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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이다.
제일 먼저, 이 책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숲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어 차례 산을 내려가 집에서 8마일 떨어진 아테나에 간다. 식료품을 사거나 옷을 세탁하거나 이따금 외식을 하거나 양말 한두 켤레를 사거나 와인 한 병을 고르거나 아테나 대학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탱글우드가 그리 멀지 않아, 여름이면 십여 차례 정도 그곳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운전해 다녀오기도 한다. (15쪽)
이 책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대학에서 낭송회나 강연회도 하지 않고 강의도 나가지 않으며 텔레비전에도 출연하지 않는다. 내 작품이 출간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쓴다. 그 외에는 침묵한다. 아예 작품을 발표하는 것마저 그만둘까 하는 유혹도 느낀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일과 그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요실금에 발기부전까지 된 마당에 그런 게 더 이상 무슨 대수란 말인가? (15쪽)
또한 이 책은 스스로 외롭게 살려고 하는 노작가가 자신을 과하게 챙기는 친구에게 어떤 유머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요한 건 이게 다야.” 그가 말했다. “정말 예쁘지 않나. 한번 보게. 얘들(강아지들)이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야.”
그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대단히 단호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 사려 깊군, 래리.”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건가?”
“A와 B." (21쪽)
또한 이 책은 작가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고, 작가 사후에 그의 개인적 일들이 어느 선까지 알려져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 책이다.
명문가에서 자라 하버드에서 공부한 여자가 열두세 살부터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 그렇게 들킨 게 열세 살 때였는데, <세븐틴> 안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숨겨 읽고 있었죠.
애들은 절 놀려댔지만, 그 책을 읽었다면 <세븐틴>보다 훨씬 외설스럽다는 걸 깨달았을
거에요.
그녀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을 좋아했어요. 좀더 어렸을 때, 아마 열두세 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인 에어』를 먼저 읽고 그 책으로 넘어갔죠. (302쪽)
완벽한 여자가 자신을 숭배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에서 유대인들이 죽음과 삶의 이편과 저편을 어떻게 헤쳐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고,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요실금에 대한 이야기이다. 뉴욕에 대한 이야기이고, 아무데서나 터지는 핸드폰에 대한 이야기이고,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핸드폰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저마다 흥미롭고, 놀라우며, 아주 재미있다.
하지만, 가장 끌렸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실성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일흔 한 살에도 배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40살이 어린 여자를 앞에 두고, 이제는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생식 능력이 없다고 진단 받은 한 남자가, 자신을 사로잡은 이 젊은 여인을 유혹하려 애쓰는 것이 가능한가. 이 절절한 시도들이 가능한가.
나는 내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 더 나아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빌리는 내 나이의 누군가가 자신의 젊은 아내에 대해 묻는 이유가, 그의 젊은 아내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기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내 나이가 그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못하게 했고, 나의 명성 또한 영향을 주었다. 고교 시절부터 읽어온 작가에 대해 어떻게 그런 몹씁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99쪽)
이게 가능한가. 정말 가능한가. 이런 이야기가.
여기, 더 이상은 자신의 DNA를 전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또한 그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사회적으로는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노인의 ‘성’에 대에 사회는 청소년의 ‘성’ 문제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냉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그 자넨 겨우 서른 살이야. 남자를 많이 수집했나?
그녀 몇 명이면 많은 건지 모르겠는데요. (다시 웃는다)
그 대학을 떠난 이후로. 그러니까 졸업식 이후부터, 자네의 남자를 유혹하는 힘으로 날 수집한
오늘 오후까지 말일세…… 그런데 지금 자네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어린애처럼
행동하는군. 자네의 그런 힘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그녀 그런 얘길 듣긴 했어요. 제가 웃은 건, 선생님이 선생님 당신을 수집된 남자에 포함시키신다면,
제가 수집한 남자를 어떤 식으로 계산해야 할지 몰라서였어요.
그 자넨 날 수집했네. (190-191쪽)
주커먼이 상상한 그녀와의 대화이다. 이에 대한 바른 독법은 나 역시 ‘상상’하며 이 지문을 읽는 것이다. ‘그녀’에 ‘나’를 대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30대 초반이 아니고, 매혹적인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래, 잘했어. 솔직했어.)
30대 초반의 여자를 상상한다. 예뻐야겠다. 상상을 시작한다. 예쁜 30대 초반의 여자가 있다.
남자를 상상한다. 71세이고,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지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지금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혼자 살고 있다. 그런 남자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책표지 안쪽, 작가의 사진을 본다.
이런 사람이 이야기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오호라.
일흔 하나라면, 우리나라 나이로 72세. 시아버지가 올해로 74세시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의 친구분(시아버지로 상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시다^^)이 30대 초반, 마흔살 아래, 딸보다 어린 여자에게 말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윽, 이건 아닌데.
한국 버전으로는 “자넨 날 수집했네.”가 불가능한가.
아니다. jtbc 손석희 앵커를 떠올려보자. 인터뷰차 손석희와 만난 염정아가 “손석희 앵커를 만난다고 하니, 너무 떨렸어요.”고 말했다. 화면을 보니, 염정아는 손석희 앵커와 눈도 마주치지 못 한다. 손석희 앵커가 올해로 59세. 음, 59 빼기 40은 19. 2014학번, 신입생이다.
손석희가 말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흐흐.
손석희 앵커가 국보급 동안임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실력, 지성, 언변, 그리고 약간의 고집이 이런 식으로, 이런 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이런 멘트는 충분히 보상 가능하다고 짐작된다.
자넨 날 수집했네. 흐흐.
자중하고, 책으로 돌아가자. 이것만은 확실하다.
주커먼이 30대의 매혹적인 기혼 여성 제이미를 유혹하는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유혹 자체는 매우 강력하게 작동했다.
아무도 못 말리는 다혈질 로체스터의 간절한 애원도, ‘나쁜 남자’의 전형 히스클리프의 죽음을 넘나드는 절절한 외침도, 사랑 때문에 차도남에서 젠틀맨으로 변신한 다아시의 따뜻한 구애의 말도 이렇게까지 감동적이지는 않다.
주커먼의 담담한 이 발언은 그 모든 말들 위에 있다. 주커먼은, 그 모든 남자주인공들 중에 최고다. 갑 중의 갑이다.
자넨 날 수집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