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가 무슨 가수 앨범을 사야 된다고 교보문고에 가자고 했다. (계산대에서 뉴진스로 밝혀짐) 나도 교보문고를 좋아하지. 약속 있는 사람을 빼고 셋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아이들은 앨범을 구경하러 가고, 나는 원서(읽지도 않고 부지런히 사기만 하는 원서) 코너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방송이 나온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저자 최은영 작가님의 팬 사인회가 00 코너 앞쪽에서 있습니다. 아, 나도 최은영 좋아하는데. 제일 먼저 번호표를 받아 제일 앞에 줄을 서게 된 부러운 사람들의 등을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직원에게 살짝 물었다. 제가 지금 책을 사면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지금 구매하시면 대기 번호 50번 정도 되실 거에요. 작가님은 언제까지 계시나요? 한 시간 정도요. 아, 그럼, 지금 책을 사서 줄을 서고, 한 사람당 대략 2분 정도 걸린다고 했을 때, 아! 사람들 다 책을 두 권씩 들고 있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도 대략 몇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눈으로는 최은영 작가를 쳐다본다. 열심히.
최은영 작가는 연두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퍼프 소매의 귀엽고 단정한 스타일의 원피스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양말이 흠…. 양말 색깔과 운동화와 원피스가 약간 미스 매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스매치인가 아닌가, 저게 요즘 유행인가. 양말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 혹은 다른 옷과의 조화를 파괴하는 감각의 소유자로서 나의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는 데까지 이르고. 나는 계속 서서 최은영 작가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사인을 받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데. 나는 서 있다. 저도 작가님 좋아해요. <쇼코의 미소>에서부터 좋아했…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서 존재한다. 작품은 작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오래간다. 작품은 작가가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한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오래오래 기억되는 고전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다르다. 작가는 보통의 사람보다 더 낫거나 더 근사하지 않다. 다만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잘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작가를 사랑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만들어낸 문장, 그가 만들어낸 생각, 그가 상상한 세계가 아름답기 때문이고, 혹은 그의 문장, 그의 생각, 그가 상상한 세계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우리의 추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가가 지어낸 언어로 된 집 안에서, 우리는 한편으론 안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우리는 그렇게 작가를 사랑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그러하듯이 그의 생각은 변한다. 위대한 사상의 주창자, 위대한 작품의 창작자가 가끔 터무니없이 변해 버리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그는 변한다. 고정된 정체성을 작가에게, 인간인 그녀/그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뜻이다. 가끔 우리는 작가의 ‘일면’을 발견한다. 성경처럼 마음에 새겼던 작품의 창작가가 사실은 옹졸한 여성 혐오자라는 걸 발견하는 그런 느낌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겨울에 <부활>을 읽었는데, 15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감화를 받았다. 네흘류도프의 회개와 결신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평생에 <부활>을 가장 위대한 책으로, 가장 완벽한 책으로, 내 인생의 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소피아 톨스토이의 일기를 읽고 나면, 적어도 이 책을 내 평생의 책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부활>을 혹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를 영원히 미워해야 하는가. 밀어내야 하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열다섯의 내게, 인간 존재의 의미와 헌신, 그리고 ‘정신적인 부활’의 숭고함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만큼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그리고 그렇게 그와 이별하면 된다.
방법은 작가들의 ‘개인적인’ 일화에 관한 책을 읽지 않는 것일 테다. 그런 종류의 책들을 읽은 후에 작가에 대한 호감이 상승하기보다는 호감이 반감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어두운’ 혹은 ‘불성실한’ 혹은 ‘비윤리적인’ 일면을 모른다는 것이,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작가님, 나쁜 행동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해주세요. 내가 모르게 나빠 주세요, 제발.
지행합일의 작가라니. 세상에. 만약 그런 작가가 있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기보다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만나자마자 나를 싫어하겠지. 저는 지행합일의 정반대인 표리부동의 화신으로서. 제 말의 반의반도 지키지 못하며. 제 글의 10분의 1만큼도 살아가지 못합니다. 부디 저의 목을 쳐주십시오.
어떤 사람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그 ‘판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유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일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단점으로 보이는 그 지점을 다른 사람은 좋아할 수 있고, 내게는 무한히 장점인 그 지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아낼 수 없는’ 어떤 지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만, 유독, 냉정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똑똑하고 성실하고 대단하고 그리고 멋진 면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옹졸하고 괴팍하고 무례하고 그리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우리 각자는, 각각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이유도 싫어하는 이유도 각각이다.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 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롱다리, 브이라인, 에스라인, 빨래판 복근 같은 것이죠.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글쓰기도 인생과 같습니다.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231쪽)
나는 이게 그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단언이 아니고 추측이다. 내가 찾은 그의 측면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쓰기에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마음은, 쉬이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