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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ㅣ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내 생각을 말해볼까?”
“네, 말씀해주세요.”
“기분 나빠하는 거 아니지?”
“그럼요.”
“솔직히 나는 리나가 맘에 들지 않아. 네가 훨씬 나아. 네가 더 예쁘고 똑똑해. 사라토레 가족과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더구나.” (400쪽)
눈부신 친구 릴라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릴라는 부모에게 반항하며, 오빠를 설득하고, 선생님의 질문에 당돌하게 대답하고, 돌을 던지는 남자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알아 보고는 자신에게서 피어나는 여성적 매력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줄 안다. 아름답고 당당한 릴라 옆의 레누는 항상 위축되어 있다. 어려운 중학교 과정, 몇 개의 과목에서 9점을 맞았다고 자랑하는 레누에게 “10점이 아니고?”라고 묻는 릴라는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중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난 거뜬히 10점을 맞았을 거야. 여드름 박사에, 점점 뚱뚱해지고 있는 레누에 비해, 키가 더 커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릴라. 레누는 항상 릴라 옆에, 릴라 뒤에 서 있을 뿐이다.
레누는 끝없이 릴라와 자신을 비교하고, 릴라가 가진 힘과 매력에 감탄한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 성실함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릴라가 부러울 뿐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이 말, 네가 훨씬 나아. 네가 더 예쁘고 똑똑해,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는 릴라가 가진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뛰어난 학습 능력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나와 그녀를 동시에 아는 누군가가, 네가 훨씬 나아, 네가 더 예쁘고 똑똑해,라고 말해준다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둘 중에 하나만 있어야 한다. 예쁘거나 똑똑하거나. 예쁘면서 똑똑하거나 똑똑하면서 예쁘다는 건, 반칙에 가깝다. 설령 그게 사실이더라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그렇게 똑같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객관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내 생각에는, 네가 훨씬 나아, 네가 더 예쁘고 똑똑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네가 훨씬 나아, 네가 더 예쁘고 똑똑해.
릴라는 자리에 앉지 않고 내내 서 있었다. 앉는 자세가 고통스러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릴라의 어머니마저도 딸의 오른쪽 눈이 시꺼멓게 멍들어 부어 있고 아랫입술이 찢어지고 팔에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중략) …… 여인들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내들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다음에 어떤 식으로 주변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언젠가 릴라도 뜨거운 맛을 한번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가 얻어맞은 사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테파노에 대한 호감도와 존경심이 높아졌다. 스테파노야말로 사내구실을 할 줄 아는 남자인 것이다. (57쪽)
이 문단을 조금 더 건조하게 표현한 것이『혁명의 영점』의 이 문장이다.
구타, 다시 말해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학대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 역시 동등하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통적으로 가정폭력은 가정주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암암리에 정당화되어 법원과 경찰이 묵인해 왔다. (95쪽)
열정적인 구애와 사랑에 대한 확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환하게 빛나던 릴라의 얼굴이 엉망이 되어 나타났을 때, 친척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릴라, 온 동네를 주름잡는 릴라마저 이제 가정주부가 되었으니, 가정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했다는 뜻이다. 릴라의 집을 방문했던 그 어느 누구도, 릴라의 오른쪽 눈이 시꺼멓게 멍들어 부어 있고 아랫입술이 찢어지고 팔에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했다.
모두 다 모른 척 했다. 보고서도 모른 척 했다.
못 본 척, 보고서도 못 본 척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