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관을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켠 아롱이가 자기 핸드폰을 내민다. 엄마, 이거 보세요. ‘마침내. 왜구와 헤어질 결심’. 둘이 마주 보며 큭큭 웃었다. <한산 : 용의 출현>을 보고 나오는 길, 관람평 중 1등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월요일에 <헤어질 결심>을 한 번 더 봐야 했는데, 가정사(아침 청소 & 빨래)를 돌보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영화관에 한 번 더 가기 어렵겠다, 싶어서 박해일이 했던 대사를 머릿속으로 리플레이하고 있었는데. 방학 맞이 기념으로 영화관 가자 해서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영화관에 도착해서야 <한산>을 볼 것이고, 이순신을 다룬 영화이고, 주인공이 박해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 박해일이 나온다. 이전에는 관심 없었으나 이제는 관심이 생겼고, 그리고 호감도 조금 생겨버린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이다.
이순신에 대해서라면, 우리 세대는 모두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민족을 구한 구국의 화신, 100전 100승 천재 전략가. 불운의 시대, 불세출의 영웅. 박정희가 특히 이순신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서. 나는 이순신이 좀 과대평가 됐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졸업 여행이 충무사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기념사진은 아주 잘 나왔다.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근데 영정 본 기억은 나는데, 난중일기 본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랬다. 이순신에 대한 내 생각은 그런 정도였다. 그런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던 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을 읽은 후였다. 무책임하게 서둘러 도망가는 선조와 마지막까지 백성과 함께한 이순신의 삶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난 이 글을 일본어로 쓰고 있었을 수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엄청 노력하는 모양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수준이고, 일본 정부는 아주 도도한 모습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번 달에 있었던 방일 과정에서 2015년 당시 일본 외무상으로서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낸 기시다 총리에게 ‘위안부 합의는 양국 간 공식 합의로서 존중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박근혜 정부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밀어붙이기식 조약 체결로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던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일본과의 정상 회담을 위해 일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태세다.
2018년 10월, 일본 전범 기업들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 측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이듬해 6월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조치를 발동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조치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 보복으로서 ‘강제노동 금지’와 ‘3권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의 대원칙을 위반한 행위”임을 지적했다.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우리 경제는 엄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더해졌지만,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전 국민의 대대적인 ‘노제팬 운동’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이러한 행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 부적절했다고 보는 것 같다. 윤정부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하나,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이다.
긴밀해질 것으로 보이는 한일 관계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일본 자위대’의 부활로 인한 군국주의의 확대이고, 그 구체적인 안은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 시나리오다.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였던 윤석열은 대선 과정에서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윤 후보는 지난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2차 법정 TV토론회에서 '한미일 군사동맹도 검토하나', '유사시 한반도에 일본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인데 하겠냐'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물음에 "한미일 동맹이 있다고 해서 유사시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지만 꼭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뉴시스, 2022년 2월 27일,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20227_0001774362)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한국과 일본은 군사동맹이 아니”라고 일축하며,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 허용 문제는 일관된 대한민국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쩌나. 이제 대한민국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윤석열 정부이고. 이 정부는 ‘북한 유사시, 일본의 한반도 상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정부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힘들었던 시간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어졌다. 큰 화면 가득히 사람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죽였다. 적을 죽이고, 같은 편을 죽이고, 그리고 자신을 죽였다.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정신 나간 생각(63쪽)에 온 국민이 들뜬 미친 상태. 그런 상태로 일본은 1592년 조선 땅에 상륙했고, 이 땅의 민초들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자기 집을 침범한 침략자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고, 선진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렸고, 죽지 않아도 될 귀한 목숨이 수없이 스러졌다. 그 와중에 선조는 부지런히 피난길에 올랐고. 지배층, 쉽게 전쟁을 말하는 그 지배층들은 그렇게 도망가기 바빴다. 남겨진 사람들만이 고통을 살고, 지옥을 산다.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싶지만, 일본의 1당 독재와 언론의 행태를 볼 때, 가끔 멍청한 족속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나는 박해일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이순신 장면이 많지는 않았다. 김명민과 최민식이라는 거대한 이순신들 사이에서 박해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박해일은 선이 굵지 않고, 카리스마 없으며, 밤새 연구하는 학자형 이순신을 올곧게 그려냈다. 물론, 나는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이 더 좋지만 말이다.
이순신 이야기 쓰느라 무척 바빴는데, 알라딘 서재 다른 방에서는 뭔가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졌다는 소문이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또 다른 콜린 후버의 책을 펼치고. 아, 오늘도 더울 예정이다. 최고기온이 34도로 예상된다. 아, 더워. 여름이라 그런지, 진짜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