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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지음 / 유유히 / 2023년 2월
평점 :
이 책은 <그래 24>에서
연재되었던 글을 묶은 것이다.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과 관련된 이상한 일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책인데. 아, 나는 뭐 여러 번 가슴이 찌릿찌릿하니 마음이 참 그랬다. 소설 쓰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그것이 실제의 경험인가 싶을 정도로 ‘냉정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이건
작품 홍보를 위해 혹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강연을 나가게 되었을 때 에피소드 중 하나다.
서글프게도 그런 손톱만 한 우위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강연료를
묻는 순간 연락이 끊기는 섭외자들이 꽤 많다. 공짜 강연을 바랐을 확률이 매우 높다. 강연장에 와서야 그 강연이 재능기부 행사였음을 알게 됐다는 작가나 번역가도 있다. 끝까지 강연료를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입금된 금액을 보고 너무 소액이라 속앓이를 했다는 이는 부지기수. (172쪽)
물론 취지에 공감해 강연료에 관계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한 자리도 있다. 그런데 그랬다가 후회한 적도 많다. '가난한 소설가에게 우리가 좋은
기회를 줬다'고 믿고 생색을 내는 상대 앞에서 얼굴이 굳어지면 내가 소인배인 건가. 참석자들에게 냉대받고 나의 역할은 얼굴 마담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엔 미소가 잘 안 지어지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아, 그리고
지역 독서모임 중에는 다음 기초의원 선거 출마 준비자의 사적 네트워크 같아 뵈는 곳도 있다. 작가들은
주의하시길. (175쪽)
사람들은 작가들이 특별히 문학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이 ‘하늘 위에 둥둥’ (갑자기 생각나는 쟝쟝님, 쟝님 좋겠다!) 떠서 살 거라고 ‘추측’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 너머를 보여주기를 원하고 그런 삶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먹고 사는 것 같은 소소하고 일상적인 문제보다 그 너머를, 그 이상을
혹은 그 이하를,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을 그려내는 그들이 밥을 먹고 빵을 사고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고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것 같은 문제에는 ‘왠지 모르게’ 초연하기를 원한다. 혹은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예술가들에게도 그런 ‘자의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조정래 선생님은 ‘황홀한 글감옥’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하셨다. 감옥에 갇힌 운명, 계속해서 써내야만
하는… 하지만, 그런 ‘직업적
소명’을 받드는 행운도 어디까지나 베스트셀러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아니다, 정확히는 초 베스트셀러 작가에 방송 출연도 많이 하는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미리 강연료를 알려 주지 않거나 아주 소액만을 입금하거나 혹은 ‘재능 기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 사람들(작가들, 예술가들, 소설가들, 시인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원리 바깥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말이 안 된다. 대학 축제에 아이돌을 부르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그 사람들은 알까? 조그마한
지역 행사에 이름을 한 번 정도 ‘들어봄 직한’ 가수가 초청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내야 하는지 알까. 모를까? 모르지
않고서야 어쩜 이 예술가들에게만 땅을 밟지 말고 하늘에 ‘둥둥’ 떠
있으라고 말하는 걸까.
이 책 전체를 통틀어 나는 이 문단이 제일 좋았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헌신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떤 직업의 귀천은 그 질문으로
대강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직업이 임금의 대가로 종사자에게 시간을, 추가 노동을, 감정을, 가끔은
건강이나 그보다 더한 것까지도 요구한다. 그런데 사모펀드 CEO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혀를 끌끌 찬다. 뭣이 중한지 모른다며. 큰돈을 벌게 해주는 직업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해치면서까지 추구할 일은 아니라고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방관의 희생을 우습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화재
현장이 아니라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슬퍼하면서도, 소방관이라는 직업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그 희생이 괜찮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그 가치는 높은 연봉과는 다른 무엇이다. 종사자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퇴근
뒤에도, 심지어 퇴직 뒤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나는
소설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9-10쪽)
나는 소설이, 문학이, 예술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써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서, 문장과 씨름하며, 단어를
고르고 지우는 그 지겨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다. 돈을 벌 수 없다. 밥벌이를 할 수 없다.
인간은 일을 할 때, 행복하지 않다. (아니라고
하시는 분들에게 축복을. 재산이 100억인데 계속 일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축복을. 그 일이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임을 알아채시는 분들에게 축복을!) 인간이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타인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을 발휘(과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 중에 ‘하기 어려운 일’, 큰 위험을 담보하는 일이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보상’과 ‘존경’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네 세상이 돈이 최고인 세상이 되어, 갭투자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 사람이나 비트코인으로 수십억을 손에 넣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세상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간호사님을, 소방관님을 그리고 민원 폭주로 괴로워하는
일부의 착한 경찰관님을 존경한다. 특별히 보육 시설에 근무하는 분들의 경우, 해당 노동의 성격이 ‘여성적’인
일,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지기에 더욱 저임금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CCTV 속의 포악한 보육 선생님들은 비교적 ‘쉬운’ 경로(적은 비용과 시간)를
통해 유치원, 어린이집의 ‘보조 선생님’으로 채용되지만, 저임금은 물론이요 고용 연장 보장 없이 ‘육체적으로’ 고된 보육과 영유아 케어를 도맡아야 한다. ‘다정할 수 없는 구조’가 존재한다.
노동은 고되다. 고된 노동의 ‘수행’이 성스러운 것으로 해석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중세 시대, 농민들의 실제 노동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책은
어마어마하다.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의 초라한 기억력을 탓한다.) 흑인 노예들이 대농장주의 횡포에 ‘태업’으로 맞섰던 일 역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례다. "노동은 신성하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윤리는 근대의 발명품이며, 노동 윤리의 과대 포장에 앞장서 온 자본의 논리가 개신교 전통과 결합함으로써 그 쓰디쓴 열매를 맺었다. 소명과 사명. 천직을 성실함으로 대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게
되었다.
자본가의 ‘이익’은 노동자의 ‘시간’을 착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실제
노동 시간은 8시간이지만, 그 노동을 가능하기 위한 수면
시간, 휴식 시간 등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자본가는
지급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집에 돌아와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직업’이었던 내게, 아무도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던 바로 그 상황이다. 설정 자체가 착취다. 일할수록 손해다. 오늘 오전에 해야 할 일 하나가 갑자기 취소되어서 자유 시간이 생겼다.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 친정 단톡방에, 1시간 쉬게 되었다
자랑을 했다. 아빠가 답했다. “그렇게 일하고도 한달월급
받아 일좀 많이 해.” 엄마가 답했다. “헐” 내가 답했다. “너무 많이 해요 지금도 ㅋㅋㅋ 살살 해야 함 ㅋㅋ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ㅋㅋㅋㅋㅋ”
개미 같은 사람들. 우리 아빠 같은 사람들. 평생을
열심히 일하고도 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잠깐 쉬어도 미안한 사람들.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그 부지런함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나이브하다는 걸 안다. 사람마다 환경과 처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 다만 나는 ‘열심히 일한다’는 게 기쁨의 한 축이 될 수는 있지만, 자긍심의 축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노인 문제’로 읽었다. 매일
아침 5시에 기차를 타고 출근해서 돈을 벌어 오던 주인공. 그가
흉측한 벌레로 변해 버렸을 때. 외양은 흉측하고(냄새가 난다고
했던지 그건 잘 기억이 안 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무슨 일인가를 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그가 사라져 주기를
혹은 죽기를 바라는 가족의 마음들. 쓸모없는 인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제는 쓸모없는 사람, 자기 밥값도 못하는 사람, 자기 관리도 안 되는 사람, 오히려 돈, 시간, 돌봄이 필요한 사람.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 이제 그 사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인간을 ‘효용’으로만 볼 때, 실직한 가장은 집에서 찬밥 신세다. 인간을 ‘쓸모’로만 이해했을 때, 여자가
암 걸리면 이혼당한다. 인간을 ‘실적’으로만 바라봤을 때, 자식이 공부 못 하면, 그 자식은 ‘창피한’ 자식이다. 이런 세태에 대해 우리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밥벌이’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2, 30대의 젊은이들(생각보다, 제가 나이가 많아요)이 취업을 포기하는 건, 그들이 갈 만한 ‘좋은 직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가 불러서’ 그런 게 아니다. 소설가라면 3년
혹은 5년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습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그 기간에는 돈을 벌 수 없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돈을 벌러 갈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내 결론은. 다시 한번. 나이브하게. 최저임금 인상과 기본 소득이다.
돈이 필요해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2개 정도 하면 적어도 ‘당분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치 출사표로 느껴진다는 댓글은 사양입니다. 전 이미 충분히, 매우 엄청나게 정치적입니다) 한 사람당 한 달에 50만원 (70만원이라고 적었다가 20만원
깎았다) 정도라도 기본 소득이 지급된다면 그 돈을 가지고 그다음을 ‘도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물론 집 문제, 아파트 문제, 교육 문제와 얽혀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일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 말하자는 것이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다. 나를 기쁘게 했던, 울고 웃게
했던 소설가들이 계속 소설을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강명씨… 강명씨가 이 글을 읽을지 어쩔지 잘 모르겠어요. (제 친구는 분명 강명씨가 알라딘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천상계
우리 정희진쌤도 댓글 다시더라구요. 강명씨도 댓글 달아주면 나는 좋겠지만, 안 달아줘도 상관없어요. 저번 주에 푸코 만나야 해서 좀 바빴어요. 이 페이퍼 쓰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들었을 거 같죠? 이번주에 진짜, 진짜 <재수사> 들어갑니다.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