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나의 ‘의견’이 어떠함을, 그래서 내 입장이 어떠함을 특정하지 못한 채로, 이 글을 쓰는 일이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 내 생각이 닿는 부분까지라도 정리하고 싶어서. 굳이 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과 ‘여성’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때, 내 예시는 주로 미국의 백인 여성들이다. 첫 번째는 마사 누스바움. 똑똑한 딸을 교육시켜서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 그에 더해 하버드 법대에 입학시켰는데, 지도 교수가 대놓고 가슴을 만지려고 할 때, 교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그 팔을 살그머니 미는 행동에 대해 말한다(<비평 이론의 모든 것>). 그리고 레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통계.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4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 번째다. (49쪽)
동독 출신으로서 16년간 독일 총리로 일했고, 퇴임시까지 독일 국민들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던 앙겔라 메르켈도 ‘패션 감각이 부족하다’는 사람들의 세평을 피할 수 없었다. 꾸밈 노동을 등한시하는 여성에 대한 평이 그렇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변호인(또는 피의자)과의 전화 통화 중에 ‘여자라서’ 반말하는 경우를 많이 당했다고 그의 책에 썼다.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 129쪽) ‘개인적’인 가정사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인정’ 받는 혹은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더라도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은 끝끝내 ‘약점’으로 작용한다.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라는 점, 그가 페니스가 아니라 자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능력과 실력, 그리고 품성과 캐릭터를 유추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렇게 문장으로 써 놓고 보면 더욱 확실하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된다. 2세대 페미니즘의 개척자 필리스 체슬러 역시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억압당해 왔다고 주장했다.
나는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이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형성해왔는가를 자료로 입증해나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은 생산 수단과 재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꾸준히, 성적으로 또는 다른 측면에서 치욕을 당했다. (<여성과 광기>, 25쪽)
이 책, <성의 변증법>의 저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역시 여성이 역사적으로 하나의 계급-카스트로 실제하며, 여성 억압의 핵심은 ‘생물학적 기능’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 그로 인한 임신, 출산, 자녀 양육이 여성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계급-카스트’로 묶어 놓았다고 해석했다. 계급으로서의 여성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규정’ 혹은 ‘정의’에 묶여 있는 한 해방될 수 없다고 보았다. 파이어스톤(이름 쓸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역시 사람은 이름이 중요해요. 파이어스톤, 와~~ 짱입니다)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해방에 경제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던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 해방에 생물학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프롤레타리아가 경제적 계급체계를 타파하기 위해서 생산수단을 장악해야 하는 것과 같이, 여성들은 성적 계급 체계를 타파하려면 재생산수단의 지배권을 장악해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의 궁극적 목표가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계급의 구분을 종식하는 것이듯이, 페미니즘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양성적 사회에서 성의 구분을 종식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P92, 밑줄은 단발머리)
재생산수단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방식이 가능할까. 인간 본성을 무시한 채, 사유재산 철폐를 기치로 들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더 많은 농민을, 민중을, 시민을, 국민을 극빈 상태로 내몰았다. 소수의 부패한 관료들은 민중에게는 ‘사회주의’를, 자신들과 자녀들에게는 ‘자본주의’를 실천했다. 계급 철폐와 노동자 해방을 기원했던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여성 해방 운동은 어떠할까.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여성을 ‘단일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여성은 ‘단일한’ 하나의 집단이 될 수 없다. 먼저는 신체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은 규범이지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실체로서 남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12쪽) 남성과 여성은 정확히 ‘구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복잡한 현대 사회의 여러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과 멕시코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의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여성과 가사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하는 동남아시아 여성의 처지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사이보그로 살아가기>의 저자 임소연은 급진 페미니즘의 주장이 서구 가부장제만큼이나 권위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여성들이 ‘자신이 아닌 여성'으로 의식화되는 순간 수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개별 여성은 거대한 하나의 여성에 가려져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가부장제가 원하는 것, 즉 남성 욕망의 산물로서의 여성일 때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만큼이나 권위적이다. (<사이보그로 살아가기>, 36쪽)
그렇다면 유사점과 차이점 중 무엇에 방점을 찍어야 하나. 나는, 예전에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집단’에 더 굵은 밑줄을 긋는 사람이었다. ‘여성’이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옥죄는 가장 강력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됐다.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7쪽)
나는 먹는 일을 좋아하지만, 정확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는 일을 좋아하지만, 과식은 삼가는 편이다.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이 지구에 살면서 ‘아, 배불러. 아, 너무 많이 먹었네.’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원래 먹는 일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먹는 일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에코 페미니즘을 읽은 후, 코로나로 온 세상이 어두울 때, 나는 지구와 자연을 위해 당분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는 새 옷 구경/ 새 옷 사기를 즐겨하니까 이건 내게 큰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1년 동안 옷 사지 않기>. 하지만 바로 그해 봄, 나의 이 소박한 결심은 무너지고 말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요가 브랜드에서 내가 좋아하는 요가복이 1+1 행사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해방을 노래하는 나는, 페미니즘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는, 제3세계의 10대 미만의 어린 여성이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쉬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저임금노동으로 인해 얻어진 수익의 일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 요가복을 내내 좋아한다. 이 요가복이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저렴한지에 대해 감탄한다. 이 체제에 물질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제1세계에서 살고 있는 여성으로서(나는 우리나라가, 우리나라의 소비 수준이 가히 제1세계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착취와 억압의 공범자라고 느낀다. 나는 여성이어서 억압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여성 억압적 체계 안에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의 일부를 ‘편리함’(1일 1회 건조기 돌리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백인, 중산층, 이성애, 비장애인 여성들만의 페미니즘을 벗어나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자리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만큼 갈 수 있는가. 혹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이 모든 일의 책임은 페미니즘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원래 그렇다는 말에 반박하려면, 모든 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쉽게 대답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어떤 답을 준비해야 하는가.
<정희진의 공부> 2023년 5월호 <자매애는 불가능하다>에서 ‘형제애는 실재하지만 자매애는 관념’이라는 선생님의 말뜻이 뭔지 알 것도 같다. 부패한 강자들은 서로를 돕지만, 약자는 연대할 힘이 없다. 오늘 하루, 먹고 살기도 팍팍하기 때문이다. 단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없는 여성, 집단으로 작동한 역사조차 전무한 여성이라는 집단이, 현재까지의 억압과 구속을 벗어나는 일은 정말 불가능한가. 서로간의 차이를 넘어서 계급, 인종, 사는 지역을 초월한 ‘전 세계적인’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아니, 연대라는 단어조차 여성 집단에게는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우리 앞에는 투명한 장애물 뿐이어서, 우리는 이를 넘어설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단 말인가.
P.S. 오늘 올라온(오늘 맞을까?) <정희진의 공부> 2023년 7월호의 <남성 연대와 자매애의 차이> 듣고 돌아 오련다. 돌아와야 할 텐데, 꼭 돌아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