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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이 소설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계급’ 혹은 ‘예술’이 될 것이고, 문구로 고른다면 ‘계급을 초월한 루스와의 사랑’ 그리고 ‘예술가 탄생의 고단한 여정’ 정도가 되시겠다. 이 책의 출판사에서 고른 문구는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역시 출판사답다. 이걸로 밥 먹고 살아도 되겠습니다.
루스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속한 계급을 포함한다. 마틴이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루스이며 동시에 상류 계급에 속한 여성 루스이다. 그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그녀가 속한 계급에 진출하고자 한다. 미친 듯이 읽고 쓴다. 기본 혹은 기초 혹은 교양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마틴. ‘You was… ‘라고 말했던 마틴은 빠른 속도로, 과장하자면 빛의 속도로, 읽기와 쓰기를 마스터한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쓰기에 매진한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다. 정통이라 불릴만한 것, 작품이라 여겨질 소설을 쓰고 싶지만, 소설만 쓰지 않는다. 추리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도전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다.
내가 돈만 따진다고 생각하지는 마. 내가 늘 생각하는 건 우리의 사랑, 우리의 장래 계획이야. 우리가 서로 사랑을 확인한 지 한 해가 지나지만 우리의 결혼은 여전히 기약이 없잖아. …. 자기가 그토록 글을 써야겠다면, 신문사에 취직하는 건 어때? 기자가 되는 건? 적어도 한동안만이라도.” (66쪽)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대충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나는, 마틴보다는 루스의 입장에 가까웠다. 그가 가진 것이 천부적인 재능이라 하더라도 당장 식료품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서라면, 시간을 내어 일을 하는 게 좀 더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미친 듯한, 아니 실제로 약간은 미쳐 있는 상태의 마틴을 계속해서 지켜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루스는 마틴과 헤어졌을 거로 생각한다. 마틴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루스의 잘못은 아니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이 메워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른바 ‘수준’이 꼭 비슷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초반에는 두 사람 간의 커다란 간극이 서로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보이는 세상 그 너머를 창조해내는 마틴이 일반 독자인 루스의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내 안에 무엇을 가졌는지 알아. 아무도 나만큼 알 수 없지. 나는 내가 성공할 거라는 걸 알아. 나는 주저앉지 않을거야. 나는 시로, 소설로, 에세이로 써내야 할 것들로 불타고 있어. 그렇지만 자기에게 그걸 믿어 달라고 하지 않겠어. 나를 믿어 달라고도, 나의 글쓰기를 믿어 달라고도 하지 않겠어. 자기에게 바라는 건,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믿음을 가져 달라는 거야. (74쪽)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져달라고 애청하는 마틴. 하지만 루스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이별을 고한다. 드디어 마틴의 책이 큰 성공을 거두고, 루스는 그런 그를 잊지 못한다고 찾아가고, 마틴은 찾아온 그녀를 아프게 한다.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마틴의 확신은 마틴만의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종류의 확신이다. 경우는 두 가지다. 마틴의 확신대로 마틴이 성공하는 것, 아니면 마틴의 주장이 모두 헛소리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 결말을 아는 나로서는, 루스가 더 기다려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루스는 결말을 알지 못하고 작가로서 마틴이 이렇게 성공할 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두 사람. 만약 정말, 그것이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면. 아, 나는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마틴이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틴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굳이 자기 아이와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일 난감한 경우는 ‘하고 싶은 거 없어요’라고 답하는 사람과의 대화다.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이건 분명 우리 교육의 문제다. 국어, 영어, 수학이 제일 중요한 세상에서 (순서를 바꿔야겠다. 요즘은 수학, 국어, 영어 순이다), 수학, 국어, 영어를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 않는 아이의 경우 ‘하고 싶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 내 뇌가 반응하는 일. 오래 해도 지루하지 않은 일. 오늘 하고 내일 하고 모레도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는 것.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일을 찾았을 때는 응원해 줘야 한다. 그게 수학이나(정말이요?), 영어(이거 실화냐?)면 좋겠지만, 그게 다른 일이어도 이를테면 일렉 기타 연주나 요리, 바느질이어도 응원해 줘야 한다. 문제는 우리는 ‘그 좋아하는 일’을 ‘먹고 사는 일’로 연결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모두 ‘경영, 경제, 컴퓨터공학, 기계, 전자, 건설’ 관련 학과에만 가야 하는 거고,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들이는 시간을 모조리 모아모아, 책 사는 돈을 한 푼이라도 모아모아.
나는 어디로 가나. 기본소득으로 간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주자. 그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전 국민에게 기본 소득을 지급하자.
마틴에게 기본 소득이 지급되었다고 해보자. 마틴이 아침에는 한우 꽃등심, 점심에는 연어 초밥 (고급요리 나열 중), 저녁에는 삭스핀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고, 최소 5,000 cc 이상 자가용을 몰겠다는 것도 아니고, 최소 4성 호텔에서 머물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머물 방이 있고, 루스네 집에 정찬모임 갈 때 입고 갈 깔끔한 정장 한 벌이 필요하고, 가끔 고기를 넣은 수프를 먹으면서. 마틴은 일을 하고 싶은 거다. 쓰고 싶은 글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틴을 욕한다.
“ … 넌 건달, 그래, 건달이고, 나라고 눈뜬장님은 아니야. 네 여동생과 결혼한다고 해서 나한테 빌붙을 생각은 마. 왜 일해서 정직하게 돈을 벌지 않는 거야? 대답해 보라고.” (115쪽)
마틴의 매형이 욕하고, 마틴 여동생의 약혼자가 깔본다. 급기야는 루스마저도 그가 일하기를 바란다. 밥값 하기를. 돈을 벌어 오기를. 물론이다. 돈이 있어야 산다. 돈이 있어야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일인 건 아니다. 마틴은 열심히 일했고, 또 일했다. 다만 그 일이 ‘돈’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장강명은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전에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썼다. 그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그렇게 했는데도(주경야독) 이렇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을 정도다. 전 세계적인 초대형 베스트셀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도 4번째 책(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제일 유명한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웨이트리스였고, 바텐더였고,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다. 그녀 역시 ‘쓰고 싶은’ 마음만큼 ‘생활을 책임’ 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틴 같은 사람도 있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루스가 그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걸 이해한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기본 소득이 지급되었다면. 마틴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되었다면. 넉넉한 형편의 루스가 자신에게 지급되는 기본 소득을 마틴에게 무기한 ‘양도’해주었다면. 아,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2021년 6월 기준으로, 1인가구 3명 중 1명은 월소득이 200만원 미만이다. 12.4%는 월소득이 100만원에 못 미쳤고, 20.5%는 100만~200만원 미만인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경제tv, https://www.sentv.co.kr/news/view/596414)
넉넉하게 80만원 드리고 싶지만, 초반에 너무 과하게 하면 안 되니까, 60만원으로 하자. 매달 60만원씩 기본 소득이 지급되었다면 어땠을까. 마틴에게 매일 라면만 먹고 살라는 뜻이 아니다.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올 수는 없지만 역시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연인 루스의 기본 소득 60만 원을 더하면 120만 원. 당분간은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주거, 의료 (교육 그리고 육아)의 문제가 얽혀 있기는 하다. 갑자기 월세가 100배 오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까지 잠시라도, 3년 만이라도 여유를 줘보면 어떨까. 그냥 딱 봐도 윤씨의 특기는 술 마시기와 헛소리하기인데, 윤씨에게는 사법시험 9수를 가능케 한 아버지가 있었다. 능력 있는 부모는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밀어줄 배경이, 가족이, 부모가 없는 마틴에게 기본 소득 60만원이라도 지급해주면 안 될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 돈 이야기로 마무리되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내 위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나는 일은 하지만 국가 공인 ‘노는’ 사람이고, 일하지만 국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일에 대한 개념, 일에 대한 ‘정의’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가서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일도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해야만이. 그래야만 ‘기본 소득’이 지급되는 세상이 가능할 것이다. 기본 소득이 지급된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전업주부’가 될 거라는 어느 책의 주장은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소식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기본 소득이 꼭 필요하신 분들, 나열해 보자.
- 고등학교 졸업 이후 (미국도 아니면서) 갭이어를 갖고 싶은 10대
- 대학을 졸업했지만 다른 진로를 찾아보고 싶은 20대
- 출산 후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 30대
- 이른 명퇴로 새 인생을 계획하는 40대
- 퇴직 이후 남은 삶을 구상하고 있는 50대
- 아직 젊은 60대
- 노인정 막내 70대
- 아직도 팔팔한 80대
- 지팡이만 있으면 어디든 도보가능한 90대
작년에 작은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입학지원금’을 받았다. 원래는 교복, 도서 구입하는 데 보태라고 서울시에서 지급한 것인데, 아롱이네 학교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교복 살 때는 적용이 안 되었다. 학교에서 입을 체육복 대용 트레이닝복이랑 티셔츠 같은 거 사고, 문제집 사는 데도 썼다. 2021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만 지급됐는데, 작년부터는 초등학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나랏돈 받아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는 내심 반가웠다. 원래 그 돈이 다 내 돈이었다고 믿고 쓴다. 다 내 돈이다, 원래. 기본 소득 나왔으면 이 책 샀을 텐데. 아직 구매 전이고 계속 생각 중이다. 잭 런던, 진짜 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