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을 본 건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였다. 교보빌딩 앞 차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재명 시장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그 뒤를 몇몇 지지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혹은 작다고 느껴졌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근혜에게만 집중하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내 손으로 뽑은 첫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부터 이후까지 여러 번의 선거가 있었고, 그 세월 동안 나는 한결같이 파란색 당 지지자다. 당원은 아니지만 당과의 일체감은 어떤 열성당원 못지않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재명에게는 약간 걱정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니깐, 이재명이 싫다거나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정책과 집행 능력이 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그의 정책은 아직은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나쁜 쪽으로는 아니었고, 좋긴 한데 가능할까, 이런 느낌이 강했다. 적절한 예가 없어서 급조한 예를 들어보자면. 그러니까 내게 이재명은.


사고 싶은데 가격이 좀 나가는 근사한 원피스 같은 느낌이었다. 원피스가 필요하다. 내 몸에 잘 맞고 나를 근사하게 만들어줄 원피스. 차려입어야 하는 자리에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가끔 생기는 그런 자리에 입고 갈 만한 원피스가 필요하다. 길이도 적당하고 색상도 얌전(네이비)하고 좋은 재질의 원피스. 나의 단점을 커버해 주고 나를 우아하게 만들어줄 디자인의 원피스. 마침, 그런 원피스를 발견했다. 원래는 더 비싼 제품인데, 지하 1층 행사장에 전시된 제품이라 4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고민의 핵심은 가격에 있지 않다. 원래 가격이라면 어림도 낼 수 없겠지만, 이 가격이라면 구매를 고민해 볼 만하다. 이걸 하나 구매하면 생각보다 오래 입을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든다. 가격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옷이 너무 좋은 옷이라는 데 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도 되나. 내가 이렇게 비싼 옷을 사도 되나. 내가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내게 이재명은 그런 느낌이다.


이재명이 대통령인 나라에 내가 살 수 있다고?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재명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는 그 일이 6월 3일 화요일 밤에 이루어졌고, 그렇게 이재명은 대한민국의 제21대 대통령이 되었다. 과한 옷을, 내게 과한 옷을 드디어 선물 받고 만 것이다. 생일도 아닌데,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나는 받고야 말았다. 이재명이라는 선물을. 이재명이라는 근사한 선물을.

취임 선서 낭독 후 첫 일성이 국회 청소 노동자를 만나는 일이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영상도 보았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이재명 대통령을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일렁인다.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쏟아진다. <소년공, 대통령 되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서민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면, 대선 토론장은 가장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 간의 '고통 경쟁', '고통 호소'의 장이 될 것이다. 그 고통을 이기고 성공한 사람, 유력한 정당의 대표가 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 대표와 대통령이 되는 길은 비슷하면서도 똑같지 않다. 가끔 국민들은 바보 같은 결정을 하기도 하지만, 곧 그 결정을 철회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오랫동안 사람을 잘못 볼 수는 없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고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걸 '예술적 승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게 변신했을 때, 그 영광은 이전의 고통과는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완벽하게 다른 형태와 모양을 지닌다. 나쁜 것에서 가끔 좋은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쁜 것에서 반드시 좋은 것이 나오는 건 아니고, 고통과 고난, 그리고 고생이 주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건 확실하다. 고통은,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며, 중단시키고 싶은 어떤 순간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고통, 자신의 고생,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잊지 않고 반복해서 말한다. 자신의 과거, 자신의 계급,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틈만 나면 자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걸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종종 아니 자주. 나의 과거, 나의 계급, 나의 출신에 대해 부정한다. 부정하고 싶다. 그건 말하기 싫은 어떤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현재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벗어난 사람만이 되돌아갈 수 있다. 극복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재명의 훌륭한 점, 그의 범상치 않음은 자신의 고통,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태도에 있다. 14살의 아이가 여기저기 공장을 전전하며 남의 이름을 빌려 취업을 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팔에 장애를 입고 나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삶이라는 굴레를, 그 끈질김을 그가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며 그곳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행세하지 않았다는 것. 스스럼없이 청소 노동자의 손을 잡고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손을 맞잡는다는 것. 내가 이재명에게 사로잡히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유능함은 지도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다. 중고생 교복 무상 지원과 산모를 위한 공공산후조리원 설립, 어린이집 등 보육 시설 과일 공급과 만 24살 청년들에게 지급된 1인당 100만 원의 '청년 배당'. 공약 실천율 89%의 이재명은 유능한 행정가이다. 일개 자치 단체장에서 대통령까지의 영전은 그의 행정 능력을 시민들이 알아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능한 사람이 좋다. 말을 알아듣는 사람, 말을 잘 알아먹는 사람이 말 그대로 국민의 '심복'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도 혼자 생각한다. 혼자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마음인가. 따뜻한 마음. 약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는 마음.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처지의 자신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마음. 자신의 성취를 뽐내지 않으면서 먼저 손 내미는 마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마음인 건가. 진공 청소기를 돌리며, 대통령의 첫 일성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내가 했던 생각이다.

국민주권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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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6-0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재명 대통령을 잘 모르지만, 단발님이 ‘과분한 느낌‘으로 비유해주시니 기대해 보고 싶네요!

단발머리 2025-06-05 13:18   좋아요 1 | URL
혼자 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통령이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근데 이전 정부 보면 딱 그 대통령에 그 장관, 그 정도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일 하더라구요.
좀 다를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래도요. 기대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5-06-05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첫 행보가 청소노동자 찾아갔다는 기사 보고 좀 울컥하더라고요.
퍼포먼스라고 할지라도, 그런 퍼포먼스조차 개념에 없던 정부 이후 그런 모습을 보니.. 눙물이...
이제야 뭔가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ㅠㅠ 3년 동안 뭘 본 건지....

단발머리 2025-06-05 13:20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잠자냥님. 퍼포먼스라도 말이지요. 저는 퍼포먼스가 나쁘다고 생각 안 하거든요. 하는 척도 안 했던 그 무도한 정부를 우리가 3년이나 봤던 거 아닙니까. 못 볼 거... 우리가 많이도 봤지요.
한 번에 안 되겠지만, 아무튼 사회대개혁의 발판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 다 만족할 수 없겠지만....
제 소원 여기에 하나 말해도 돼요? 최저임금인상. 전폭 인상을 저는 일단 신청해 봅니다 ㅎㅎ

잠자냥 2025-06-05 14:05   좋아요 2 | URL
전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살포시 놓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6-05 15:22   좋아요 0 | URL
저는 비정규직에 1.5배 임금 지급 살포시 놓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6-05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뉴스보다가 저번 대선 시장에서 한 연설이 나오는데 갑자기 울컥해서 얼른 방에 들어왔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래도 고생을 해 본 사람,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 본 적도 있고 이것저것 경험도 많이 해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정말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공감할 수 있으니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해서 아는 건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단발머리 2025-06-05 18:02   좋아요 1 | URL
아.... 네, 망고님 말씀도 맞아요. 어려운 상황에 처해 봤던 사람이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에요. 정말 그렇죠. 저는 어렵게 살다가 쌩 깐(?) 사람들, 더 지독한 사람들 많이 봐서요 ㅠㅠㅠㅠㅠ
간절한 마음 변치 말고 부디 국민을 위한 정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wonderful 2025-06-05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지않고 일 열심히 할거같아요. 믿음이 갑니다.

단발머리 2025-06-06 18:59   좋아요 0 | URL
네~ 그럴거 같아요. 야근에 김밥에 ㅋㅋㅋ 이거 실화나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06-0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재명대통령에 대한 단발님의 비유 재밌게 읽었네요. 그런 마음도 있구나 해요. 저는 뭐 단발님같지는 않고 그래도 이제야 사람이 정치를 하겠구나. 그간의 정치가 저것들이 사람이냐하는 날들의 연속이라 그것만 해도 감개무량합니다. ㅎㅎ 국민들의 기대가 큰만큼 부디 이 정부가 성공적인 행보를 걸을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단발머리 2025-06-09 21:03   좋아요 1 | URL
저것들이 사람이냐~~~ 의 시간이 길기는 했지요. 감개무량하기도 하구요.
바람돌이님과 한 마음으로 이 정부가 성공적인 진짜 국민주권정부 되기를 바래봅니다. 간절히~~

책읽는나무 2025-06-08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 노동자 분들과 악수 하시는 장면을 보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마음으로 그 손을 맞잡았을지 그 마음이 짐작이 가 찡했었어요.
여동생과 어머님 생각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어머님도 아들이 대통령 되는 걸 보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싶기도 했구요.
암튼 주사위는 던져졌고 걱정이 앞섰지만 이젠 그 걱정 접고 무조건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열심히 일 해줄 것이란 기대와 응원을 보내봅니다.

단발머리 2025-06-09 21:05   좋아요 2 | URL
네네~~ 저는 임기 첫날 야근에 다음날 점심 김밥 한 줄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이 장면, 청소노동자들과 손잡는 장면에서 많이 뭉클해하시는 거 같더라구요.
걱정도 많고 경제 상황도 많이 안 좋지만 잘해나가기를 바래볼 뿐입니다. 아무튼 큰 걱정은 덜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