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인의 멕시코 이민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첫 장부터 놀랍고 신기한 세계다. 구한말, 더 이상 나빠질 것조차 없는 피폐한 삶을 살던 민생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다. 나라는 망하기 직전이고, 흉흉한 소문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으려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제물포로 모인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중인 신부, 옹니박이 박수무당, 노루피 냄새의 소녀, 가난한 황족과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 그리고 고아 소년 이정이 배에 오른다.(11쪽) 이들이 향하는 곳은 저 멀리 바다 저 편에 있다는 나라, 멕시코이다.

‘하와이 이민’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멕시코 이민’은 처음이다. 구글을 검색해보니 이런 설명이 나온다.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스페인어: Inmigración coreana en México, 영어: Korean immigration to Mexico)은 1905년 시작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이민 노동자는 멕시코 시 유카탄 주에 정착했다. 2011년 기준으로 총 한국인 이민자는 11,800명으로 집계되었다.[1] 언어는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쓰며[2] 종교는 주로 기독교와 대승불교로 분포되어 있다.[3]

 

승객용이 아닌 화물용 선박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들. 열심히 일을 한 뒤 돈을 벌어 고국으로 당당히 돌아가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이역만리 멕시코 땅을 밟은 사람들은 불속에 서 태워지는 자신들의 옷가지와 짐을 보고서도 감히 짐작하지 못 했다. 가축을 선별하듯 건강한 노동자를 가려내는 농장주들을 만나고 나서, 말 위에서 내리치는 채찍에 맞은 이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자보다도 못한 ‘노예’로 그 곳에 팔려왔음을 깨닫게 된다. 기한은 4년, 그들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작성된 계약서에는 그들의 계약기간이 ‘4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에네켄 대농장 소유주에게 묶여있는 ‘노예’, 7등급 노예가 되고 말았다.

 

 

 

 

푸르른 황금밭에서 떼돈을 벌 수 있는 지상낙원, 어느 누가 가더라도 큰 돈을 벌어 4년 후에는 고향에 돌아올 수 있다,는 ‘대륙식민회사’의 광고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말만 믿고 배에 올랐던 조선 사람 1032명은 그 곳에서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된다. 메리다에 거주했던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를 통해 그들이 겪었던 비극을 엿볼 수 있다.

“누더기 옷과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멕시코인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눈물 없이 이들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떼를 지어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는데, 부인네들은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동물 이하의 생활 같았다. 여기 멕시코에서는 토착 원주민을 세계 제5위 또는 제6위 노예에 속한다고 부르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은 제7등 노예로 불려졌었다. 이들이 작업 목표량을 다 달성치 못했을 때는 무릎을 꿇게 하여 피가 날 때까지 못살게 굴었다.”

(멕시코 초기 한인이민 역사, 서성철, www.nfm.go.kr/_Upload/BALGANBOOK/393/02.pdf)

 

노예 같은 삶을 이어가던 한국인들은 4년 강제계약이 끝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머나먼 고국으로 돌아갈 경비도 없었고, 그들이 돌아갈 나라도 없어졌다. 현지 마야어는 물론 스페인어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시 농장과 재계약을 맺고, 에네켄 잎 자르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 1909년 메리다 국민회를 창설하기도 하고, 군사교육을 실시했던 숭무학교를 건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고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지만, 288명의 한국인들이 쿠바로 이민 간 이후에는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민 1세나 2세분들이 어렵게 지켜왔던 한국문화나 전통도 이제는 별로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구글을 검색하다가는 이런 사진도 보게 됐다.

 

 

한국인이 분명하며, 또한 멕시코인이 분명한 이들은 멕시코이민 한인 3세, 4세들이다.

 

2. 지금의 멕시코는...

그러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들이 이런 노예같은 삶을 살도록 하는 사회 구조는 무엇이었을까? 멕시코 사람들은, 이런 사회 구조를 왜 그대로 두었을까?

1032명의 조선인들이 발을 디뎠을 당시 유카탄 인구의 대부분은 마야족이었다. 제국이 붕괴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마야어를 쓰고 마야 달력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만 남기고 사라진 제국을 대신하여 마야인들은 멕시코 연방정부, 대농장의 지주들과 싸움을 벌였다. 마야인들의 독립 투쟁은 1847년 절정에 이르렀다. 수만 명의 마야인들이 탄압을 피해 영국령 벨리즈로 달아났고, 체포된 이들은 쿠바와 도미니카에 노예로 팔려갔다. 1858년에서 1864년 사이에 무려 33회의 폭동이 있었으며 한때 이들의 주력이 유카탄의 중심도시인 메리다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벨리즈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해적들로부터 무기를 사들인 유카탄의 마야인들이 백인 점령지역을 게릴라식으로 공략하여 큰 전과를 올린 적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그러나 조직화되지 않은 이들 마야인들은 비만 내리면 각자의 옥수수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결정적 승리를 쟁취하는 데 실패하였다. 농민의 한계였다. 결국 쿠바의 용병과 미국이 파견한 군사고문단 100명이 상륙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연방군이 유카탄의 마야족들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조선 이민자들이 도착하기 불과 사 년 전인 1901년에 이르러서였다. (118쪽)

 

소설에서도 멕시코 혁명과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궁금한 건, 지금이다. 그렇다면 멕시코 사회는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했는가. 마야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회복했는가. 아니면 하루를 꼬박 기차로 달려도 전체를 돌아보기 어렵다는 대농장 소유주의 후손들에게만 지상낙원의 나라인가.

만약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1953년 이후 정전 사태,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효를 중시한다. 전자전기 통신 산업이 발달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검색해서 찾아지는 삶과는 많이 다르다. 100만원에 가까운 스마트폰을 4인 가족 중 4인이 가지고 있는 나라, 가족 모임에서는 외식을 자주하고, 금요일 밤에는 치킨을 배달시켜 먹고, 그리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이 정규직의 70% 밖에 안 되는 비정규직의 나라인 것을 말이다. 실제 멕시코인들의 삶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더 이상은 대농장의 비인간적 대우 속에 갇혀 있지 않은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옥쇄 속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3. 소설은 이야기

이미 ‘멕시코 초기 이민’에 대한 여러 소설이 존재했음에도 이 소설이 값진 이유는, 이 책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진다. 사람의 겉과 속이 보이고, 숨길 수 없는 사악함과 추함이 보이고, 그런 상황에서도 꽃피는 사랑이야기에 가슴이 설렌다.

노루피 사향 냄새를 품기는 연수의 이야기가 그렇고.

연수의 경우가 그랬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되자 그녀에게선 누구라도 분간할 수 있는 특이한 체취가 풍겼다. 그녀가 지나가면 잠든 사람들이 일이었고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 수년 동안 발기하지 못했던 남자는 몽정을 했고 어린 사내들은 밤잠을 설쳤다. 여자들은 수군거렸고 남자들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 그녀만이 한동안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냄새뿐이 아니었다. 얼굴에서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68쪽)

 

일하지 않되 먹기만 하는 황족 이종도의 이야기가 그렇고.

네 식구가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굶다시피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이종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밥은 가장 먼저, 많이 먹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숭고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식사 때마다 흙바닥일지언정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밥숟가락을 들었다. (135쪽)

 

지옥 이상을 살고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30도를 넘는 더운 날에도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벗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붙인 남자들은 술만 마시면 제 아내를 두들겨팼다. 벌써 노름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노름과 술은 조선 남자들의 뿌리깊은 병폐였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악다구니와 울음소리, 비명과 고함이 밤마다 이어졌다. 유카탄은 남자들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여자들에겐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158쪽)

 

 

4. 지금 그리고 여기

연수가 1905년 멕시코로 향하는 배를 탔을 때 그녀는 16살이다. 지금은 2015년.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소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낸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망해버린 제국의 공주로서, 무능한 가장의 딸로서 말이다. 그녀가 원했던 삶, 무거운 장옷을 벗고 학교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삶은 끝내 그녀의 삶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둘만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사는 것, 그를 위해 밥을 짓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아이의 재롱을 보며 그와 마주보며 웃는 일이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장소에 살았다. 나와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생김새도 많이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땅에 100년 전 태어났기에 지금으로서는 책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는 지독한 삶을 살아냈다. 그녀가 지금 내 삶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나는 아파트에 산다. 지하철역까지 5분 이내의 초역세권이고, R로 시작하며, 최고의 시세를 자랑하는 아파트는 아니지만, 넓고 깨끗하다.

부엌에는 밥솥이 있다. 최고 인기의 남자모델이 광고하는 최신상은 아니지만, 씻은 쌀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면 30분 동안 밥을 스스로 짓는다.

저 끝에는 로봇청소기가 있다. 스스로 충전이 가능한 최고 사양의 제품은 아니지만, 얇은 문턱은 스스로 넘나들며 청소 기능에 더해 물걸레질도 가능할만큼 나름 똑똑하다.

거실에는 책이 있다. 책장 사진을 찍을 수는 있겠으나, 올릴 수는 없다. 여기가 알라딘서재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최고 작가들의 최고 작품들을 전집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책, 가지고 싶은 책은 책장에 꽂혀 있다. 몇 달간은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읽을 만하고, 읽고 싶은 책이 수두룩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100년 전 연수가 그렇게도 갈구하고 갈망했던 것들이다. 그녀는 갖지 못했고, 나는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아시아의 많은 여자아이들은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결혼을 강요당한다. 아프리카의 많은 여자아이들은 ‘여성 할례’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니, 우리나라에도 경제적인, 사회적인 어떤 이유들로 처참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여자들, 여자 아이들이 있다.

출생의 우연이라는 수수께끼는 죽음만큼이나 신비롭다. 나는 왜 유럽에서 태어났는가? 어째서 잘 먹고, 가진 권리도 많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고문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백인으로 태어났는가?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데, 어쨰서 뱃속에 기생충이 우글거리는 콜롬비아의 광부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까? 페르남부쿠의 혼혈인 카보클루는? 염산에 의해서 얼굴이 일그러진 치타공의 벵갈 여인은? ([탐욕의 시대], 330쪽)

 

 

내가 가진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넘어,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넘어, 내가 가진 것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내가 얻은 이 혜택에 대해, 내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누리고 있는 이 커다란 행운과 편안함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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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3-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단발머리님. 글이 점점 더 좋아지네요. 멋져요 ♡
저 책은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날 밤, 연수와 이정은 피로를 모르고 밤새 뒤척였다. 지난 석 달은 피가 뜨거운 청춘들에겐 너무 긴 이별이었다.


라는 문장을 저는 페이퍼에 적어 두었군요. 피가 뜨거운 청춘... 하아-

단발머리 2015-03-12 11:35   좋아요 0 | URL
어휴, 격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저도 85쪽 무척이나 인상깊었어요. 요시다가 좀 안 되기는 했지만, 저는 이정과 연수의 조합을 좋아하는지라.... 저는 이 문장이요.

그녀는 이 모든 일들이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인지, 이 모든 감각들이 왜 이렇게 생생한 것인지, 기이하게만 생각되었다. ...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한편 감미로웠다. (91쪽)

참, 날개뼈도 좋아요. ㅋㅎㅎ 어여 로또가 되셔야할텐데...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