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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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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욕망과 만나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은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108쪽)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 서울이 고향인 나에게 한반도 저 끝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리, 냄새, 정취, 풍경은 오히려 이국적이다. 그럼에도 그 토속적이고, 질펀하며, 끈끈한 그 무언가는 계속 내 마음을 끈다. 더 많이 듣고 싶다. 더 많이 읽고 싶다. 하나의 완벽한 우주, 하나의 완전한 세계, 한창훈이 만드는 우주, 한창훈이 만드는 세계를 말이다.

돌아올 준비를 하는 잠깐 동안 서둘러 낚시를 던진다.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가 물어댄다. 노래미, 용치놀래기 따위다. 뭐라도 좋다. 운좋으면 감성돔과 문어도 문다. 아주 커다란 동갈치를 낚은 적도 있다.

오후 새참으로 충분하다. 잡은 생선 회 뜨고 대가리와 껍질에 점심때 남은 김치를 넣고 소금 간하여 앉은뱅이 냄비 하나 대충 끓여놓으면 훌륭한 안주가 된다. 되들이 소주병이 빛을 발하는 것도 그 때이다. (32쪽)

 

근래에 젊은 작가들의 발랄한 문체와 최첨단 소재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이들이 나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존재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나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가들이 살고 있음을 느낀다.

이 책에서는 예전에 상상했던 시인, 소설가, 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테면, 시인은 가난해야 한다거나, 소설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거나, 작가는 깊은 동굴 속에서 격력한 기침을 참아가며 인고의 순간들을 창작의 재료로 삼는다는 생각들이 꼭 상상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환상적인 모습’으로 상상했던 작가의 ‘원형적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생소하면서도 놀랍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형, 유용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사고 많았다. 오해 때문에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뜯어말리고 달래서 들쳐업고 들어온 날도 많았다. 풀어낼 방법이 없는 슬픔. 제멋대로 돌아가는 상황. 파멸되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게 수시로 얼굴을 디밀었다. 피는 더 데워지고 주먹 불끈거려졌다. 껍질은 삭풍에 벗겨지는데 용광로 같은 마음속 불길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겨울 이불도 안 덮고 밤을 새우곤 했다. (185쪽)

 

마음에 불꽃을 품고 사는 일이 어디 쉬울까.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삶을 산다는 건 또 어떨까. 시시때때 안현미, 곤두박질 안현미, 그리하여 한번 더 안현미를 외치는(260쪽) 작가님이 말한다.

그럼 됐지 뭘 더 바라겠는가. 그러니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시인의 성공은 세상의 실패를 증명하는 척도이다. 좋은 세상에는 아픈 시인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걱정 없는 것은, 계약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근사한 자세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262쪽)

 

이제는 그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수필의 말이 아닌, 소설의 언어로, 한창훈을 읽고 싶다. 읽어내고 싶다.

그가 들려주는 바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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