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부터 도서관 대출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본격적으로,라고 말하는 건 이전에도 도서관 대출업무는 이어졌기 때문인데, 지하철역 무인대출기를 이용한 대출은 가능했다. 물론 파란색 ‘예약가능’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감탄했던 도서관 업무는 ‘비대면 예약대출’. 난 한 번도 이용해보지 못했는데, 아침에 도서관 홈페이지에 대출하고 싶은 책 5권의 등록기호를 입력하면 선착순 30명에게 사물함 비밀번호가 문자로 발송되고, 2시 이후 책을 수령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아이디어 내신 분 때문에 도서관 직원들은 바쁘셨겠지만,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2월에 상호대차 신청했던 『홍수의 해』를 드디어 집으로 모셔왔다. 알라딘에서 응원과 기대와 격려를 100만원치 받은 관계로 『오리엔탈리즘』은 반드시 완독해야 하는 책의 자격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고, 친구가 선물해준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는 표지만 봐도 가슴이 콩콩 뛰는 이번 주의 기대작이다. 5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한 번에 쭉 읽어야지 마음먹었는데 아직 74쪽이고, 오늘밤에는 2주 동안 기다린 『My Cousin Rachel』이 도착할 예정이다. 그 경쟁을 뚫고 선택받은 책은 『홍수의 해』이다.
나는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다. 암기를 잘 못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험한 일에 대해서 기억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쪽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요즘에는 그게 나의 선택 즉 나의 무의식적인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좋은 기억에도, 나쁜 기억에도 해당되는데, 이를테면, 나는 존경하고 사랑하며 심히 흠모하는 마거릿 애트우드님의 디스토피아 시리즈 1권 『오릭스와 크레이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2권을 펼친 지금, 나는 1권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 왜 이럴까 한탄하기 마련인데 나는 또 그런 게 없다. 아, 읽었는데 다 까먹었구나. 2권은 좀 다른 이야기겠지. 여유롭게 아무런 걱정 없이 2권을 펼친다. 1권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면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뀔텐가. 내가 지금의 나인 이유는 이런 나를 그냥 두었기 때문인가. 고민은 잠시,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에 대한 생각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나는 토비가 된다. 렌이 된다.
두 차례의 홍수와 두 번의 언약에 대해 아담 1이 연설한다. 연설의 마지막 문단. 옮겨두고 싶은, 남겨두고 싶은 문단이 여기 있다.
적어도 하루에 일곱 번, 낯선 사람과 만난 다음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는 바입니다. 이 근본적인 예방책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재채기하는 사람 옆에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우리 다 같이 노래합시다. (166쪽)
문학이 천재들만의 것은 아니지만, 짧은 문장 아니 마침표만으로도 천재는 자신이 천재임을 증명한다.
게다가 기도는 따분했고 신학 체계는 마구 뒤섞여 있었다. 얼마 후에 인류가 전멸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어째서 사소한 생활 방식에 대해 그토록 까다롭게 구는 걸까? 토비는 재난이 임박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하나도 볼 수 없는데도 정원사들은 그것을 굳게 믿었다. 어쩌면 그들은 새의 내장을 판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91쪽)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릴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걸까? 사실 우리는 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곳에 서서 그 모든 냄새를 맡으며 나는 새키와 크로제 눈에 내가 예뻐 보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276쪽)
난 지미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때 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넌 아직도 와컬라를 사랑해 아니면 그 대신 날 사랑해?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가 되니?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그러던 중 와컬라 프라이스가 태평양 연안으로 이사를 갔고 침울해진 지미는 또다시 나보다는 글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그게 지미의 답변이었고 그 때문에 난 무척이나 불행했다. (400쪽)
비늘꼬리 클럽에 가 보라고 한 건 미용체조 강좌를 담당하는 교수였다. 나는 제법 춤을 잘 췄다. 그리고 비늘꼬리 클럽은 건강 수당과 치과 보험도 있는 합법적 조합인 섹스마트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매춘부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수많은 아가씨들이 그곳에 취업했고 일부는 그런 식으로 멋진 남자들과 만나 이후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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