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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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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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옛날의 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언제쯤이 제일 좋을까? 모든 것이 활발하고 맘껏 누릭 싶은 샙대를 원하지 않을까. 생물학 전쟁으로 중간층인 부모세대들이 포자 감염에 의해 대부분 죽었기에 조부모세대인 70~80대인 엔더들과 그들의 손녀뻘인 십대들인 스타터들이 살고 있는 미국, 그곳에서 80세 이상에서 150,200여살인 노인들이 십대들의 몸을 빌려 다시 십대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아니 정말 몸을 랜트해 주고 몸을 담보로 빌려주는 '바디 뱅크'가 먼훗날에는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소설로 인간 존엄성은 바닥에 떨어져 내린,그야말로 인간의 욕심이 어디가 끝일지 모르는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음을 미리 경험하게 해주는 색다른 소설을 만났다.

 

과학수사대였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생물학 전쟁으로 인해 포자에 감염되어 돌아가시고는 7살 짜리 동생 타일러와 같은 곳에 살았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지도 몰랐던 마이클과 캘리는 함께 거리에서 생활하듯 한다. 늘 부족한 먹거리와 백신을 맞지 못해 나약한 동생을 돌보며 집과 먹을 것을 원하는 캘리는 돈이 다급하기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디 뱅크'를 찾아 간다. 랜트를 세번 해주면 집이 없이 떠도는 삶을 청산할 수 있는,동생에게 안전하게 집을 제공할 수 있고 더욱 건강한 환경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디뱅크를 찾지만 처음엔 몸을 빌려 준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녀였지만 안전하다고 생각된 곳에서 쫒겨나게 되고 마지막 부모님들의 유품마져 모두 빼앗기게 되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일주일 동안 랜트를 하는 동안 기증자는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있다면 랜터들은 십대의 몸을 빌어 자신들이 하지 못했던,아니 뇌는 늙었지만 몸은 십대이니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되겠는가. 거기엔 막대한 돈을 들인다해도 그들은 후회를 하지 않는다. 캘리는 처음엔 일주일 정도 걸리는 랜트에는 수긍을 했지만 한달여 걸린다는 말에 아연실색,그렇다면 그때까지 병약한 동생은 누가 보살필까? 마이클이 대신해 준다고 해도 그녀에겐 오직 동생뿐이다. 그런데 한달 랜트를 한 렌터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랜터가 아닌 그녀가 깨어나 활동을 하고 있다. 모두가 랜터인 헬레나로 알고 있지만 캘리 자신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자신도 헬레나도 아닌 삶 속에서 그는 랜터의 세계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수요자 헬레나는 그녀의 몸을 빌어 그럼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점점 알 수 없는 일로 빠져들게 되는 캘리,자신은 돈이 필요해서 바디뱅크에 들어갔지만 돈은 있으나 완벽한 모습으로 바꾸기 위하여,그들의 돈 많은 조부모들이 찬성하지 않아 바디뱅크에 들어갔다가 사라진 십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바디뱅크는 더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캘리는 어디까지 랜트의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저자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 이야기도 재밌고 이야기 전개도 괜찮다. 놀이처럼 랜트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돈이 급해 자신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몸을 빌려주게 된 사람들, 그리고 그런 바디 랜트가 또 다른 문제로 전져 나갈 수 있음을 빗대어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이야기 '스타터스'는 이런류의 이야기가 낯설수도 있는데 읽다보면 점점 빠져들게 되고 십대인 캘리 그녀가 어떻게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앞에 닥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인간의 소중함을,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 하면서 한편으로는 블레이크라는 소년과의 로맨스를 밑바탕에 깔아 둔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다시 시작해 보자는 블레이크,어찌보면 다음 권의 이야기가 나올법한데 이야기기 이어질까?

 

'엠마는 엄청 부유함 속에 살았지만 그 애들이 원하는 모든 걸 가졌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 애들은 육체적으로 완벽해지길 바랐다. 그래서 그 애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바디 뱅크에 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요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도 해석이 된다. 완벽한 몸을 원하는 세상,그런 세상에서 성형을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모른다. 무엇이든 잃고나면 본래의 것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부들은 모두가 부유하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중간세대인 부모들은 죽어서 없고 손주 손녀들만 남았지만 그들을 통제하는 길을 조부들은 모른다.아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부들은 돈이 있기에 십대의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다.그렇다면 십대만 드글드글한 세상,무슨 재미가 있을까? 랜터와 랜터가 아닌 십대들이 모여 탈선을 방불케 하는 생활을 하는 세상의 뒷골목에는 물도 없고 먹을것도 없어서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는 십대들도 있다. 삶의 희망이라고는 없다. 그런 그들을 노리는 악의 무리가 있다. 그들이 바로 '바디 뱅크' 나 마찬가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가 수용소에서 벗어나고자 바디 뱅크로 향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삶일까.

 

'젊고 강한 10대의 몸과 100년이 넘는 경험과 지혜를 함께 가진 엔더가 감으로써 이득이 발생할 곳이라면 어디든,무엇이든,,스파이 활동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더구나.하지만 그런 건 아마 단지 시작에 불과할 거야.' 좋은 방향으로 사용되면 좋게 생각할 수 있지만,미성년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취지도 포함되어 있지만 나쁜 방향으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정말 젊은 십대의 몸에 100여 살이 넘은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니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 시너지효고가 있을 듯 하지만 악의 결과가 더 먼저 사회를 장악해 나가는,자신을 숨길 수 있으니 사람들은 나쁜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을 먼저 한다.그렇다면 스타터인 십대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노년들은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는 두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에게 몸을 빌려 준 스타터들의 인생은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엔더들이 보낸 인생을 살 수가 없다. 그것이 짧은 기간의 랜트라면 괜찮겠지만 '평생'을 랜트한다면 스타터의 인생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을 원하는가. 인간은 인간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후회가 남은 삶이라도 한번의 길로 만족해야 한다. 몇 번 반복되는 삶을 산다면 누군가는 희생을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구조도 그렇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런 세상은 정말 오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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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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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사는 곳은 나에겐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가끔 가는 산인 서운산이 있는 곳이라 더 와 닿는다. 옆지기와 연애를 하던 시절,그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시골길을 달려갔다. 분위기가 좋은 카페가 있다고 하며.그렇게 달려 간 곳이 금광저수지고 그 근처에 있는 미술관겸 카페다. 그곳에 한번 가고 나서부터는 가는 길도 좋았고 그곳에서의 추억도 있고 해서 아이들이 어려서도 몇 번 갔던 곳이다. 산이 둘러서 있어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곳이 고향이 친구를 만나고 그렇게 하여 내겐 더없이 마음에 드는 곳으로 낙점,그렇게 하여 산행도 잘 하지 못하면서 서운산 산행도 가끔 가기도 하여 건강을 다지고 자연과 좀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만 가면 마음이 안정되고 왠지 모르게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좋다. 가끔 시간이 나면 옆지기에게 가자고 하여 그 주변을 가기도 하는데 산도 좋고 물도 좋고 볼거리도 많고 정말 좋은 곳이다.

 

삼십여년의 서울생활을 접는 다는 것은 큰 결심 아니고는 가시 힘들 듯 하다. 지금은 귀농이다 뭐다해서 일부러 자연을 찾아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십여년이 지난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마음을 단단히 잡았을 듯.거기에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니 우리집 같은 경우도 이삿짐이 많아서 이사를 할 때 남들의 배의 배도 넘는 이사비용을 내야했지만 짐을 옮기는 분들이 정말 고생을 했다. 뭔 짐이 이렇게 많냐고.하지만 지금이 더 많아졌는데 책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을 듯 하다. 하지만 책에게도 사람에게도 집을 장만하여 내려온다는 것은,자연과 하나가 되는 장소에 안주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시골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시골분들이 하는 말처럼 몸이 고달프다고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하는 생활이다. 모르면 배우고 물어보고 그렇게 이웃이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다보면 그 또한 자연인이 되어가리.

 

투두둑 빗방울 소리보다 큰 알밤 떨어지는 소리를 벗하고 산에 걸린 안개와 함께 하며 누리는 고달픔은 왜 그리 낭만으로 들리는지. 도시에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야생화며 나무들의 열매와 꽃과 그리고 느리게 가는 시간을 여유자적하는 생활이 고달프면서도 언젠가는 나도 누리고 싶은 로망의 시간이라 그런가 한 줄 한 줄 그저 알밤을 까먹듯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어 본다. 자연을 향유하며 고독을 향유하는 그 긴 시간들이 더디 가는 속에서 시 한 편 써서 들려줄 견공이 있고 텃밭을 지키는 노모가 있고 뒷산에는 밤나무 숲이 있어 하루가 심심하지 않을,산책하는 시간에는 함께 시골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난다.

 

도시의 생활은 어쩌면 네트워크의 시간이다. 무언가 연결되지 않으면 소외 된 듯 하고 늘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핸드폰마져 몇 시간 없으면 안절부절,그야말로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는 기분이겠지만 시골 생활이란 그런 모든 기계적인 것에서 멀어진다고 볼 수 있다. 기계로는 얻을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고 그러기에 그는 '권유'라고 하지 않았을까.시행착오를 거쳤지만 해보니 몸에 좋은 함께 누리고픈 시간들의 여유가 한 줄 한 줄 모두에 꼭 꼭 담겨 있어 나 또한 읽는 동안에는 그 오래된 추억속의 그 길을 떠올려 보며 그속으로 잠영해 본다. 하지만 우리네 몸은 언제부터 도시의 시계에 맞추어져 있는 것인지 늘 마음 속에만 여유로운 시골생활을 저장해 두고 막상 용기를 내어 꺼내어보질 못한다. 나 또한 그런 삶을 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꼭 물음표를 마지막에 써본다. 남이 누리는 생활은 여유롭지만 내가 누린다면 정말 여유가 될까? 그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시를 쓰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고 그동안 저 깊은 곳은 동굴속에 감추어 두었던 희망을 꺼내어 그곳에서 갈무리 하여 빛을 내볼 수 있을까?

 

'봄은 꽃들의 난장이다. 촛불 같은 꽃봉오리를 피워올린 목련이며,담장마다 무더기로 피어나 땅을 향해 둥글게 휘어지는 노란 개나리꽃 덤불, 진달래꽃 따위가 한꺼번에 만개한다. 온갖 봄꽃들이 시끌벅적대는데,무청에 파란 싹이 돋아나는 동안 골목엔 사각사각 연필 깎는 고요가 소리 없이 익어간다.'

 

'저수지 주변에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은 오래된 침묵을 가사처럼 두르고 있다. 수행이 깊은 노스님 같다. 해가 뜨기 전까지 나무들은 침묵을 감싸안고 있는 안개 가사를 두르고 물을 굽어볼 것이다. '걷는 자'는 아직 미숙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걷기의 쾌락에 빠져 천천히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 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근처에 가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하지만 기억속의 미루나무하며 초록빛 물이며 한겨울 따듯한 유자차를 마시고 있던 카페에서 내다 본 창 밖 풍경,갑자기 소리도 없이 함박눈이 내려 온세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던 그 시간들은 고스란히 저장되어 어제일 처럼 기억이 난다. 물빛도 나무도 모두 초록빛이었는데 따듯한 유자차를 한 잔 마시는 사이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소복소복 쌓인 눈 속을 조용히 조용히 빠져 나오던 그 시간, 그 시간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글들이다.커다란 창으로 자연이 내다 보이는 곳에서 새벽에 조용히 홀로 깨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분은 어떠할까? 고독을 벗하여 오롯이 그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시골생활의 맛은 어떤 것일까? 그가 내디딘 모두의 걸음은 알 수 없어도 어느 한 걸음은 그 맛을 알것도 같은 기분,청룡이 머문다는 그곳으로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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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파비오 제다 지음, 이현경 옮김 / 마시멜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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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우린 그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아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하여 처절한 고통과 질곡의 인생과 싸워야 한다면. 아마도 부모밑에서 늘 부족함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이런 인생여정을 잘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이야기가 그냥 소설속에만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한 소년이 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7년간의 여행 끝에 아프카니스탄에서 파키스탄의 퀘타를 거쳐 이란으로 터키로 그리고 긴 여정 끝에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그리고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이제 겨우 숨을 돌리고 살만한,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찾고 가족을 찾을 수 있게 된 이야기다.

 

에나이아트, 그는 자신의 나이를 확실하게 모른다. 대충 기억하기로 짐작하는 나이지만 엄마를 그를 살리기 위하여 그를 혼자 떼어놓고 떠났다.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다 진 빚을 식구들이 값지 못하자 그들 가족의 목숨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아프카니스탄에서 더이상 애나이아트가 행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을 쫒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읽었듯이 그곳의 현실에 눈에 그려지기도 하고 그가 만약 그곳에 남아 있었다면 <집으로 가는 길>에서 소년들이 소년병이 되어 '죽음' 이라는 것을 하찮게 여기거나 남을 죽임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그런 길로 접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기에 엄마의 마지막 당부를 남기며 그의 곁을 떠난다. '마약을 하지 말아라. 무기를 사용하지 말아라.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역경을 헤쳐 나가라. 남을 속이지 말아라.' 엄마는 아들의 앞날을 예견할수도 없었지만 모두의 운명 또한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 어려움속에서 아들만은 빼어내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난 한번도 두려워 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엄마아 마지막 밤을 보낸 다음 날,그의 앞에는 막막함만이 밀려 왔다. 낯선 곳에 혼자 남겨 진다는 것, 정말 생각해보면 무얼할 수 있을까,그것도 열 살 정도의 아이가.하지만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 엄마의 당부를 생각하며 늘 현실에 최선을 하다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늘 그의 곁에는 '악어'가 있다. 현 상황이 바닥이라고 해도 늘 자신이 나아갈 문을 열어 놓고 있던 소년은 좀더 목숨이 안전한 곳을 찾아 집에서 멀어져 갔다. 친구들과 같이 움직이기도 하고 혼자 움직이기도 하고 최악의 순간에 당면해서도 늘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소년,고향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학교에서의 그 정겨움을 잊지 않고 학교 근처를 배회하기도 하는가 하면 엄마의 언어가 아닌 자신이 있는 곳의 언어를 배워야 살 수 있음을 깨우치고 누구보다 열심이었던,어린 나이였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숱한 고비를 넘어가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숨을 쉬고자 하는 것'

 

터키로 향하는 고된 삼십여일의 산행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어쩌면 도착점을 알지 못했기에 더 살아 남을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삼사일정도 산행을 하면 터키에 가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산행이 삼십여일에 달하면서 신발도 다 떨어져 죽은 이의 신발을 슬쩍하여 신어가면서도 감사를 느끼고 터키에서 그리스로 향하는 고무보트 안에서 망망대해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모함 덕에 그들은 그리스 해안에 가 닿아 비록 죽을 고비를 넘기며 팬티 한 장의 차림으로 생사고락을 넘어 들었지만 끝내 맘씨 좋은 할머니를 만나 이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이겨내듯 그에게 '희망' 이라는 인생의 문이 열리게 된다. 세상에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악어' 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수호천사들도 많은 것이다.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는지 알았더라면 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어쩌면 떠났을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것을 알았다면 난 분명히 다른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안다면 그 길로 가고 싶을까.자신 앞에 놓인 길이 어떠한지 모르기에 가지 않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생존을 위한 필사의 선택의 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 소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꽉 움켜쥐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악조건의 현실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고향에 엄마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투지가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소년과 저자가 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글은 전개되지만 인터뷰어는 어느 순간 인터뷰이 자신이 되어 글을 이끌어 나간다. 에나이아트가 지나 간 고된 행로속에는 미성년인 소년들의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지도 나와 있고 국경지역에서의 비리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소년이 이탈리아에서 희망르 찾았다는 것,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비록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소년도 살아 남고 고향의 가족 또한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소년의 7년간의 생사를 건 여행을 읽노라니 나의 지금이 너무도 행복이라는 생각에 왠지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진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하는 나 그리고 우리,그런 현실을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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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슐 마녀의 수리수리 약국 - 제1회 비룡소 문학상 수상작 난 책읽기가 좋아
김소민 지음, 소윤경 그림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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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바뀔 수 있다면 그대는 누구와 바뀌길 원하시나요?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누구와 한번 하루라도 바꾸어 볼까? 여기 동동이의 말 못할 고민이 있다. 내일이면 태권도 대련이 있는 날인데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인 묘묘와 대련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묘묘는 동동이와 달리 몸집도 크고 '검은 띠' 라는 것. 당연히 겁이 날 수 밖에. 동동이는 묘묘보다 몸집도 작고 겁도 많고 암튼 내일로 다가 온 태권도 대련이 걱정인데 아빠의 '동동묘묘약국'으로 향했는데 분명 그곳은 아빠의 약국이고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일년 전에도 동동묘묘약국이었건만 지금은 '캡슐 마녀의 수리수리 약국'으로 변해 있는 것. 당연히 약사는 아빠가 아니라 '캡슐마녀'인 처음 보는 할머니가 있는 것, 그런데 할머니는 누구세요?


할머니가 아니라 '캡슐 마녀'란다. 약사도 아니고 마녀라고. 마녀계에서는 유명할지 모르지만 처음 보는 마녀이고 약국에는 분명히 아빠가 두셨던 비타민이나 그외 약들이 아니라 온통 빨갛고 파랗고 다양한 색깔의 '캡슐'약들이 놓여 있다. 어라 정말 이곳이 어제도 아빠 약국이었던 곳이 맞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런데 이 캡슐 마녀는 동동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가지 제안을 해 온다. 동동이의 소원을 들어 줄 캡슐 약을 주는 대신 캡슐 마녀는 '게임 아이디' 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게임에 푹 빠져 보고 싶다는 캡슐 마녀. 그렇게 쉬운 제안이라며 당연히 오케이지. 그런데 정말 캡슐 마녀의 '영혼 바꾸기' 약은 약효가 확실한 것일까.




영혼 바꾸기가 며칠이 될지 아니면 몇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동동이에겐 급했던 것,얼른 자신부터 캡슐 약을 하나 삼키고 묘묘를 생각해서 땅콩크림 빵 속에 나머지 하나의 캡슐을 숨겨서 식탁위에 놓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렸건만 온다 그리고 먹었다. 정말 이젠 영혼이 바뀌는 일만 남았을까? 아뿔싸,그런데 이거 빵을 먹은 사람이 묘묘가 아닌 '아빠다.....아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거야.아빠는 나보다도 더 겁쟁이다. 바퀴벌레 한마리도 죽이지 못하는데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고,대련은 커녕 둘의 영혼이 바뀌었으니 어쩐다. 아빠는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데 다름이 아닌 데이트,엄마가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홀로 있던 아빠를 보리밥집 아줌마가 다리를 놔주어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몸은 아빠지만 영혼은 어린 개구장이 동동이니 이를 어쩐다.


생각했던 것처럼 묘묘와 영혼이 바뀌었다면 태권도 대련에서 쉽게 묘묘를 눕히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이야기로 끝났을 터인데 캡슐 약을 묘묘가 아닌 아빠가 삼키면서 이야기는 정말 재밌어진다. 그런 반면에 캡슐 마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정말 그곳이 아빠 약국이 아닌 캡슐 마녀의 수리수리 약국이 된 것일까? 어린 아들은 아빠가 되어 미리 어른을 경험해 보고 아빠는 아들이 되어 어린이 세계를 경험하게 되지만 아빠보다는 어린 '동동'이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니 아이들이 읽으면서도 '킬킬' 웃음을 참지 못할 듯 하다.그런가 하면 자신의 잘못으로 아빠가 여자와의 만남에서 잘못될 듯 하자 정말 어른스럽게 편지를 써서 '구애'를 하듯 보내어 아빠와 여자분이 잘되어 '엄마'를 갖게 되지만 또한번 동동이는 캡슐 마녀의 약을 먹고는 그 약을 상대편인 묘묘에게 먹이려 하지만 묘묘는 이번에도 그 빵을 엄마에게 나누어 주어 새엄마와 영혼이 바뀌게 된다.이렇다면 다음편이 나와도 재밌을 듯 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책이지만 정말 재밌다. 제1회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아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품게 하면서 그것이 결코 헛되거나 망상이 아닌 '성장'이란 한 뻠 더 어른스럽게 다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부담감없이 즐기면서 어른의 세계도 이해하게 될 것 같다. 정말 가끔은 어른의 입장으로 엄마의 입장으로 딸과 한번 바뀌어 보고 싶은 생각도 한다. 어쩜 엄마맘은 이해를 못해주고 자신의 고집만 부리는지,엄마는 그런 시간을 거치지 않고 그냥 뻥튀기에 들어가 어른으로 된 것처럼 말하는 녀석들을 보면 둘의 영혼이 바뀌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가교'를 찾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맘을 정말 이해하기 쉽게 풀어 놓은 듯 하다.그러면서도 동심은 고스란히 담아주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약국이 있다면 정말 '대박'이 날 듯 하다는.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 사람과 영혼을 하루쯤 바꾸고 싶어할까?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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