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저작(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즈의 저작)의 바탕이 되는 하나의 가정에는 나도 공감한다. 발전이나 비발전을 지향하는 정치적 제안이든, 계속 발전해야 할 의무는 없으므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든, 근본적으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균형을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균형은 특히 자연 스스로 재생하고 재생산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26쪽)
원래 자연이 가진 균형을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의지가 우리 인간에게 있던가. 좀 더 편한 길, 좀 더 빠른 길을 원하는 인간의 탐욕을 막을 수 있을까.
<세계은행>의 자금이 원자력 발전소를 필리핀의 지진대에 건설하는 데 쓰였다. 이 발전소는 지진 위험 때문에 가동된 적이 없다.
역시나 <세계은행>에서 나온 자금이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 투쿠루이댐 공사에 쓰였다. 이 공사는 총 1,340만 톤의 목재에 해당하는 나무 280만 그루를 베어내는 대신 물 밑에서 썩어 가도록 방치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끔찍한 영향력이 잘 알려진 고엽제와 다이옥신이 숲에 뿌려졌다. 다이옥신 몇 통은 행방이 묘연한 채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다. 다이옥신이 든 통은 압력 때문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고, 댐 건설로 생긴 호수를 오염시킬 수 있다. 이 호수는 파라주께주도 벨렝의 물 공급원으로, 오염된 물은 그곳 주민 120만 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229쪽)
세계은행 돈 버리기 대작전. 지진대 위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하는 센스. 미친 대작전의 결과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하룻밤 새에 조상 대대로 머물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 농민들,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
식품 수입은 단지 외화 문제만이 아니다. 식품 수입은 한 나라가 자기 고유의 역사 및 지리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244쪽)
한살림 조합원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식량 주권 수호’는 아니었고 (그러나 식량 주권의 핵심인 쌀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작지 않다. 흰 쌀밥, 현미밥, 흑미밥, 검은콩밥 좋아하는 사람), 항생제를 덜 먹은 고기를 먹겠다는 거였다. 달걀도 유정란. 마당에서 뛰노는 암탉들이 낳은 알. (닭들에게 미안합니다) 유기농 혹은 무농약 채소를 먹고 싶어서 한살림 이용을 시작했다. 모든 제품을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과일, 화장지, 과자, 라면 등 제외), 점점 더 이용 범위가 넓어지기는 했다. 농민과의 직거래가 그분들에게도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소비자로서는 믿고 먹을 수 있는 곳이라 고맙게 생각한다.
조합의 목표물 중 하나는 종자 특허권이다. 기업이 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바탕으로 재산권을 주장함으로써 지역민의 종자를 가질 권리가 부정될 수 있고, 따라서 지역민의 생존에 악영향을 끼친다. 기업이 판매하는 실험실의 교잡종 종자는 생식력이 없기 때문에, 농민이 어쩔 수 없이 이런 씨앗을 사용하면 매년 씨앗을 다시 구입해야 한다. 또, 그 씨앗이 발아하여 성장하는 데 필요한 비료와 해충 억제제도 대개 씨앗을 판매하는 바로 그 기업에서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농민이 자연 종자를 사용하거나 판매하려고 하면, 교잡종 종자를 불법 판매한다는 죄목으로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 그리고 피고 스스로 자신이 무죄임을 입증해야 한다. (248쪽)
씨앗이란 무엇인가. 흙에 심어 물과 햇빛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씨앗 아닌가. 나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이런 바보 같은 짓이 너무나 우습고 기가 차다. 똑똑한 척하면서, 아니 실제로는 엄청나게 똑똑한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의 잇속 챙기기에만 올인하는 이 인간 군상들의 한없는 뻔뻔함에 뭐라 보탤 말이 없다. 바보냐, 이 멍충아.
일부 지역의 새우 가공 과정은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건네준다. 파키스탄의 카라치 어장에 있는 마카르 콜로니가 그러한 경우다. 이곳은 갑각류 가공 과정에서 아동을 철저하게 착취한다. 아이들은 관리자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받으면서 축축하고 날카로운 바닥 위에 길게 줄을 지어 쭈그리고 앉아 하루 12시간 동안 새우 껍질을 벗긴다. 임금은 새우로 가득 채운 바구니 수에 따라 산정된다. 간신히 새우 15킬로그램을 손질한 아이들은 2달러를 받는다. 얼음과 새우가 섞인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고 쭈그린 채로 일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손가락 관절염과 척추 손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427쪽)
부추전에 넣는 냉동새우는 워낙 소량을 사용하니 괜찮을 것 같은데, 아, 새우튀김. 극도로 피곤한 날에 챠이의 밀크티(샷추가)와 새우튀김은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제 어쩌란 말이냐. 완벽하게 끊을 수는 없을 테지만 횟수는 줄여야 할 테고. 내 새우튀김 어쩌면 좋단 말이냐.
선진국에서는 육류를 엄청나게 소비하기 때문에 육류의 집약적 생산(더불어 인도 같은 나라들에는 너무나 낯선 집약적 도축)이 이뤄진다. 동물을 논밭 가는 기계로 대체해 버린 녹색 혁명 이후, 우리는 가축을 오로지 육고기 혹은 우유 생산자로만 바라본다. 바로 집약적 사육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굴리엘모 도나델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비만은 서구인의 특징으로, 서구인의 절반이 비만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섭취하는 식품의 양과 사람들의 생활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품의 질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육류 속에 다량의 호르몬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육 시설에서는 질병을 예방하려고 항생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합니다. 항생제가 누적되면서 우리 인체를 해칩니다." (454쪽)
채식 제안은 고미숙 선생님의 공동체 운영에 대한 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에서 처음 읽었다. 경제적이고 몸에 좋고 준비가 간단하고 설거지하기도 편해 육식보다 나은 채식의 우수성(?)에 대해 강력히 설파하셨다.
2400년의 지구, 2500년의 지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내 아이들도, 내 아이들의 아이들도 그때는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일 오후,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산처럼 쌓여있는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저게 다 썩으려면 50~80년은 족히 걸릴 텐데…
나는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육류 소비를 자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소, 돼지, 닭이 겪는 고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상상만 해도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생활임은 확실하다. 소고기, 돼지고기는 가급적 줄이고 있고, 치킨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건데 여드름에도 안 좋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특정인을 겨냥한 멘트). 달걀은 작은 아이만 먹고 있고, 가능하면 라떼를 마시지 않고 두유라떼를 마시려고 한다. 버터는 안 먹어도 괜찮은데, 치즈가 문제다. 얼마 전에도 마트에서 2개에 만원이어서 브리치즈를 2개 사 왔다. 한동안 안 먹었는데 다시 치즈 안 사기를 결심해야겠다. (알프스의 하이디도 아니면서 치즈에 진심인 사람)
텀블러 가지고 다니고 있고(현재는 수도권 4단계라 텀블러 안 받아줌), 장바구니 이용하고, 비닐 사용을 가급적 줄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실천의 결론은 ‘소비 지양’이 될 거라는 걸 안다. 먹는 것 이외에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정희진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가능한 방법들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할 수 없는 것(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제 세탁 건조기는 포기하지 못하겠다. 한 번 써보면 그렇게 된다더니, 건조기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코로나 상황이 잠잠해지면 비행기도 타고 싶다. 같은 거리 이동 시 탄소 배출량이 기차의 20배라는 그 비행기를 말이다.
하지만 다른 건 가능하다. 에어컨 자제하기(더위 잘 참는 사람)도 도전할 수 있고, 겨울에 난방 덜 사용하기도 가능하다(집에서 외출용 점퍼 입고 수면 양말 신는 사람). 가정에서의 온수 사용을 줄이기 위해 설거지할 때 찬물을 이용하고, 덜 씻고, 진공청소기도 덜 돌리는 방법(앗싸!)도 있다.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페미니즘 투쟁은 종자를 지키고 숲을 보존하고 농지를 보호하려는 농민 운동과 만났다. 동물 친구를 위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육류 소비 제한, 달걀, 우유, 치즈, 버터 등 유가공품 소비 자제는 포화 상태에서도 추가 생산을 독려하는 무자비한 현 시스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새우튀김. 이렇게 얻는 새우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새우튀김이라면, 줄여가야 한다. 완전히 끊을 수는 없겠지만, 다섯 번을 두 번으로, 두 번을 한 번으로 줄여가야 한다. 한 번을 0번으로 줄이는 데까지. 나의 갈 길은 엄청 멀다고 한다. 쪼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