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인간과 그 밖의 생명체를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이다.(19쪽) 공포는 죽음의 숨결이 가까울 때 느끼는 당연하고도 대체로
순응적인 반응(21쪽)으로,
인간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문화적 세계관’이다. 즉, 인생이 아주 특별하고 중요하며 영원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세계관에 의해 정부, 교육, 종교 기관, 의례 등이 인간 사회에서 중요성을 획득한다. 다른 하나는, 자존감이다. 자기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감정은 심리적
수준 뿐만 아니라 생리적 수준에서도 공포를 완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자존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다음을 추천한다.
우선, 개인이
다양한 자기 개념을 갖도록 장려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사람이 미국인이면서 기독교인, 변호사, 공화당 지지자, 아버지, 골퍼, 인디애나 주민 후원자, 자원 봉사 소방대원이기도 한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은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부합하며, 각각의 정체성에는
나름의 고유 기준이 존재한다. … 우리 중 누군가는 같은 직급의 다른 직원에 비해 영업실적은 낮고 골프
실력도 형편 없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이자 신실한 교회 신자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 (101쪽)
‘문화적 세계관’의 토대인 의례, 예술, 신화, 종교는 대략 순차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133쪽) 언어의 진화를 통해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한다. 또한, 뜻있는 집단에 속하고자
애쓰고 창조적인 예술작품 혹은 과학적 업적, 자기 이름을 딴 건물이나 사람,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과 유전자, 혹은 타인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데(24쪽), 이는 모두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문화적 관습의 영향이다.
이처럼 죽음을 초월하는 문화적 관습 덕분에
우리는 자기가 이 세계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런 문화적 관습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따라오는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실제 불멸성 literal immortality 과 상징적 불멸성 symbolic immortality 을 믿는다. (24쪽)
실제 불멸성이란 사람이 결코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거나 자아의
어떤 핵심적인 부분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다고 믿는 것이며(139쪽),
상징적 불멸성은 자신이 숨을 거둔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어떤 영원한 존재의 일부로 남을 것이며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적 자취 혹은 유물을
영구히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140쪽) 즉, 사후세계에 대한 논의, 연금술, 냉동
보존을 통해 인간은 ‘죽지 않는 나’의 영속을 추구하고, 아이를 낳고 명성을 쌓으며 부의 축적을 통해 내 이름과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특히, 영혼은 실제
불멸성을 거론할 때, 공통으로 등장하는 개념인데, 영혼의
개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단순히 육체적 존재 이상으로 인식하고, 죽음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145쪽)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실제적으로 ‘죽음’을 피해 불멸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는데, 알코어 생명연장 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가
그 중 하나의 예다. 높이 275센티미터 용기 여러 개가
롤러 위에 마치 스테인리스 스틸 보초병처럼 늘어서 있는데, 내용물을 섭씨 영하 196도로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액체 질소를 붓는다고 한다. 죽음 직후, 시체를
얼음물에 넣고 심폐소생기를 부착하며 혈압을 유지하고 뇌를 보호하기 위해 정맥 주사를 놓는다. 시체를
냉각하고, 시체를 머리가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용기에 넣고 수십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냉각 상태를 유지한다. 분자 나노기술로 시체 소생이 가능해질때까지. 비용은? 한 사람 당 20만 달러이다.
(157쪽) 다른 방법도 있다. 백업으로 자아
의식을 포함해 인간 뇌에서 생성되는 모든 정보를 컴퓨터로 옮겨놓는 ‘비침습성 고정 업로딩’ 방법이 있고, 혹은 인간의 모든 정보를 내구성이 훨씬 더 뛰어난
로봇에게 옮기는 방식도 있다.
상징적 불멸성의 하나의 예는 세대를 통해 전해지는 예술작품이다. 이미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키츠가 지은 ‘잠과
시 Sleep and Poetry’라는 시의 일부다.
내가 정말로 쓰러진다면, 적어도 나는 누우리
백양나무 그늘의 침묵 아래
그리고 내 위로 난 품을 말끔히 깎으리
그리고 그곳에 상냥한 비문을 새기리 (165쪽)
그는 죽었지만, 그의
시는 살아남았다. 사후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시는 살아서 전해지고, 독자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세월을 뛰어넘는 상징적 불멸성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좀 더 단순하고
미묘하고 심지어 위장된 방식을 이용하는데, 저자들은 가족제도를 통한 후손 남기기, 명성 쌓기, 돈과 물질의 추구, 영웅
민족주의와 카리스마 지도자에 대한 추종 등을 그 예로 제시한다.
<11단원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에서, 저자들은 죽음을 대면한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 그 자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은 상태로서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므로, 무감각한
상태와 똑같은 죽음의 상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마사 누스바움, 타일러 볼크, 스티븐 케이브는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루크레티우스는 미래 세대가 성장하도록 우리는 ‘죽어야만
하며’, 미래 세대 역시 주어진 삶을 살고 나면 당신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생자필멸의 현실을
더 잘 알고 수용해야 하며, 죽음을 초월한다는 감각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강화하라는 것이다. (336쪽)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과 타협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불안의 학교에 등록하는 것을 추천했는데, 억제되지 않은 죽음의 공포가 개인 정체성과 모든 신념이 일시적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한 후, ‘신앙의 도약’을
경험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최후에 대한 마지막 생각’은 '타협하라'. 죽음과 타협하라, 이다.
죽음과 타협하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무섭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 연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의미와 가치, 사회적 관계, 영성, 개인적 성취, 자연과
동일시, 순간적인 초월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잘 조합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찾으라. 이런 방도를 제공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장려하고 불확실성 및 자기와 다른 신념을 품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 (345쪽)
인간은 별의 먼지, 인간은
별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난 좋아한다. 아주 먼 옛날,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 별이 탄생했을 때, 그 때 내 존재의 일부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좋고, 저 멀리 예쁘게 반짝이는 별의 일부가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좋다.
죽음과 타협하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주장을 인식하는 '내'가 실제적, 개인적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지는 존재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없는 우주에서 ‘영원히 지속될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의 추구가 무슨 의의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진 신념, 이를테면 죽음 후의 심판, 영원히 계속될 사후세계, 영혼 불멸 등의 주장보다 인간과 우주의
‘무목적성’이 내게는 더욱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본질은, 죽음 이후에 확인될 수 있단 말인가.
죽음 그 자체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이 인간 존재 핵심에 존재하는 고뇌이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불멸 추구의 길로 이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