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스티븐 호킹에게 관심이 있어서도, 블랙홀에 흥미가 있어서도 아니다. 해설을 맡았다는 이종필 교수를 유튜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이종필 교수 때문도 아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건 오로지 책의 크기 때문이다. 작고 얇아서.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과 열역학 제2법칙과 엔트로피는 항상 매혹적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우주,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구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의 규칙에 대해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내가 알지 못하는 법칙과 운동에 의해, 나의 세상이 살아 숨 쉰다는 것, 나의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나 역시 살아있다고 느낀다.
1부는 스티븐 호킹의 BBC 리스 강연을 담았고, 2부는 이종필 교수의 해설이다. 다 이해하겠다는 욕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읽는 처지이어서 역시 2부가 읽기 편했다. 과학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진 분들이 읽기에는 쉬운 책이고, 호킹복사, 일원성 연산자, 끈 이론 등을 간단하게라도 이해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좋은 안내서가 될 듯하다. 여러 법칙과 규칙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이것.
다른 천체는 물론 그렇지 않다. 질량이 똑같더라도 크기가 얼마인가에 따라 표면중력도 달라지고 평균밀도도 달라진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랙홀 ‘대머리 정리no hair theorem’라 부른다. 모든 블랙홀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독특한 성질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게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뽐낼 수 있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의 헤어스타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108쪽)
떠오르는 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카락 없는 대머리이고, 제일 먼저 떠오른 남자는 M. F. 그 남자가 아니라, J. S. 바로 그 남자였다.
2.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의 두 번째 책이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의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책 제목이나 목차를 봐서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할 것 같지만, 반 정도 읽은 현재로서는 ‘언어’에 대한 생각을 더 치열하게 풀어냈다는 느낌이다. 소쉬르의 애너그램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어도 재미있게 읽었다. 제일 흥미로운 챕터는 ‘당연히’ <제2강 : 하루키가 문학의 ‘광맥’과 만난 순간>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1919년 『대장 몬느』, 1925년 『위대한 개츠비』, 1953년 『기나긴 이별』,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서사의 ‘광맥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구멍을 파는 동안’에 어느 날 문득 문학적 계보의 도도한 흐름과 마주쳤습니다. ’광맥’이라는 말은 땅속 깊이 있기는 한데 언제 생겼는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매장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발밑을 자기 곡괭이를 사용해 파내려가는 동안 ‘누구의 것도 아닌 흐름’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생각합니다. (57쪽)
저자는 알랭 푸르니에의 작품이, 피츠 제럴드에게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로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한다. ‘화자의 약하고 아름답고 사악하고 무구한 또 다른 자아의 영원한 실종’이라는 주제가 네 개의 작품에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54쪽)는 것인데, 네 개의 작품을 관통하는 ‘광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구조를 그대로 ‘베끼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인지할 수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공했다. ‘금맥’을 찾아낸 하루키에게 박수를.
3. 타이탄의 도구들
새해맞이 기념으로 자기계발서 한 권 읽었다. 유명하신 분들,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신 분들 한 자리에 모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끔 서로 간의 주장이 어긋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끝내 성공하고. 욕심내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한 번의 인생, 우리 모두 더 행복하고 더 값진 삶을 원하지만, 해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명상, 아침 일기 쓰기, 메모하기 등은 삶을 새롭게 구획 짓는 (이미 알고 있는) 좋은 제안들이다. ‘오늘의 메뉴’, ‘한살림, 마트 다녀오기’만 적지 않고 다른 것도 적고 싶다. <모든 길은 스스로 열린다>의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사람, 남들은 다 잘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걱정하지 마라. 남들도 잘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핵심이다. 꼭 알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앞으로 계속 가면 된다. “꼭 비결을 캐내고, 뭔가를 알아야만 열심히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에서 벗어나야 자연스럽게 몰입이 된다. 무엇이 나를 창의적인 몰입으로 이끄는지 거의 4년 동안 배우고, 묻고, 생각했지만 얻은 답은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어느새 내 자신이 저절로 몰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206쪽)
그냥 앞으로 계속 가면 된다는데, 그곳에 길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길을 모르는데도 일단 앞으로 걸어갈 수는 있다. 끝까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멈추지 말고 걸어가면 된다는 것이고, 그 길은 바로 내 발 앞에.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누구든 답은 이미 알고 있다.
4. 올랜도
주인공 올랜도는 16세기(1588년) 영국에서 16세의 미소년으로 등장해 30세에 남자에서 여자로 성이 바뀌는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 그녀는 이후 300여 년을 살아가다가 1928년에는 36세의 여인이 되어 있다. 작품 내에서는 이 소설이 ‘전기’임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오히려 울프는 전기적 요소와 판타지적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전기’와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듯하다.
두 성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섞여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양성은 유동적이며, 남자답거나 여자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옷뿐이고, 그 속의 성은 겉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흔히 있다. 이로써 생기는 분류와 혼란은 누구나 경험한 바 있다. (167쪽)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비슷한 ‘며칠간의 깊은 잠’ 이후 올랜도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다. 터키에 파견된 영국 대사로서 격무에 시달리던 젊은 남성 올랜도는 이제 터키의 집시들과 함께 산과 들을 떠도는 자유로운 여성이 된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남성의 삶으로, 여성의 삶으로 ‘살아진다’. 소재의 특이성만큼이나 역사를 가로지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히 독보적이다.
작가와 작품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작품 속의 모든 장치를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글로 쓰인 모든 것들은, 모든 문장은 결국 작가를 투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묻게 된다. 올랜도의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고, 올랜도의 물음이 버지니아 울프의 물음이라는 걸 기억할 때, 이 소설의 모든 말과 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난다.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편안하게 읽히고, 『댈러웨이 부인』만큼 재미있다. 사실은, 훨씬 더 재미있다.
그렇게 그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 한쪽을 뭔가 부드럽지만 묵직한 것으로 얻어맞았다. 기대로 잔뜩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깜짝 놀라 칼에 손을 가져갔다. 이마와 뺨을 여러 차례 얻어맞았다. 건조한 한파가 너무 오래 계속된 터여서, 이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비가 얼굴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55쪽)
버지니아 울프를 읽지 않았던, 내 모든 지난날이 아깝고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