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대해 읽고 생각하면서 답답할 때는 가부장제의 일면인 페미사이드와 여성 혐오가 ‘남성 혐오’와 대칭으로 이해될 때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너희’도’ 잘못이야,라는 주장. 지금은 오히려 여성 상위 시대인데 왜 아직도 페미니즘을 말하느냐는 주장. 그게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주장. 그런 주장 앞에 이런 통계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눈을 감았기에. 보이지 않으므로.
한국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말만큼 유언비언인 것도 없다. 여성 노동의 증가를 지위 향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gender wage gap)을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 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였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퍼센트 덜 받는다(2위 에스토니아는 26.6퍼센트). 2015년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낯선 시선』, 257쪽)
“여성부는 있는데 왜 ‘남성부’는 없는가?”, “여성 전용 주차장은 남성을 차별하는 제도 아닌가?”, “매 맞는 남편도 있다”, “평등을 원하려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한국 여성들이 이미 ‘여성 상위 시대’에 살고 있으며, 여성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역차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그렇다. 남녀 공박의 종착역은 거의 ‘여성 군입대’이고, 가끔 ‘치즈케이크’인 경우도 있다.
어제는 『혐오사회』의 서론을 읽었다. 카롤린 엠케. 나는 어제 그 이름을 처음 들었고, 처음 보았고, 처음 읽었는데, 책을 읽다가 세상에! 이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쳤다. 탁.
유대인이든 동성애자든 여성이든 이제는 좀 순순히 만족할 때가 되었으며, 어쨌든 이미 그들에게 많은 것이 허용되지 않았느냐는, 신중한 척하지만 분명한 비난도 있다. 마치 평등에 상한선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지금까지는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편히 평등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라는 듯이. ‘완전한 평등이라고? 그건 너무 지나친 요구지! 그러면 그건 정말로 …… 평등한 게 되잖아.’ (20쪽)
동성애자, 여성, 무슬림 등 소수자 또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 ‘혐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구체화되고 강화되는 것에 관심이 생긴다.
일단 이 책으로 시작한다.
오늘, 아니, 어제의 발견.
카롤린 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