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싱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15p)

최근 몇 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어서, ‘인문학의 부활’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인문학을 찾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명문대에 최고위과정에 ‘인문학관련’ 수업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고도 하고 (참고로, 이 책도 삼성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원 2011 CEO 추천도서이다, 최고경영자들이 ‘인간 경영’의 목적에서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영’해야 할 것이 기업과 부하직원만이 아니라, 본인의 심성일 수도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서적을 자기 계발서의 일종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물론 세기의 천재들이 풀어내는 인문학의 세계에 빠져, 그들이 전해주는 지혜의 얘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더 지혜로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 강신주가 말하는 인문학의 참 목적, 철학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가면을 벗고 자신과 세계를 바로 응시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렇게 알게 된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 당황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세계의 참 모습이 지금의 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삶을 연기가 아니라, 진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선 가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지금의 현실에 맞닥드려야 할지도.

마음에 대한 것이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든 집착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닦느라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지 못한다면, 불교가 강조했던 자비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집착은 우리 자신을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고통에 빠진 타인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후자의 측면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타자가 방치된 채 시들어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서운 일 아닌가? (68p)

아, 아이에게 24시간 사랑과 관심을 주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아이는 24시간 사랑과 관심을필요로 한다. 내가 책읽기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는 방치된 채 시들어가고 있을 수 있다. 너무나 무서운 일 아니냐고? 너무나 무서운 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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