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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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퇴장』을 다시 읽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마흔 살 연하의 여자에게 굴복한 유명작가에게 매료된 게 사실이다.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옆, 새나 들짐승이나 드나드는 곳. 뉴욕에서 128마일, 가장 가까운 이웃도 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십일 년 동안 살았던 사람(45). 영화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휴대전화, VCR이나 DVD 플레이어, 컴퓨터도 가지지 않는 사람. 하루 종일 글을 쓰고,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사람(13). 내가 반한 사람이 이 사람이다. 사회로부터의 존경과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명예를 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기를 고집하는 남자. 내가 반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그가 제이미에게 빠진다. 상류층 가문 출신의 텍사스 사람이 쓰는 억양에 자신이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신중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나는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평화로운 순간이라곤 없었다. 어쩌면 내 평생 처음으로 젊은 여성의 여성스러움을 응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애 마지막으로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나는 차마 그녀를 만져볼 생각도 못하고 떠났다. 그녀가 증언조서라도 받는 것 같다고 묘사한 그 대화 내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보다 훨씬 가까이 그녀가 앉아 있었는데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만져볼 생각조차 못했다. ...  나는 실성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일흔한 살에 배우고 있었다. 아직도 자아 발견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164)  

 

젊음을 제외한 모든 걸 가진 남자. 명성과 지혜,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오히려 그녀를 숭배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을 일으킬 수 없기에 슬퍼한다. 완벽하게 절망한다. 그녀를 대하는 그의 방식. 그녀와 단둘이 방 안에 있고 싶다며 그녀를 찾아오고, 자넨 날 수집했네,라고 말하는... 그녀의 애인을 질투한다 말하고, 욕망에 이끌려 키스하지 않겠다 말하는. 질문하고 듣고 또 말하는

 

이번에 읽을 때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문단은 다르다

 

매니(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누이 엘리자베스와 관련된 교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학계의 추측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에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상징할 ― 당신 말처럼 그를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모하게 만든 그 놀랍고 낯선 감정들을 모두 면밀하게 검토해볼 ― 이야기를 찾던 중에 호손과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누나에 관한 그런 추측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거예요. ... 그에게 소설이란 무언가를 묘사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하는 것이었죠. 그는 생각한 거예요.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요.“ 이야기하는 동안 실은, 나 또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현실을 내 것으로, 에이미의 것으로, 클러먼의 것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이후 한 시간 동안 나는 눈부신 수사를 동원해 내 주장의 타당성을 설파했고 결국 스스로도 그것을 믿기에 이르렀다. (264)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든다. 소설가가 만든 세계 속에서 소설가는 산다. 살고 생각하고 경험한다.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한다. 소설의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믿고 그 속에서 산다.

 

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아름다운 누나에 대한 추측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에이미에게 말한다. 로노프의 연인 에이미는 그가 말한 현실,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로노프의 전기를 쓰려하는 클러먼은 그녀가 말한 현실, 근친상간의 현실을 사실로 해석한다. , 로노프의 추종자이며, 한때 그의 연인 에이미를 사모했던 나는, 그 현실이 로노프가 만든 것이라 주장한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는 에이미의 현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고 싶어하는 클러먼의 현실을 자신의 생각대로 재구성한다. 근친상간은 로노프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로노프가 만든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고, 자신도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상상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일까.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추측일까.

 

분명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장갑을 식탁에서 발견하거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열쇠를 원래 놓았던 자리에서 찾는 일처럼, 분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오해고 착각이다. 이 소설, 필립 로스가 그려놓은 이 세계 속에서, 필립 로스는 말한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

 

맙소사, 그가 말한 대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현실은 그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가 만든 현실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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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쇠
    from 마지막 키스 2017-02-22 08:42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아니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한가... 기억이란 뜬금없고 연상이란 것도 역시 뜬금없는 것. 나는 위에 먼댓글로 연결한 단발머리님의 리뷰를 오늘 아침에 읽었다. '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에 관한 리뷰였고, 나 역시 그 책을 읽었으며 일전에 단발머리님의 글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터 내가 생각한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단발머리님의 리뷰 중에 잠깐 '열쇠'란 단어가 ...
 
 
다락방 2017-02-22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이 리뷰를 읽고 저는 엉뚱하게도 쉼보르스카의 시 한 편이 생각났어요. 리뷰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나 ‘열쇠‘라는 단어 때문에요. 아아, 저를 용서하세요.


열쇠
-쉼보르스카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 -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너를 향한 내 애타는 감정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이미 너와 나,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니.
누군가의 낯선 손에 들어 올려져서는
아무런 대문도 열지 못한 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쇠‘의 형태를 지닌 유형물로 존재하게 될
내 잃어버린 열쇠처럼.
고철 덩어리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녹(綠)들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카드나 별자리, 공작새의 깃털 따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점괘는 종종 나온다.

단발머리 2017-02-22 08:33   좋아요 1 | URL
전혀, 전혀 엉뚱하지 않아요. ㅎㅎㅎ
쉼보르스카,.... 아, 예전에 제가 남자로 알았던 그 시인.
<충분하다>의 그 쉼보르스카의 시를 댓글로 달아주셔서
제 서재의 품격이한껏~ 올라갔네요.^^

잃어버렸다 혹은 잊어버렸다는 점에서 이 리뷰와 딱 맞아떨어지는 시예요.
<유령퇴장>에서는 주커먼이 에이미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에이미가 오지 않았잖아요.
전화번호를 메모해둔 종이를 찾지못해 그녀에게 연락도 못하고, 호텔에 돌아와 방안을 샅샅이 뒤진후에야,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지갑에서 발견했죠.

˝나는 피에를루이지에 그걸 가져가는 걸 잊은 게 아니라
가져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