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이란 참 무서워서, 난 이 책을 보자마자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첫째, 나는 ‘에세이’를, 그것도 많~~~이 유명하지 않은 (‘유명하다‘의 판단 기준은 다름 아닌 ’나‘다. 내가 아는 사람이면 유명한 거고, 내가 모르면 무명. 본인이 무식한 걸 몰라라치고, 이렇게 살면 인생 참 편하다.) 그래서, 내가 그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을 시간이 없어서였고, 둘째, 나도 그녀가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가장 곱고, 가장 예쁘며, 가장 완벽한 주제인 ‘딸’을 이미 갖고 있기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할건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서관투어의 마지막, 네번째로 들어선 00 도서관 신간코너에 이 책이 떡! 하니 꽂혀있는 것 아닌가. 새 책에 무지 약한 나는, ‘아니, 사람들이 이 책을 안 빌려갔네~ 읽지는 않겠지만 대출해 가야겠다.’하며 이 책을 집으로 들고 와버렸다.

그리곤, 3-4일을 책장에 고이 모셔 놓았다가 (이걸 ‘숙성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책날개를 슬쩍 열어보았다. 특이한 이력이었다.

유희열의 소개글 역시 구미를 당겼다. ‘반교훈적, 반가족주의적 에세이’라니.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것 아닌가.

한 꼭지씩 글을 읽어나가는데, 가장 먼저는 그녀의 자유로운 한국어 구사에 놀랐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음에도 그녀는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표현마저도 특별하고 산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간호사가 그러면 모유가 덜 나오는 다른 산모들에게 나눠주자고 했고 나는 공짜인데 뭐 어떠냐며 흔쾌히 좋다고 했다. 다만 내가 시간마다 알아서 젖을 짜낼 만큼 짜서 줄 테니 밤중에 신생아실로 호출이나 하지 말아달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43쪽)

이런 식이다.

여자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 그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 세세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연애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는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었는데,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선 예상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엄마’였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엄마’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운 ‘엄마 같지 않은 엄마’였다.

그러다가 보게 된 책이 이 책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고운 마음씨로 그녀가 아이들을 키웠을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곱고 예쁜 심성으로 아이를 키웠기에, 그녀의 아이들이 그렇게, 내 눈에도 예쁘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쁜 그런 아이들로 자라난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같은 마음을 품는 건 그 때의 내겐 무리였다. 그러니까, 지금 ‘보드라운 살결의 아이를 안고 있는 이 순간의 소중함’과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것보다 아이들이 내게 더 큰 선물을 주었다’는 그녀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걸레질하는 등 뒤로 올라타는 아이와 함께 ‘히이잉~~~ 말타기 놀이’를 하기에는 좀 버거웠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두 번, 두 번 정도 말타기를 해주었다. 말타기를 하며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

그녀는 나보다는 우리 엄마, 우리 세대보다는 우리 어머니 세대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천상 엄마’, ‘천사같은 엄마’다. ‘엄마가 되었다는 감동과 행복함’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심적으로 내게 더 가까웠던 책은 이 책이다.

 

 

 

 

 

고전적이고, 일반적인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 일종의 ‘반역’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날 아침이 지나면 집은 다시 거짓말처럼 어질러져 있다. 벽에 기대 앉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다. 어디부터 또 손을 댈까. 아기는 자기만 보아달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아댄다. 집이 나에게도 쉬는 곳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가서 쉬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30쪽)

나는 그녀의 말에 완전 ‘긍정’했다.

사실 시댁과 친정 양쪽에서 양육에 대한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내가 이 책의 내용에 긍정한다는 것이 조금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난 그녀의 의견에 완전 공감했다.

그리고, 이 책, <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를 읽으며, 겨우 내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불안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하야 한다. 일하는 엄마라면 '나는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일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전업주부인 엄마도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하고, 이렇게 살면 자신의 삶이 도태될 거라는 오해는 버려야 한다. 인정하고 오해하지 않아야 불안이 해결된다. (236쪽)

내 안의 정체성 중 자신을 위한 것의 개수를 늘려 나간다. 그래야 덜 억울하다. 나를 버리고 아이를 위해 살았다고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한테 가장 중요한 황금시기에 내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시간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는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시간이 소중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332쪽)

일도 중요하고, 사회생활도 필요하고, 그리고 돈도 많으면 좋겠지만, ‘내 아이’가 가장 소중해서 커리어를 포기하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건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작은 진실’을 그제서야 겨우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이 분야에 대해선, 참 할 말이 많은데, 그런데 어쩌냐. 임경선씨에게 ‘선점’을 당해 버렸다. 나는 생각만 하고, 풀어내지 못했는데, 그녀는 생각하고, 기록하고, 책으로 묶어냈다. 아, 글쓰기에서 ‘소재’가 얼마나 중요한데, ‘소재’를 ‘선점’당하다니. 이럴수가.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녀는 ‘임경선‘의 이야기를 썼고, ’임경선‘의 마음을 풀어 놓았다면, 나에게는 ’내 이야기‘가 있고, 그녀와는 다르게 느낀 ’나의 감성과 느낌‘이 있으니. 그건 서로 다른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뭐, 그리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 제일 먼저 ’세계 문학 전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제일 많이 판매되었고, 제일 많은 책을 번역했고, 제일 인기가 있다지만, 뭐, 민음사만 있는 건 아니고. 문학동네도 있고, 열린책들도 있고, 펭귄클래식도 있고, 그리고 을유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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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1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임경선의 저 에세이를 읽어본 사람으로서 단발머리님의 이 페이퍼가 더 좋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인용하신 문장중에 하나는 제 여동생에게도 보내야겠어요. 마지막책 332쪽이요.

단발머리 2013-03-19 17:39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ㅎㅎ 허허. 제가 이렇게 웃으면 안 되고요.

다락방님의 칭찬에, 핫!! 진짜요? 이히히히히~ 이렇게 웃어야 될까요? 마지막책, 좋아요. 동생분도 332쪽 좋아하실 거예요. 요즘엔 육아관련 서적이 참 많은데, 그 책을 읽는 '엄마들'이 최근까지도 스키니에 10센티 굽을 신고 막 뛰어다니던 사람이란걸 모르는 듯한 책도 많아요. 시대는 변하고요.ㅎㅎ

암튼 저는 마지막책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더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을 말이지요.

즐거운 화요일이예요, 다락방님~ ㅋ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