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이렇게 세 권 빌렸다.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을 대충 훑어보고 느낀 건데, 나는 아직 인생을 뒤돌아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솔직해야 할지,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말할 수 없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철모르는 사람이라 그런 거라 생각한다. 미뤄둬야 할 책이다.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는 주위에 암 판정을 받은 사람이 부쩍 늘어서 빌린 책이다. 친구의 오빠와 언니, 가까운 선배까지. 줌 모임 중에 진지하게 암 보험을 권유하던 친구의 말이 오래도록 귀에 울린다. 하지만 역시나 목차를 본 후에는 읽기를 주저하고 있다. 알고 싶은 마음만큼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알고 싶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라서 이해하기 싫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건,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몸을 조절할 수 없으며, 움직일 수 없고, 빠른 속도로 부패한다. 육체는 이렇게 티끌이 되어 결국에는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여긴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계에서 새로운 출발을 상상한다. 나는 그런 세계, 그런 우주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슬픈 불멸주의자』의 결론은 이렇다.
죽음과 타협하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무섭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 연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의미와 가치, 사회적 관계, 영성, 개인적 성취, 자연과 동일시, 순간적인 초월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잘 조합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찾으라. 이런 방도를 제공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장려하고 불확실성 및 자기와 다른 신념을 품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 (345쪽)
죽음과 타협하라. 그대로 받아들이라. 이런 주장은 모순적이다. 내가 죽었는데, 내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인데,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영원히 지속될 의미가 내게 무슨 소용인가. 간디를, 보부아르를, 마거릿 애트우드를 기억하고 또 기억할 테지만, 이 세대가 지나고 나면, 인류가 멸망하면 그것이 또 무슨 소용인가. 내가 사라졌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방인』에서 카뮈가 말한 그대로,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일 뿐이다.
… 그 순간부터 이미 마리의 추억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었다. 죽었다면, 마리는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의 대상이 못 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는 사실도 나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생각하기 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128쪽)
저 멀리 사라져가는 그 애의 뒷모습, 눈치 없이 똑똑 떨어지는 눈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따뜻한 손,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 약속과 다짐, 아껴주는 마음, 또 다른 나로서의 딸,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남자, 엄마 그리고 또 엄마.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사라진다. 나는 사라져 버린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일 뿐이며, 진화의 단계 속에서 ‘영혼’의 등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을 들어보자.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상해 보자.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552쪽)
이것이 죽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가. 아무런 목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간의 삶. 그런 삶이 옳은가 혹은 그런 삶이 행복한가라는 질문과 상관없이 정말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우리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가.
암과 심장병, 두 차례의 대수술을 이겨낸 일본 지성계의 대표, 일흔다섯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죽음은 두렵지 않다』에서 무엇이라 말하는가. ‘임사체험은 뇌의 착각일 뿐’이라는 주장과 언젠가는 죽는다(121쪽)는 사실에 대한 언급과 뇌는 화학적 기계장치일 뿐(138쪽)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오랜 독서와 전 세계 전문가들과 만남과 취재, 뇌과학에 대한 연구를 종합한 결론은 무엇인가.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그 말의 근거는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모르는’ 영역은 새롭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 ‘모름’은 내가 죽음에 관한 철학을 공부하며 고민하던 젊은 시절의 그것과 사실 큰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67쪽)
결론은 ‘모르겠습니다’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라 말한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다. 모르겠습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빌 브라이슨은 엄청난 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는, 죽은 후에 원소의 재활용을 통해 다른 존재로 만들어질 것(148쪽)이라 말한다. 역시나, 원자의 결합으로서 존재했던 현재의 ‘나’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김상욱과 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는 같은 이야기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
우리는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과학의 진실을 안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임을 안다.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필멸의 생명이란,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조립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 속 유구한 생명의 흐름은 지속될 것을 알고도 개체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34쪽)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감각과 감정,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의식은 육체와 함께 소멸해 버리는 것인가. 현대과학의 결론처럼, 뇌는 작은 살덩어리일 뿐이며, 물질로서의 뇌가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것, 우리가 ‘자아’라고 인식하는 ‘나’라는 개체 속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와 경험이란, 한낱 뇌 내부의 신경세포와 화학물질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이라면, 답은 한 가지뿐이다. 죽음이란 육체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기능을 멈추고, 우리 몸의 일부였던 뇌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이다. 뇌의 속임으로 운용되던 ‘자아’라는 관념이 생명 정지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왜 사랑하는가. 왜 미워하는가. 왜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아가는가. ‘죽음’에 대한 책을 읽어갈수록 오히려 의문은 더 커져만 간다. 목적에 대한 나의 집착이, 의미에 대한 나의 갈구가 망상에 불과하다면, ‘나’라는 존재는 왜 살아있는가. 이렇게 거대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우주 속에 나는 그저 스쳐 가는 보이지 않는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인데. 나는, 왜 지금 살아있는 것인가. 이것은 신의 존재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나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건 ‘종교’라는 문화의 한가지 형식에 대한 호불호만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왜,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가. 왜 그는 죽고 나는 살아있는가. 왜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나만 남아있는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의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리고 죽을 것을 알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지금 나는 왜, 살아있는가.
그게 답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게 정말 우리 삶에 대한 진실한 해답이 될 수 있느냐 묻는 것이다. 천국이 진짜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정말 그렇게 믿느냐 묻는 것이다. 뇌는 1,400그램의 살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는 이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존재에 불과하니, 현재를 즐기고,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답이냐 묻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답이냐고 묻는 것이다. 답이 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